리포트

사도 바울의 창조 신학(3)

편집자 주조덕영 박사의 사도 바울의 창조 신학 글을 4회에 거쳐 연재합니다조덕영 박사는 조신학연구소 소장창조론 오픈 포럼 공동대표평택대 신학부 겸임교수로 사역하고 있다.

4. 인간의 의식주 문제(고린도전서 8장을 중심으로)

사도 바울이 인간의 의식주 문제에 대해 심각한 의미를 부여한 적은 없다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을 빼곤 무엇이든지 자신에게 유익하던 것을 그리스도를 위해 모두 해로 여길 뿐 아니라 모든 것을 해로 여기고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처럼 여겼던 사람이기 때문이다그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았다(4:12). 하지만 모든 세상은 그리스도의 세상이요 모든 창조 세상은 그리스도가 지으시고 운행하시는 섭리의 땅이다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케 하는 일이 바울의 사역 속에 기다리고 있었다.   

▲조덕영 박사

 

 

그중 가장 첨예한 문제는 매일 닥치는 섭생에 관한 것이었다모세 율법은 다양한 음식 규례를 다루지 않던가고린도 지역에서 이 문제가 정면으로 발생한다바울은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였을까헬라의 고린도지역은 우상과 잡신과 음란이 넘쳐나는 도시였다시장에 출하되는 육류들 대부분은 온갖 잡신들을 향한 음란한 제사 속에서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들이었다고린도 교인들은 이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들을 먹어도 되는 것인지 바울에게 질문하였다이 문제는 초대교회 심각한 이슈이기도 했다(1514-15). 고린도전서 8장 본문을 통해 이 우상에 바쳐진 제사 음식과 먹거리 전반에 대한 관점을 살펴보자.

(1) 첫째 우상(idol)은 아무 것도 아니다(고전8: 1-7).

당시 고린도 사람들은 우상에 대해 약간의 지식들이 있었다그걸 가지고 서로 고기를 먹어도 되느니 먹으면 안 되느니 논쟁을 벌였다여기에 대해 바울은 다음의 다섯 가지를 지적한다. 1) 지식(여기서 지식은 남보다 별난 신비적 지식 즉 영지주의적 지식을 말함)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든다. 2) 지식보다 덕을 세우는 것이 사랑이다. 3) 지식이 있다고 생각(자랑)하는 자들은 실은 당연히 알만한 것도 잘 모르는 자들이다. 4) 참된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것과 관련된다. 5) 따라서 하나님이 알아주는(인정하는사람이 참 지식을 가진 사람이다.

이 같은 관점에서 볼 때 우상은 사람이 만든 것으로 인간의 길흉화복흥망성쇠생사를 주관하지 못한다따라서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대단하게 여길 필요도겁낼 필요도거리낄 필요도 없다제사 음식이든 우상에게 바쳐졌던 음식이든 먹든 안 먹든 아무런 문제가 없다우리는 창조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아닌가(6). 우상에 바쳐진 고기를 먹느냐 안 먹느냐의 문제는 사실 믿는 이의 논쟁거리가 아닌 것이다오히려 반대로 이방인들이나 따질 문제이다속되고 부정 탄다고 여기는 사람에게나 두려움을 줄 뿐이다.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롬 14:14).

(2) 둘째 식물은 우리를 세우지 못 한다먹거리의 유익은 아주 작은 유익에 불과할 뿐이다(8).

이것을 일반 은총이라 한다즉 믿지 않는 이들도 누릴 수 있는 자연 은총이다물론 인간에게 바른 먹거리의 유익은 분명 있다(단 10). 평범하게 먹든 잘 먹든 작은 유익일 뿐이요 영생을 믿는 신앙의 눈으로 본다면 다만 약간의 유익(수명 연장육체적 건강)이 있을 뿐이다건강하게 살아도 결국 인간은 언젠가 죽게 마련이다(90:10). 세우지 못 한다는 말은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말이다.

본질상잘 먹는 유럽 사람들이나 가난한 아프리카 사람들이나 우상 식물을 먹는 자들이나 먹지 않는 자들이나 식물은 우리의 영적 삶을 세우는 일과 별 관련이 없다음식은 선하지만거룩과 무관하다음식을 먹지 않는다고 해서 더 경건해지는 것은 아니다바리새인들은 정결법과 안식일 규정을 철저히 준수했다하지만그들은 결코 정결하지도안식을 누리지도 못했다경건에 이르는 길을 사도 바울은 말씀과 기도야고보는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고 자신을 지키는 것이라고 했다하나님께서 만드신 것들은 그 자체로 속된 것은 없다다만부정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만 부정할 뿐이다.

(3)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자유함이 믿음 약한 자를 넘어지게 만드는 장애물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하고 절제하라(9-12).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요 우리를 세우는 것도 아니므로 먹든지 안 먹든지 별 문제는 없다하지만 자유 하더라도 절제할 필요가 있다믿음 약한 사람들은 사소한 것에도 믿음이 혼란을 겪기 마련이다형제에게 죄를 지으면 안 되고 형제의 양심을 상하게 해서도 안 된다그런 것들은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과 다르지 않다약한 자를 실족케 함은 아주 큰 죄이다(18:6). 자유하다고 목사가 거리낌 없이 아무 것이나 함부로 먹는 것을 보고 초신자들이 멋대로 따라하면 교회는 질서가 무너지며 혼란이 발생한다사실 목사들이나 교회 지도자들은 무엇이든 먹어도 문제없다고 보양식조차 함부로 거리낌 없이 즐기는 경우가 있으나 때론 조심해야 한다필자는 애완동물을 아주 사랑하는(?) 어느 기독언론 기자가 사철탕 등 보양식 즐기는 교회지도자들을 비분강개(悲憤慷慨)하며 강하게 비판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4) 사도 바울의 개인적 처방은 신앙 지식보다 앞선 복음을 위한 배려와 사랑이다(13).

먹어도 아무 상관없는 이 우상 제물 문제에 대해 사도 바울은 어떤 개인적 처방을 하고 있을까바울은 무엇을 먹어도 아무 상관이 없음을 잘 알고 있었으나 복음을 위해 기꺼이 절제한다복음만 전해진다면 고기 한 점 덜 먹는 것이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이것이 올바른 지식을 바탕으로 남을 배려하는 사랑으로 나아가는 복음의 대선배 사도 바울의 결단이었다.

필자는 과거 부산에 집회를 갔다가 하루 세끼를 모두 회만 먹은 적이 있다집회 장소와 대접해주시는 분들이 모두 다르다보니 생긴 불상사(?)였다내륙 지방 출신 사람이라 회를 그다지 먹을 기회가 많지 않았던 내게는 아주 큰 고역(苦役)이었다사도 바울이 볼 때 이웃을 배려하는 것이 사랑의 마음이었지만(1-3대접해주시는 분들의 준비된 사랑을 생각해서 거부 하지 못하고 필자는 하루 종일 회를 꾸역꾸역 열심히 먹었다사도 바울의 개인적 처방은 신학적 지식과 처방보다 사랑이 먼저였다사도 바울은 먹어도 상관없는 우상에 바쳐진 제물을 형제들을 위한 배려로 평생 먹지 않겠다고 고백한다과연 그리스도인들이 강아지를 친자식처럼 여기는 형제들을 위해 사철탕 먹기를 금할 수 있을까이것이 범인(凡人)들은 흉내 내기 어려운 사도 바울의 결단이었다.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은 먹지 말라고 할 터이나 음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딤전4:1-3).

사도 바울의 새 창조 신앙

바울의 창조 신앙은 단순한 창조 신앙에 머물지 않는다창조주요 구속의 주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준비한다즉 성경의 창조 신앙은 궁극적으로 새 창조(구원 창조신앙으로 발전한다바울은 이 새 창조를 주로 강림(파루시아)과 부활이라는 말로 표현한다(살전4:16, 17). 게할더스 보스는 이 강림과 부활에 대해 첫 번째 부활은 그리스도가 강림하실 때 일어나고두 번째 부활은 그리스도가 그의 나라를 바치실 때 일어난다고 보았다부활의 시기와 빈도에 대해서는 신학적 관점들이 다양하게 존재한다본고는 이 부분을 지면의 제약 상 다루지 않는다다만 필자가 주목하는 바울의 새 창조 사상은 이 강림과 부활 속에 사도 바울이 사람뿐 아니라 모든 피조물들이 허무함의 종살이의 고통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기 위해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 중에 있다고 한 말이다(8:18-22).

기독교는 결코 동물을 무시하거나 동물에게 무례한 종교가 아니다인간은 피조물의 주인도 아니다청지기일 뿐이다바울은 동물 역시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이요 언약의 약속 안에 있는 존재임을 암시한 것이다하나님은 사람뿐 아니라 수많은 가축이 있는 니느웨 성을 불쌍히 여기셨다(4:11). 창조는 종말론적 구원을 지향한다태초에 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에 모든 피조물을 위한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실 것이며(65:17, 21:1), 아담의 죄로 인해 파괴된 인간과 동물 간에도 평화가 다시 회복될 것이다(65:25). 그 때까지 인간은 다스림의 위치에서 소명을 감당해야 한다이 다스림은 군림이 아니다.

인도의 신학자요 생태학자인 켄 그나나칸(Ken Gnanakan)은 이 다스림’ 안에는 사랑상호 연결지속 가능한 창조성다른 이들을 위한 배려종으로서의 섬김청지기하나님의 창조물에 대한 존경심정의라는 여덟 가지 요소가 들어있다고 했다마치 예수께서 죄 짐 맡은 우리 구주요 좋은 친구였던 것처럼 인간은 당연히 동물들과 사랑 안에서 함께해야 하는 것이다바울은 창조주 하나님의 새 창조 속에 이 같은 하나님 사랑의 본질이 담겨 있음을 시사한 것이다(계속).

조덕영 박사 bareunmedia@naver.com

사도 바울의 창조 신학(2)

편집자 주조덕영 박사의 사도 바울의 창조신학 글을 4회에 거쳐 연재합니다조덕영 박사는 조신학연구소 소장창조론 오픈 포럼 공동대표평택대 신학부 겸임교수로 사역하고 있다.

III. 사도 바울의 인간관

1. 창조주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인간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이기는 하나 아이러니하게도 창조주 하나님을 외면한사도 바울이 말하듯 인간의 본성은 핑계할 수 없는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창조주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한다바울은 사람이 하나님을 알면서도 그분을 하나님으로 영광스럽게 하지 않고 감사하지도 않으며 생각은 쓸모없고 마음은 어리석어 어두워졌다고 했다(1:21).

▲조덕영 박사

사도 바울은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람은 스스로 지혜로운 체하지만 사실은 어리석으며 영원히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오히려 썩어 없어질 사람이나 새나 짐승이나 기어 다니는 동물 형상의 우상을 섬기는 존재라고 했다(1:21-23). 불멸의 하나님의 영광을 소멸되어 버릴 것의 형상으로 바꾸어버렸다구약 시대뿐 아니라 바울이 살던 1세기 당시에도 샤머니즘과 토템과 물신숭배(der Feitischismus)가 만연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하나님은 그들을 그대로 내어버려 두셨다.

이 같은 인간의 어리석음은 첨단과학기술 시대를 자처하는 21세기가 되었음에도 여전하다우리 사회 속에서도 고급 승용차 앞에 놓인 돼지머리나 정부 행사에 고사(告祀)를 위한 떡이나 기관 단체 행사와 제사에 동물의 머리 고기가 등장하는 것이 여전히 낯설지 않다하늘에나 땅에나 거짓 신들이 많고 많은 신()과 주()가 있고 그것을 따르는 어리석은 피조물들이 여전히 허다하다바울은 인간의 마음이 창조주를 마음에 두기보다 피조 세계의 인간이나 동물이나 자연의 양상들을 섬기기를 좋아한다는 점을 꿰뚫고 있었다.

2. 창조주를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

바울은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을 내어 버려두셨다라고 세 번이나 강조하고 있다(1:24, 26, 28). 사람들이 하나님과 참 된 진리를 찾으려하지 않고 알려고도 하지 않으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부패한 마음으로 합당치 못한 악한 일을 하도록 내어버려두셨다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인간에 대해 하나님이 그대로 내어 버려두자 인간은 하나님의 것을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기 시작했다(1:25). 진리를 거짓과 맞바꾸었다.

바울은 오늘날까지 결혼의 창조 질서를 파괴하여 순리를 역리로 쓰는 동성애도 하나님의 내버려두심의 결과라고 했다(1:26). 바울이 로마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문제를 거론한 것으로 보아 당대 로마 시민들에게도 이 이슈는 가벼운 문제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이 같이 인간 자신이 스스로 마음의 정욕대로 사는 것에 대해 바울은 부끄러운 일이라 하면서 그 잘못된 행위에 대해서는 마땅한 보응(대가)이 있다고 했다그 보응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바울은 설명하지 않았다하나님이 직접적으로 언급하신 보응법적 규제동성 간 불편한 동거잉태하지 못함동성 간 연애로 인해 발생하는 문화적심리적육체적 불편함과 불균형그리고 예기치 못한 질병의 초래 등 보응은 많다.

지금도 동성애를 옹호하는 정치인들이나 우매한 대중들이 있다군 생활을 체험한 남자들에게 있어 군 생활 중 당하는 가장 곤혹스러운 상황과 경험은 바로 동성애 성향의 상관을 만나는 것이다전혀 상대방의 동의 없이 그들이 일방적으로 저지르는 폭력적 행위는 불쾌함뿐이요 어떤 병사에게는 자살의 충동을 일으킬 만큼 혐오스러운 체험이다그것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당하고 감싸라고군 생활을 경험해보지 않고 함부로 말하면 안 된다예수께서 마귀와 귀신과 독사의 새끼들을 감싸라고 하셨던가도착(倒錯)을 정상이라 말하면 안 된다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사람은 사랑해야 하나 죄와 죄인은 보응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그것이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법이다.

이 밖에도 온갖 불의추악탐욕악의가 가득함시기살인분쟁사기악으로 가득한 자들과 수군거리며 서로 헐뜯고 하나님을 미워하고 건방지고 교만하며 자랑하고 악한 일을 꾸며 대고 부모에게 불순종하고 미련하며 언약을 배신하거나 인정도 없고 무자비한 자들이 모두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한 사람들이 행하는 결과물들이다(1:29-31). 하나님의 법은 인간이 이런 식으로 살다가 죽는다는 사실을 끝없이 알려주고 경고한다그런데 어그러진 인간은 자기들만 이런 행위를 하는 게 아니다이렇게 하는 사람들을 옳다고 두둔까지 한다(1:32). 인간을 물질에 불과한 유물론적 일원론적 존재로 믿는 공산주의자들이 상습적으로 거짓말과 악을 정당화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정말 구제불능의 존재인가그렇다인간의 지식은 완전하지 않고 사람을 교만하게 할 뿐이다정부가 한반도 대운하를 밀어붙일 때 그 정당성을 설파한 것은 일부 지식인들과학자들이었다최근 방사성 물질 검출로 대량 회수 소동이 일어난 건강 침대 소동도 음이온이 건강에 이롭다는 일부 방송 의사들의 음이온 예찬에서부터 착안된 광고 결과물이었다임산부의 입덧을 드디어 잡았다고 과학의 성과를 찬양하던 진통제 탈리도마이드는 수많은 사지(四肢기형의 태아로 인해 많은 이들을 고통으로 몰아넣었다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인간에 대해 창조주 하나님은 피조물인 인간처럼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분이 아니다하지만 직접적 보응이 아니더라도 인간은 이렇게 스스로 그 보응을 충분히 달게 받는 것으로 대가를 치른다.

 

3. 바울의 육체론연약한 육체와 신령한 몸

바울은 육체(육신)라는 말을 아주 광범위하게 사용한다영국의 신약학자 브루스(F.F. Bruce)는 육체의 용법에 대해 (1) “사람의 신체”(2:28; 고후12:7; 4:13; 2:29), (2) “인간의 혈통 또는 혈연 관계”(1:3, 9:3, 5, 11:14), (3) 단순한 인류”(2:16; 3:20; 고전1:29)라는 의미로 구분하였다주석가 바클레이(William Barclay)는 이 문제를 좀 더 신학적으로 접근한다.

먼저 그는 신령한 몸과 대조하여 육체라는 말을 사용한다(고전15:44-46). 이 육체는 질병에도 고통 받을 수 있는 연약한 몸이다(4:13). 바울은 예수도 이 연약한 육체로 인해 육체적 죽음을 맞아(1:22) 화목 제물이 되었다고 했다즉 이 몸(육체, sarx)는 쳐서 복종시켜야 되는 연약한 몸이다그런데 이 육체는 또 다른 성향을 보인다. “우리가 육체에 있어(en sarki) 행하나 육체대로(육신의 생각대로, kata sarka) 싸우지 아니하노니”(고후10:3). 이 몸(육체)은 또 다른 경향성즉 중의적 요소와 의미가 있음을 언급한다.

사람의 본능에 속한 육체는 첫째 아담에게서 온 것이요(고전2“14) 신령한 생명은 둘째 아담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얻을 수 있다그러나 이 육신의 몸은 신령한 생활에 적합지 않으므로 사람의 몸이라 하고 신령한 몸은 부활의 몸이라 하였다겉으로 보면 다 같은 육체이나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요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다이 육체의 몸은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해야 한다(6:5).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한다고 우리 몸의 다른 측면이 없는 것이 아니다우리 인간에게는 육체의 상전이 장악할 수 없는 몸이 있다바로 진정한 하늘의 주인이 다스릴 신령한 몸이다.

바울은 율법적 관점에서는 육체적으로 누구보다 신뢰할만한 인물이었다(3:4). 생후 8일 만에 할례를 받은 베냐민 지파에 속한 순수 이스라엘 사람이요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바리새인으로 교회를 핍박하기까지 열심을 내었던 율법에 비추어 보면 흠이 없는 사람이었다그러나 그러한 육체가 전부가 아니었다알고 보니 율법에 매달린 이 육체는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의 가치를 알고 난 다음에는 마치 배설물이요 쓸모없는 쓰레기나 다름이 없었다몸과 마음이 육법을 지켜서 의롭게 되는 게 아니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 육체조차 의롭게 된다(3:9). 그래서 바클레이는 바울이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7:5)라고 말한 표현을 우리가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이라는 뜻으로 이해한다율법적 싸움을 벌이던 때요 자신의 힘으로 무언가 얻으려다가 오직 좌절과 패배와 절망을 맞볼 수밖에 없는 우리 인간의 보편적 모습을 말한다.

바클레이는 이 몸(육체육신, sarx)과 유사한 또 한 단어를 지적한다바로 사르키코스(sarkikos)이다바울은 불신자도 아니요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도 아닌3의 인간 곧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이 있다고 지적한다아이처럼 여전히 단단한 것이 아닌 젖을 먹고 이들 그리스도인들이 있다면 병든 육체가 육신의 질서를 잃어버리듯 교회도 시기와 분쟁에 휘말리게 된다(고전3:3-4). 성화되지 못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설명한 단어라 볼 수 있겠다.

육신을 따라 생각하는 것(8:6)과 육신을 따라 사는 것은 죽는 것이요(8:12, 13) 죄 아래 팔린 삶이다(7:14).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은 벗어버려야 한다(4:22).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이다(5:24). 다시는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기 위해 우리의 옛 사람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아 멸해야 한다(6:6).

조덕영 박사 bareunmedia@naver.com

사도 바울의 창조 신학(1)

편집자 주조덕영 박사의 사도 바울의 창조신학 글을 4회에 거쳐 연재합니다조덕영 박사는 조신학연구소 소장창조론 오픈 포럼 공동대표평택대 신학부 겸임교수로 사역하고 있다.

I. 사도 바울

사도 바울은 과연 누구였을까사도 바울만큼 기독교 역사에서 극적이고독특하고중요한 인물이 있을까그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며무엇을 배웠으며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외모는 어떠했을까출신과 가문은그리고 회심 이전에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다가 부활의 예수를 만난 후 돌연 신앙의 변곡점을 맞았던 것일까스스로 성경을 읽을 수 있는 그리스도인 가운데 한 번쯤 이런 궁금증이 없었던 사람이 있을까?

▲조덕영 박사

바울은 길리기아 다소(9:11;21:39;22:3)에서 로마 시민이었던 부모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성경에서 그의 가족에 대해 더 이상 알려진 내용은 거의 없다제롬(Jerome)은 한 구전을 통해 그의 부모가 원래 기스갈라(Gischala)라고 불린 한 성읍 출신으로 주전 1세기 로마가 팔레스타인을 유린할 때 다소로 도피한 사람들이었다고 했다. 2세기 문헌은 바울의 외모에 대해 체구가 작고 양 눈썹이 붙었으며 코가 좀 크고 머리는 벗겨졌으며 다리가 구부정하고 단단한 몸을 가진 은혜가 충만한 사람이었다사람처럼 보이면서도 때때로 바울은 천사의 얼굴(the face of an angel)을 가진 사람으로 보였다.”라고 묘사하고 있다천사의 얼굴이란 표현이 바울의 어떤 외형적 부분을 묘사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다만 바울이 선한 표정을 가진 평범한 외모의 인물로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로마 시민권을 가진 것으로 보아 평범한 히브리 가정이라기보다는 약간의 기득권을 누린 유대 출신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초대 교회 집사 중 한 사람이었던 스데반을 돌로 치는 자리에 함께 있던 불신자로서 놀랍게도 부활한 예수를 다메섹 도상에서 만났다그의 회심이 세상 그리스도인 가운데 그 누구와도 달리 정말 극적이고 독특한 이유다이후 그는 예수의 12 제자초대교회 집사 출신도 아닌 사람으로 부활하신 예수로부터 친히 이방인의 사도로 임명되었다그런 그가 없었다면 과연 기독교가 지금의 틀을 가진 종교가 될 수 있었을까?

바울에 관한 자료는 거의 전부가 신약성경 안에 들어있다첫째 바울 서신이요 둘째는 사도 행전이다사도 바울은 성경 계시의 저자 40여 명 가운데 가장 많은 성경을 저술한 저자다성경 66권 중 최소 13권이 바울이 쓴 책이다예수 불신자요 기독교 핍박자에서 극적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대면하면서 기독교회의 일원에 동참하게 된 인물로 공교회를 굳건히 견고하게 만든 공로자였다오늘날 기독교가 세계적 종교가 되는 데 있어 그가 최고 공로자 중의 한 사람이라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초대 교부들이 바울 저작들을 연구하고 다룬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루터와 칼빈의 종교개혁 사상도 바울 저작인 로마서의 이신칭의(以信稱義)에서 비롯되었다이후에도 무수히 많은 학자들이 바울 저작들을 언급하고 연구하였다헤겔불트만본 하르낙헤르만 리델포스게할더스 보스, F.F. 부르스칼 바르트그레샴 메이천윌리엄 바클레이알버트 슈바이처, N.T. 라이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배경을 가진 신학자들이 사도 바울 연구에 매달린 것도 기독교 안에서 사도 바울이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가졌던 인물인가를 증거한다비록 바울의 이신칭의만이 정경성의 표준(principium canonicitatis)은 아니었으나 종교개혁 이후 바울 사상의 요점이 기독교의 중심 교리 안에 자리 잡은 것은 분명하다.

바울이 가지는 이런 상징성이 구속 신학의 칭의 교리를 중심으로 이루어짐에 따라 바울 연구에 있어 미흡한 부분들이 생겨났다바로 창조창조주창조 세상에 대한 사도 바울의 관심은 관심에서 밀려난 감이 있다하지만 사도 바울의 창조 이해는 기독교의 올바른 창조 이해와 섭리에 대한 대단히 중요한 기초 자료이며바른 구속 신앙의 근본이 될 수밖에 없다.

이에 본 논문에서는 이 부분들을 다루어보려고 한다사도 바울은 창조를 어떻게 바라보았으며 자신의 복음에 어떻게 이 창조 신앙을 연결하고 있는가즉 사도 바울은 자신의 창조 신앙(신학)을 어떻게 구속 신앙(신학)으로 연결하여 기독교 신학을 완성해 간 것인지를 살펴보려 한다.

신약학자 윌리엄 바클레이(William Barclay)는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하고 믿었는지를 알아보기 전에 우선 두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고 했다.

첫째 바울은 조직신학자가 아니었다는 점을 지적한다예일대 교회사 교수를 지낸 교회사학자 윌리스턴 워커(1860-1922)도 바울이 요즘의 눈으로 보면 조직신학자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그의 저술들(세심하게 계획하고 논증하는 로마서를 포함하여)은 사실 우발적이고 개인적이었다고 했다바울은 신학을 체계화한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사실 바울뿐 아니라 모든 성경 저자들이 그렇다성경이 신학적 체계를 의식하고 쓰여진 책은 아니기 때문이다바울은 사람의 지성이나 지력에 충분한 만족을 줄 어떤 체계를 만드는 일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오직 자신의 경험에 의거한 믿음을 전하여 사람들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도록 하기 위해 그 믿음을 말하는 데 관심이 있었다그는 예수에 대해 말할 때 부활하신 주님에 대하여 자신이 경험한 것이라고 단순하게 말했다이것을 바르게 해석할 책임과 짐은 후대 신학자들에게 있다.

둘째바울 신앙 안에는 정적(靜的)인 것이 전혀 없었다복음의 내용에는 전승의 문제가 있기도 하지만 복음은 본질적으로 계시다이 계시는 성경 저자의 상황에 따라 가변적인 환경 속에서 주어졌다바울도 늘 이같이 변화하는 인간 경험의 조류에 항상 직면하면서 살았다때론 실수도 하고 사색가들과 이단자들을 응대하고 교회가 제도상 정통교회로 정착하기 이전 시기를 살면서 변화무쌍한 상황과 문제에 대면하고 그리스도의 신비스러운 보고에서부터 새로운 진리새로운 보물을 꺼내오는 일을 하였다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위대함과 새로운 풍요로움을 늘 발견하면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소개하려는 의도가 바울에게는 있었다텍스트와 컨텍스트에 대한 사도 바울의 구별과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너무도 정확했다는 의미다이를 바탕으로 바울의 기독론칭의론구원론죄론종말론교회론에 대한 많은 연구가 있었다.

문제는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결코 정적이지 않았던 사도 바울이 변화하는 과학 기술 시대를 살아가는 이 시대를 보고는 무어라 말하고 어떻게 복음을 설명하려 했을까 하는 점이다사도 바울 연구에 있어 주류에서 밀려난 바로 그 부분이다조금은 관심을 덜 받는바로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의 창조와 창조주그리고 작금의 창조 세상에 대한 것이다즉 오늘의 인간율법의식주환경(그리고 과학기술의 발전 속에 있는 세상에 대해 사도 바울의 계시는 어떤 연결 고리를 가질 수 있을까이러한 질문들은 우리 시대 그리스도인들의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조덕영 박사 bareunmedia@naver.com

찰스 핫지의 창조론과 사도 바울의 창조 신학을 알고 싶다면?

창조론오픈포럼 24차 모임


창조론오픈포럼 제24차 모임이 2019년 2월 23일 오전 9시 30분부터 신성교회(서울시 동작구 만양로 35, 정민 목사 시무)에서 진행된다.

창조론오픈포럼은 창조론은 자연과학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신학과 철학과학사인문사회학과 문학예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를 포괄하는 대표적인 학제 간 교류가 필요한 융합적 주제라는 취지로 지난 2007년에 시작된 창조론 전문가들의 모임이다.

 

▲서울대 환경대학원에서 있었던 포럼 모습(출처: 창조신학연구소 공식 블로그)

 

이번 포럼에는 찰스 핫지의 창조론(박찬호 교수), 기원 논쟁과 진화의 의미적 다양성(양승훈 원장), 창세기 1장의 재해석(허정윤 박사), 사도 바울의 창조 신학(조덕영 박사), 영화의 과학적 세계관에 대한 신학적 이해와 평가성결운동과 진화론 그 만남의 역사와 대응신무신론 비판 등의 논문들이 발표될 예정이다.

한편창조론오픈포럼의 관계자는 최근 창조론 오픈포럼의 과월호 논문들은 누리미디어를 통해 보급되고 있는 데 놀랍게도 다양한 사람들에 의해 유료로 다운로드 되고 있다창간호로부터 23호까지 약 200여 편의 논문과 서평이 실려 있는데 한 해 동안 편당 약 2만 원 정도의 인세를 받고 있다금액으로는 많지 않지만 한 편의 논문을 다운로드 할 때 지불하는 인세가 매우 적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관련 논문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라고 밝혔다또한 양승훈 박사는 창조론 오픈포럼이 한국 창조론 운동의 지평을 건강하게 바꾸고 있다고 생각 한다라고 전했다.

창조론오픈포럼은 관심 있는 사람 누구나 참가 가능하며 관련 문의는 공동대표 조덕영 박사(010-8963-0691)에게 하면 된다.

일시: 2019년 2월 23일 오전 9시 30

장소신성교회(서울시 동작구 만양로 35, 정민 목사 시무)

참가비: 1만 원(논문집다과 제공)

문의조덕영 박사(010-8963-0691) 

바른미디어 bareunmedia@naver.com

자연을 잇다

(사)행복한숲, 숲해설가 교육생 모집


산림환경교육 전문기관 ()행복한숲(대표 이원경)이 2019년 숲해설가 5기 교육생을 모집한다숲해설가란 산림교육을 위한 국가자격증 중 하나로국민들이 산림문화·휴양에 관한 활동을 통해 산림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고 올바른 가치관을 가질 수 있도록 해설하거나 교육하는 사람을 말한다.

14년 전부터 경기도 남양주시를 기반으로 활동해온 ()행복한숲은 산림청이 지정한 「산림교육전문가 양성기관」(제숲해설-2014-02)이다. 2011년부터 2014년까지 생태안내자 약 200명을 배출했으며, 2015년부터는 매년 40여 명의 숲해설가를 양성해 약 5,000명의 시민들에게 산림환경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숲은 경이롭다(사진 제공: (사)행복한 숲)

 

()행복한숲은 산림청에 등록된 「산림복지서비스 전문기관」(숲해설업·유아숲교육업·산림치유업)이기도 하다. 2017년부터 광릉 국립수목원의 산림교육 위탁운영뿐 아니라 각종 프로그램을 개발해 운영한다▲교육부 「누리과정」의 환경교육 내용을 분석하여 구성한 유아숲 프로그램 ▲환경부에서 인증한 사회환경교육 프로그램(환경생태교실▲교육부 자유학기제 (꿈길)체험처 등록프로그램 등 유아부터 성인까지 나이대별로 구성된 프로그램이 인상적이다.

목재 중심의 산림교육을 기반으로 자연환경 분야에 대한 관심과 흥미를 갖게 하고환경오염에 대한 문제의식 및 산림보호 생활 실천의 기반을 조성하는 목공 체험교육도 눈길을 끈다.

2019년 숲해설가 5기 교육생을 모집

□ 대상 산림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고 올바른 가치관을 가질 수 있도록 해설하거나 지도교육하려는 의지가 있는 성인

□ 인원 : 40명 이내

□ 교육비 : 120만 원(남양주시민 20% 지원)

□ 문의 : 031-511-6563

□ 신청 및 안내 바로가기 http://cafe.daum.net/eduforest/VQzn/21

바른미디어 bareunmedia@naver.com

하나님의 죽음 vs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

20세기 중후반에 활동한 신학자 가운데 위르겐 몰트만(Jurgen Moltmann)은 삼부작(Trilogy) 가운데 2부에 속하는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이란 제목의 책을 썼다신학을 조금만 접해본 사람이면 이 책의 제목 “Der gekreuzigte Gott”이 일으킬 논란이 금방 다가올 것이다하나님의 죽음이라는 실로 엄청난 논제를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물론 몰트만 자신은 결코 이 사실을 의도하지 않았다그럼에도 누군가에 의해서 하나님의 죽음이 가능한 것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이 제기될 수 있기 때문이다바울이 디모데에게 전한 말씀은 하나님의 죽음이 불가함을 명확히 언질하고 있다(딤전 6:14-16). 오직 하나님에게만 죽지 않음이 있기 때문이다창조와 함께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은 원칙상 죽을 수 있는 존재이나하나님은 그렇지 않다오직 그에게만 죽지 않음이 있기 때문이다위르겐 몰트만의 책 제목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십자가라는 형틀은 죽음 이외의 방식으로는 내려올 수 없는 형 집행 방식이기 때문이다.

▲유태화 교수

이와 대조적으로 하이델베르크신앙교육서는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을 이야기 한다. (40왜 그리스도는 죽기까지 자신을 낮추어야 했습니까왜냐하면 하나님의 공의와 진리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이외에 다른 어떤 방법으로 우리의 죄에 대한 대가를 지불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그리스도 예수를 뜻한다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며 동시에 참 사람이다두 본성이 한 인격에 거하는 존재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 예수이다하이델베르크신앙교육서의 제1저자인 우르시누스(Ursinus)나 그의 신앙고백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이 사실을 매우 주의해서 읽고 이해했었다신성과 인성을 분리 없이 혼동 없이 그리스도 예수라는 한 인격 안에서 읽고 해명해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신성과 인성은 근원적으로 분리되지 않는다심지어는 영혼이 그 육체로부터 분리되었을 때조차도 신성은 육체가 놓인 무덤을 비우지 않았고 동시에 영혼과도 함께 있었다심지어 인성을 따라서 그리스도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때에도 신성은 인성과 분리되지 않았다그러나 동시에 신성은 결코 인성과 혼동되지도 않았다인성을 따라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을 때에즉 영혼이 육체로부터 떠날 때에신성이 인성의 고난을 받고 피를 흘리며 죽음에 넘겨질 때에 본체적으로 혹은 존재론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는 말이다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리스도 예수의 수난은 신성의 직접적인 수난이나 죽음에 넘겨짐이 아니라 인성을 따라서 일어난 일이어서 하나님의 실제적 죽음을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다만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이 있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그리스도 예수라는 한 인격적인 존재는 신성과 인성을 함께 내포하는 존재이되그 인격 안에 있는 신성과 인성은 직접적으로 각각 자신을 상대방에게 전달하지 않고다만 간접적으로만 전달한다쉽게 말하여그리스도 예수의 인격을 통하여 신성이 표현될 때에는 인성이 신성과 함께 있으며인성이 표현될 때에도 신성이 인성과 함께 있지만그러나 어디까지나 직접적으로 신성을 표현하거나 혹은 인성을 표현하거나 하는 사실이 희석되지 않는 방식으로 그렇다는 말이다이런 면에서 보면그리스도의 수난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수난이고따라서 직접적으로 인성의 수난인 것이다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리스도 예수는 그 영혼과 육체로 수난과 죽음에 참여하는 것이다.  

▲몰트만의 Der gekreuzigte Got

이 사실을 하이델베르크신앙교육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37그대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당하셨다고 말할 때그대는 무엇을 고백하는 것입니까예수 그리스도께서 땅위에 사시는 전 생애 동안그러나 특별히 생애의 마지막 순간에전 인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친히 육체와 영혼으로 감당하셨다는 것입니다이렇게그리스도께서 유일한 속죄 제물로 고난을 당하심으로우리의 몸과 영혼을 영원한 정죄로부터 구속하시어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의와 영생을 얻게 해 주셨습니다.

37문답에서 확인하듯이 수난과 죽음의 직접적인 당사자는 인성을 그 인격에 수반한 그리스도 예수인 것이다그리스도 예수 곧 하나님의 아들로서 십자가에서 수난을 당하신 것이다.

이 수난에 신성이 배제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또한 기억해야만 한다인성이 수반된 그리스도 예수의 수난에서 몸과 영혼으로 자기 백성 모두의 죄를 실제로 담당하고 죽음의 심판에 넘겨질 때신성은 인성을 떠나지 않았다직접적인 수난의 당사자인 인성을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이사야 63장 9절에서 하나님이 죄인의 모든 고난에 동참할 수 있듯이죄인의 모든 죄를 담당한 예수의 모든 고난에 오롯이 동참한다우리의 죄를 담당하기 위하여 하늘을 가르고 우리에게로 오사(사 64:1) 성육신 한 그리스도 예수의 전 삶과 그 정점으로서 십자가에서 신성은 온전히 함께하였다인성에 정해진 수난과 고통을 신성이 공감하는 방식으로 경험하는 것이다인성이 실제로 직면했고 경험했던 죽음의 고통까지도 신성이 공감하는 방식으로 실제적으로 경험하였다그러나 실제로 죽지는 않았다.

다만하나님의 아들로서 그와 같이 행함으로써 다음과 같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던 것이다. “제 40왜 그리스도는 죽기까지 자신을 낮추어야 했습니까왜냐하면 하나님의 공의와 진리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이외에 다른 어떤 방법으로 우리의 죄에 대한 대가를 지불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인성의 직접적인 수난에 신성이 분리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다시 말하여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리스도 예수의 수난이었기 때문에한 사람의 죽음이 많은 사람의 죄의 값을 지불하고 죄와 사망에서부터 생명에로 옮길 수 있었던 것이다비록 직접적인 수난과 죽음에 넘겨진 것은 아니었으나간접적으로 인성과 함께 있음으로써 택함받은 모든 백성의 죄를 실제로 감당하여 진노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인성의 수난은 실제적이되 그 효과가 모두에게 미칠 수 있었던 것은 신성이 인성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거기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으로 단번제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인을 속량하는 일을 완결 지을 수 있었던 것이다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의 신비의 힘을 보게 되는 지점이다사실 마귀는 이 사실을 읽을 수 없었을 것이다십자가의 신비는 성령의 사역이 아니고는 접근할 수 없는 진리이기 때문이다(고전 2:14). 그 당대의 지혜자도선비도변론가도 십자가 사건에 감추인 구원의 지혜와 능력을 헤아릴 수 없었다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고전 1:19-21). 심지어 교부들은 사단도 십자가의 신비에 도달하지 못한 것으로 이해했다단순히 인간적인 일인 줄만 알았던그래서 그리스도 예수를 죽음에 붙잡아 둘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그리스도 예수의 신성과 인성의 구현으로 죽음의 권세를 깨트리고 부활하자 속은 것을 알았던 것으로 이해하지 않았던가!

하나님은 죽음에 매이거나 혹은 죽음에 종속되는 분이 아니다오직 하나님에게는 죽지 아니함이 있기 때문이다그리스도 예수의 신비를 친히 목격하고 그로부터 계시를 받았던 바울은 디모데전서 6장 15, 16절에서 다음과 같이 연약한 후배 사역자인 디모데에게 권면하였는데바울이 걸었듯이 전도자와 목회자와 신학자의 길을 걷는 모든 후배들에게도 실로 매우 중요한 말씀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은 복되시고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오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 가운데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아멘” 다만 바울 사도가 갈라디아교회에 보내는 편지(2:20)에서 친히 고백했듯이 이렇게 고백할 뿐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유태화 교수(백석대학교 신학대학원) bareunmedia@naver.com

신천지, 해외 포교 어떻게 하나?

터키 이스탄불 지역 포교 유경험자의 폭로


신천지의 해외 진출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신천지 내부 자료에 따르면 신천지는 해외 40개국에 진출해 22,478명의 신도(2019년 1월 13일 기준)를 보유 중이다신천지 맛디아 지파에서 9년간 활동하고터키 이스탄불 지역에서 2년 이상 포교활동을 펼쳤던 탈퇴자 씨가 1월 22터키 이스탄불 지역의 신천지 포교활동과 현황을 폭로했다.

일 년 동안 소득 없던 포교사업으로 활로 모색

씨에 따르면 처음 일 년은 포교에 큰 소득이 없었다신천지 신도 약 10명이 시리아 난민이 살던 집을 빌려 한 장소에서 지냈다재정적 어려움으로 청년 신도들은 하루 한 끼만 먹는 경우가 많았다.

신천지 신도들은 몇 가지 사업과 문화 활동을 시작하며 포교활동에 박차를 가했다화장품 사업을 시도했지만 지지부진하자 현지 청년들의 왕래가 많은 지역에 “Cheongdo”(편집자 주청도이만희의 고향이 경북 청도)라는 빙수 카페를 만들었다이 카페가 자리를 잡아 한국 음식을 하는 식당으로 리뉴얼 했고매출이 높아 2호점을 계획 중이다.

 

▲신천지 신도들이 터키에 세운 청도 카페

다양한 문화 포교

신천지 신도들은 사업과는 별도로 문화 포교의 장을 만들었다한국 문화원부터 시작했다한국어 교사 자격증을 취득한 신도들이 터키로 와서 한국어 수업을 진행했다매주 토요일은 한국 영화한국 음식 체험한국 놀이 체험 등을 열어 현지인들과 관계를 맺었다유튜브 채널을 만들어 한국 문화 및 언어 등을 주제로 한 영상을 올리기도 했다. A 씨는 한류 열풍으로 인해 한국 문화로 포교하는 일이 비교적 수월했다고 전했다.

씨가 전한 신천지의 포교방법은 국내에서와 유사하다. 1차는 관계 맺기다한국어에 관심을 보이는 현지인들과의 언어 공부남북 분단 문제행복 프로젝트소통 논문 작성도형 상담인문학 세미나 등 다양한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간다특히 한국문화원과 청도카페는 한국에 관심을 가지는 외국인들과 관계를 맺는데 일등 공신이 되었다물론 국내에서처럼 맺은 관계는 성경공부로 이어진다.

해외 신도 어떻게 관리하나

씨는 현재 터키 지역의 신천지 신도가 약 100(수강생 포함)이라고 밝혔다이들은 철저한 관리를 받으며 신천지 교리에 세뇌되고 있다집회는 통역자를 통해 동시통역으로 진행된다집회 후 신천지 교리를 깨달았는지 점검한다한국에서 벌어지는 신천지 시험에도 동참하도록 독려한다신천지 고위 간부들은 터키로 파견된 미혼 신도들에게 현지인들과 결혼해 국적을 따라고 권유하기도 한다.

한편, A 씨는 신천지 터키인 강사가 4교사 가능자가 7(2018년 10월 기준)이라고 전했다이들은 한 달에 약 800리라(한국 돈 약 17만 원)를 받고 함께 합숙하면서 아침 7시부터 자정까지 포교활동에 매달린다.

 

▲터키에서 이뤄지는 신천지 집회

씨는 신천지가 터키에 자리를 잡으면서 이탈리아코소보 등지에까지 활동 범위를 넓히고 있다고 말했다터키 이스탄불에 신도 100명가량이 모이면 타지 개척에 박차를 가할 것이라는 계획을 세웠다고 전했다터키의 한국 식당과 문화원이 신천지 내에서 성공사례가 되어 앞으로 식당과 문화원을 체계적으로 운영하며 포교활동을 펼칠 것으로 전망했다.

여러 나라를 다니며 선교 활동을 펼친 한 선교사는 신천지가 해외에서 이정도로까지 포교활동을 펼치는지 알지 못했다라며 신천지의 포교 방식이 한국인 선교사라면 한 번쯤은 생각하고혹은 현장에서 충분히 사용하고 있는 방식이다경각심을 가지고 어떻게 대응할지 준비해야한다라고 밝혔다.

씨는 신천지에서 비교적 최근에 해외선교부가 만들어졌다고 밝혔다해외포교를 위해서 일정 기간 언어사례 공유말씀 훈련 등을 받고 해외로 보내진다신도들 사이에서 해외로 나가 포교활동을 하겠다는 이들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신천지 내부 자료에 따르면 신천지는 유럽 9개국오세아니아 2개국아프리카 5개국아시아 16개국북아메리카 2개국남아메리카 6개국 등 총 40개국에 진출해 있다신천지 뿐 아니라 통일교는 공식적으로 195개국에 진출해 있으며하나님의교회구원파만민중앙교회 등 많은 이단 사이비가 해외 포교활동을 펼치고 있다교회 혹은 선교단체가 각개 전투 식으로 선교활동을 펼치는 한국교회가 공동 대응책을 마련해야 하는 시점이다.

조믿음 기자 bareunmedia@naver.com

SKY 캐슬 신드롬

요즘 드라마 한편이 한국사회 및 교육계에 강력한 파장을 미치고 있다드라마 sky 캐슬 이야기다네댓 가정이 어울려 사는 한 작은 주거타운을 배경으로 일어나는 교육 관련 현실을 보여주는 드라마다특별히 한국사회와 교육과열의 한 단면을 여과 없이 브라운관을 통하여 보여준다는 점에서그런 환경에 속한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시청자든 간에 관심을 집중하게 되는 힘을 지닌 드라마다특별히 대학입시라는 관문을 어떻게 통과할 것인지가 관건이어서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모든 학생은 이모저모로 이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초등학생에서부터 고등학교 3학년에 이르기까지 등록금이 싼 국내 최고의 대학이나 미국의 유력한 명문대학에 들어가는 일이 초미의 관심사로 모아진다단순히 대학에서 끝나지 않고그 대학의 최고의 과까지 겨냥한다는 점에서 흥미롭기까지 하다.

▲유태화 교수

이런 면에서 SKY는 하늘이라는 일반명사의 의미를 넘어서 한국사회에서 입시를 통한 신분 상승을 꾀하는 것과 관련된 특정 대학을 의미하는 차원을 갖는다고도 볼 수 있다예로부터 한국사회는 교육을 통해서 신분 바꾸기가 가능한 구조를 견지했었다소위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는 구조를 견지했던 것이다나면서부터 기울어진 환경에 처했던 개인이 자신의 소양을 잘 발현해서 자신을 사회 속에 덕스럽게 실현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야 자연스러운 일이고 나무랄 일이 아니다이런 출구가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건강한 사회의 한 조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물론 이런 정황 가운데 대리시험이라든지 하는 불편한 일이 끼어들지 않은 바는 아니었으나옥에 티 같은 것이었을 뿐큰 흐름을 바꿀 수 있을 만큼은 아니었다.

 

오늘날에도 교육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적절히 노정하고자 하는 꿈을 꾸는 일은 가능하고또한 그런 가능성이 닫히지 않았다그런 의미에서 다행스러운 일이다그러나 과거와는 조금 다른 분위기도 연출된다교육이라는 순수한 도구가 돈의 힘과 결합되면서 경쟁구조가 불균형해진 탓이다미취학아동에서부터 시작하여 초중고를 거치면서 입시의 관문을 보다 좋은 조건에서 통과하기 위하여 소위 선행학습이라는 것을 취하기 때문이다학교라는 공적인 기관을 중심으로 자신의 소양을 자연스럽게 끌어내는 구조는 뒷전으로 내몰리고사사로운 학습을 통하여 기회를 선점하려는 시도가 횡횡하기 때문이다재력을 가진 부모나 혹은 재력은 없으나 직업전선에 뛰어들어 돈을 만들어서 자녀를 사교육시장에서 키워보고자 하는 부모가 나타나고그 재력을 바탕으로 입시를 위한 특별한 사교육을 시행하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는 돈이 교육을 좌지우지하거나 입시관문통과를 결정하는 구조로 전환되어버린 것이다. sky 캐슬에 사는 부모는 자신의 재력을 바탕으로 자녀에게 고액의 입시코디를 붙이고 원하는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수준의 교육을 제공한다입시코디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표달성을 이루기 위하여 불법하고 부도덕한 일까지 하려고 한다최근 어느 분과 식사를 하면서 그것이 단순히 드라마에서 극화된 이야기가 아님을 들을 수 있었다상상을 초월하는 고액을 받는 강사가 주요 과목마다 한명씩 붙여지고조기 선행학습을 실행한다는 것이다그렇게 하는 이유는 교육 과정에서 기회를 선점하고그 결과 한국사회에서 유력한 자리를 차지하고 살아가는 유능한 인간을 만들어내고명예와 부와 권력을 세습하기 위함인 것이다그런 의미에서 보면하늘을 의미하는 SKY는 욕망을 담은 은유이기도 하다.

 

이런 정황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드라마에서 보여지는 초점은 사실 학생에게만 있지 않다그런 왜곡된 교육환경을 만들어가는 부모에게도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드라마상의 부모는 자신이 형성한 기득권을 대를 이어서 승계하고픈 욕망을 갖고 있거나 혹은 자신이 쌓아온 커리어가 자식을 통해서 훼손되거나 불명예스러워지는 것에 대하여 치열하리만치 불편해한다결과적으로 자식은 자신의 커리어를 관리하는 대상이거나 혹은 자신의 욕망을 대리해서 충족시키는 도구로 환원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결과적으로 이런 부모의 지나친 욕망에 희생되는 자녀가 발생하는 것이다가짜명문대학생노릇을 하게 되고자신이 하고픈 전공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선택하게 되고이러는 과정에 자녀의 마음에는 분노가 축적되게 되고삶의 의욕을 상실하게 되고기쁨을 빼앗기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SKY 캐슬 포스터(사진출처: JTBC)

모름지기 교육을 통하여 진리를 탐구하고그 진리를 인해서 기뻐하며 깨달은바 그 진리에 근거하여 자신과 사회에 빛을 비추려는 방향을 보아야 할 터인데 현실의 교육계는 그런 교육의 본래적인 지위와 역할이 사라진 형국이 되고 말았다교육을 대학 본연의 자율에 맡기지 않고 중앙에서 통제하는 방식으로 이끌어가는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인간의 본성을 성찰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의미와 유익을 깨우치며 한걸음 더 나아가서 전문적인 소양인으로서 공헌하도록 대학교육을 이끌어내지 못하고오히려 취직을 위한 학원으로 전락시키고 있지는 않은가 싶기도 하다대학을 운영하는 주체도대학을 평가하는 주체도 대학의 근원적인 존재 이유에 대한 보다 깊은 성찰이 필요한 시점에 서 있지 않은가 싶은 것이다인문사회과학적인 토대를 잘 살리지 못하는 대학교육은 굳이 대학에서 이루어질 필요가 없지 않을까 싶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교육은 은사 계발을 기초로 해서 구성될 필요가 있다네덜란드에서 경험한 바가 참 인상적이었다유치원부터 초등학교 때까지 학교는 학생에게 교과서를 집으로 가져가지 못하게 한다교육은 전적으로 학교가 책임지는 것이다구구단을 일주일 만에 달달달 외우는 것은 그 나라의 교육 체계에서는 무의미한 일이다활용을 경험하도록 배려하면서 천천히 익힌다학습과정에 놀이문화도 활발하다. 12명 미만으로 구성된 이런 학생들의 학습발달을 두 명의 교사가 근접해서 지도하고 관찰한다매학기가 끝날 때마다 학부모를 초치하여 학생의 학습과 생활에 대한 매우 세세한 대화를 나눈다그런 자연스러운 교육과정을 통하여 교사는 이 학생이 university로 방향을 잡을지, college로 방향을 잡을지기술고등학교로 방향을 잡을지를 결정하는 주체로 기능한다.

  

국가는 15, 35, 50% 정도로 학생을 자연스럽게 배분한다국가구조에 적합한 규모로 학생을 양육하는 것이다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런 과정을 통과하여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갈 때보수체계가 균질하도록 국가가 사회를 관리한다쉽게 말하여그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어떤 직업을 갖고 어떤 일을 하면서 살아가든지 누리는 삶의 질이 균질하도록 관리하는 것이다대학교육을 마칠 때까지 비용을 개인이 부담하지 않기 때문에그 과정을 마친 사람이 많이 벌면 세금을 많이 받고적게 벌면 적게 받을 수 있는 것이다많은 혜택을 받는 사람의 수입을 나누어서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삶의 질을 보전하는데 사용하는 것이다그래서 모든 백성은 실제로 그 나라에서 공평한 대우를 받으며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사람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공부가 은사가 아닌 학생이 부득불 공부를 해야 하는 부자연스러운 교육과열현상이 일어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그들 안에 아무런 욕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인간은 삶의 조건이 개선된다고 해서 욕망 그 자체로부터 자유로운 존재가 되지는 않는다복지 그 이후의 삶과 관련한 무수히 많은 문제가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그런 면에서 한국사회는 복지사회로 가는 과도기적인 사회이다사실은 교육문제는 고용시장을 개선하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는다고용시장이 균질화되어야그래서 누구도 인간다운 삶의 길에서 배제되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어야소양에 집중하는 교육환경이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다한국사회는 무한경쟁의 자본주의사회로부터 타인을 존중하는 자본주의사회로 전환하는 과정을 겪고 있다원리적으로 드라마가 보여주는 sky 캐슬은 해체되어야 한다그런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성읍이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사회에로의 전향적인 발걸음을 내딛을 필요가 있다.

 

사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누구나의 마음에 하늘에 오르려는 욕망이 도사리고 있지 않나 싶다과거 모세가 시로 남겼듯이 인생이 70이요강건하면 80인데활시위를 떠난 활처럼 신속하게 흐르는 그 시간을 관통하며 살아온 삶을 회고해보면 수고와 슬픔뿐이다역설이 배어든 표현이다수고하였으되 슬픈 현실이니 말이다무엇을 위하여 수고할까한국사회의 부모나 자녀는 왜 그런 무모할 만큼을 수고를 하는 것일까교육의 관문을 통과하여 sky 캐슬에 들어가서 얻는 전리품이 무엇일까재물과 명예와 권력이 아닐까육신의 정욕안목의 정욕이생의 자랑이 아닐까이것을 얻기 위해 인간은 그토록 수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문제는 그런 수고와 함께 그것을 손에 넣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손에 넣은 과정에 몸이 축나고 정신이 병들고그렇게 시간의 흐름과 함께 소멸되어 가는 것이 아닐까원하던 것을 손에 넣고 그것을 통해서 자신을 포장하고 세탁하더라도 결코 만족함이 없는그래서 슬픈 삶을 직면하지는 않는 것일까.

 

인간을 실제로 지킬 수 없는 바로 이러한 허무한 가치에 굴종하도록 인간을 꾀어내는 존재를 성경은 마귀라고 칭한다그리고 그 마귀는 공중곧 SKY의 권세를 잡은 자로 묘사된다마귀는 인간이 살아가는 이 세상 즉 공중의 권세를 잡은 자로서 끊임없이 인간을 미혹하는 일을 감행한다. 70이요강건하면 80인 인생살이를 그 실존의 끝자락에 도달하면 그렇게 무력할 수밖에 없는 재물과 명예와 권력을 취하는 일로 다 허송세월하게 만드는 존재이다. 70-80의 삶을 살아낸 후 삶을 정리할 때육신의 정욕안목의 정욕이생의 자랑을 추구하던 욕망 그 자체를 제외하고는 평가할 만한 것이 전혀 없는 그런 벌거벗은 실존으로 인간이 자신을 직면하도록 만드는 존재그가 바로 마귀인 것이다이것이 성경이 보여주는 세상(SKY)의 민낯이다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소중한 존재인 인간으로 하여금땅만 바라보고이 세상에 속한 것만 바라보고하나님의 처소인 하늘(HEAVEN)을 향한 문을 닫아걸고 살아가도록 부추기는 존재가 바로 마귀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소위 고지론이라는 것을 손에 쥐고 그리스도인 청소년들에게 외친다. “여러분 정체경제사회문화교육의 전 영역에 뚫고 들어가 고지를 점령하십시오모든 영역의 고지를 선점하여그곳에서 하나님의 선의를 떨치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구호와 함께 이 지점을 선점하기 위하여주일에 예배하는 일도일상에서 기도하는 일도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돌아보는 일도 죄다 뒷전으로 밀어놓고오로지 공부에만 전념하도록 한다그 고지를 위하여 과정을 무시하는 사람이 되도록 조장하는 것이다고지를 점령한 후에 그 부족한 면면을 채워 넣으면 되지 않느냐고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는다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어쩌면 이런 삶의 태도야말로 세상적이요정욕적이며마귀적인 것이라고 야고보가 읊었던 그 삶이 아닐까.

 

오늘의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나 교회는 지금껏 추구해온 고지론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직면할 필요가 있다기독교후기사회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나 교회는 그런 방식으로는 이 세상을 설득할 자격을 이미 상실해버렸다오히려 하나님이 자신에게 준 은사를 살려서 사회의 모든 영역뿐 아니라 모든 사회적 계층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들어가야 한다그리고 그 어느 곳에서나 재물을 넘어서는 삶명예를 뚫고 나오는 삶권력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삶을 살아내야 한다재물보다 귀한 삶의 세계명예보다 더 소중한 가치를 보게 하는 삶권력이 불필요하여 섬기지 않고서는 권력을 유지할 수 없는 삶의 구조를 만들어가는 일에 마음을 쏟고실제로 그런 삶을 살아가는 일이 필요한 시점에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서 있지 않은가 싶기 때문이다그리스도인 가정과 교회가 자녀를 위하여 기도하되어떤 자녀가 되기를 기도할지 깊이 묵상해야 하는 시점에 서 있지 않은가 싶은 것이다.

유태화 교수(백석대학교 신학대학원) bareunmedia@naver.com

신천지, 가평군청에 업무 방해 수준 민원 폭탄

이만희, 군수 면담 요청했다 헛걸음


신천지가 가평군 청평면에 추진 중인 박물관 건축을 허락해 달라며 지난해 12월부터 가평군청에 민원을 제기하고 있다.

지금까지 접수된 민원은 무려 4만 건.

CBS는 신천지의 반복적인 민원이 공무원의 행정력을 낭비하고 다른 민원 업무들에 차질을 빚고 있다고 보도했다.

한편, 이만희 씨는 지난 12월 28일, 갑작스레 군청을 방문해 군수와의 면담을 신청했지만 거절당했다.

바른미디어 bareunmedia@naver.com

【한컷기독교핵심용어】 개신교

 

종교개혁을 통해 로마 가톨릭동방 정교회와는 구별되어 형성된 기독교 전통이다성경의 고유 권위를 인정하고 만인제사장이신칭의 등을 주요 신념으로 삼는다.

이 용어가 발생한 역사적 배경은 1529년 슈파이어 의회였다이 의회에서 로마 가톨릭은 마틴 루터의 지지자들을 묵과하지 않겠다고 결정했다이 결정에 반대했던 독일 14개 도시의 제후들이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에게 항의하는 문서를 제출했다훗날 사람들은 이들을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항의 혹은 저항하는 자)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넓은 의미로 종교개혁에 반대하던 로마 가톨릭에 저항했던 사람 등을 지칭한다.

바른미디어 bareunmedi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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