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포트

이정훈 교수의 강연이 기독교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공감과 의문

울산대 교수로서 스스로 대광고등학교 강제채플 문제의 부당성을 제기하였던 종자연에 속했던그리고 군승으로 살아온 자신의 과거를 드러내면서 기독교에 귀의하여 불교적 세계관을 딛고 섰으며 또한 종자연에서 추구했던 그런 세속적 가치관을 벗어 내던지고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갈아입었다는 주장과 함께 한국교회 젊은이들에게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는혹은 <<엘정책연구원>>을 개원하고 그 영향력을 구체화하려고 하는 이정훈 교수의 강연을어떤 분의 신중한 문제의식과 함께 꼭 듣고 의견을 제시해 줄 것을 권유받은 후로일련의 동영상을 통하여 듣고 공감과 의문이라는 두 다른 문제의식을 갖게 되었다(https://www.youtube.com/watch?v=X9ooXuAvrOY).  

▲유태화 교수(백석대학교
신학대학원 조직신학)

우선그가 주장하는 기독교적인 가치 주장에 대하여는 개종한 뒤 매우 짧은 시간에 상당히 포괄적이고 체계적인 기독교 이해에 도달한 것으로 파악되며 조심스럽지만 비교적 긍정적인 마음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특별히 프로테스탄트교회의 후예로서 칼빈주의와 신칼빈주의의 신학에 대한 이해를 표준적인 가치로 삼고 기독교세계관적인 논의를 전개하는 것에 대하여는 영육이원론적인 경향이 배태되어 있는 한국교회의 전망에서 볼 때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특별히 칼빈의 자연법 사상의 진수를 잘 파악하고그리고 율법의 제3의 용도와 자연법 사이의 연관성을 조심스럽게 끌어안으면서 기독교인의 동성애에 대한 입장혹은 마르크스와 레닌적 사상체계에 대한 분석적이고 비판적인 입장을 전개하고더 나아가서 그리스도인인 어떻게 자연법 사상을 기반으로 비그리스도인과 이런 문제에 대한 공감을 이끌어내고 협력을 도모해 갈 것인가를 논의하는 대목에서는 그의 신학적 통찰에 숙연해지기까지 하였다.

다음으로그가 주장하는 마르크시스트적인 사회혁명 이론의 근간을 찾아서 맥락을 따라 그 이해의 연원과 특징을 매우 포괄적이면서도 세세한 관찰과 함께 정리하고 이해하도록 돕는 지점도 흥미롭고 또한 매우 설득력이 있다고 여겨졌다이런 점에서 그의 법철학 혹은 법 사상사를 전공한 학자로서의 특징이 잘 반영된 전문적인 길 안내자로서의 역할을 그가 잘 수행한다고 생각된다특별히 사회계층적인 전복을 꾀하는그 결과로서 기득권세력을 죄악시 하는 진영논리를 만들어 권위와 전통적 가치에 대한 기반을 해체하는 그들의 전략 전술이 결과적으로 미칠 수 있는 파괴적인 양상을 소련과 중공의 혁명과정을 통하여 세세하게 설명하는 지점은 역사적이고 학문적인 충실한 이론을 배경으로 제안된다고 생각되어이러한 관찰에 대하여는 공감을 하게 된다.

마지막으로바로 앞에서 제언한 이런 이해의 맥락을 현재 한국사회에 적용하는 과정에서 현재 한국의 권력집단이 마르크시스적인 사회혁명 혹은 전복을 꾀하려고 한다는 혐의를 제기하는데이에 대하여는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더욱이 이런 분석을 넘어서서 현 권력집단이 마오쩌뚱의 정치적 선동을 빌려와 청년세대를 자기의 진영으로 끌어들여기득권세력의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세력 기반을 무력화시키고권위를 훼손하여 부모나 학교 교사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꼰대로 돌리고공산주의자들의 선동에서 보듯이 성을 기능화 시켜서 양성평등을 넘어 동성애를 고착화시킴으로써 사회질서의 근간을 교란하는 방식으로 인간의 삶을 유물론적인 세계관 아래 가두려는 시도를 전개하고 있다는 것이다기독교인 청년들의 집회에서는 이러한 정책의 끝은 교회를 해제하는 것인데그런 조짐이 읽힌다며 교회여 일어나라고 선동을 하는 수준의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특별히 이 마지막 문단에서 전개하는 그의 논점은 두 가지 점에서 시의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된다첫째로현 권력집단이 과연 마르크시스적인 공산혁명을 꾀하고 있는가에 대한 진정성 여부에 의심이 간다는 것이다천민적 자본주의에 근거한 민주주의를 추구해온 대한민국이 거의 물신적인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자본에 근거한 갑질을 일삼고 있는 시점에서개인의 사회적 기회의 평등이나 과정의 공정성이나 결과의 정의로움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에로의 선회를 꾀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사회의 진보 과정이 아닌가 싶은 마음이 들고현재의 권력집단은 어느 정도로 올바르게 그 길을 걷고 있는가에 대하여 일어나는 회의적인 의심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런 길을 향하여 걸음을 내딛고 있지 않은가 싶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운동을 이끄는 인물 가운데서 상당수가 과거 사회주의 관련 서적을 읽고 그런 운동에 전념했던 인물인 것은 어느 정도 감안할 여지가 없지 않으나그들이 이미 역사적인 반성을 거치고 있는 낡은 마르크스레닌마오이즘식의 사회혁명체제로의 회귀를 꾀한다고 판단하는 것은 매우 시대착오적인 발상이요 역사해석이라고 아니할 수 없기 때문이다물론 이들이 내세우고 있는 역사바로세우기의 과정에서 이승만을 넘어서는 역사적 정통성에로의 몰두는 뚜렷하게 관찰되지만이것이 공화적 민주주주의의 길을 포기했다는 사실로 읽히기보다는 권위주의적인 체질을 합리적인 시스템을 구축함으로써 억제하고 보다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에로의 진보를 꾀하려는 것으로 읽고 해석하는 것이 좋을듯하기 때문이다.  

▲이정훈 교수(출처: 엘정책연구원)

둘째로이런 이해를 한국교회와 연관시키면서대한민국의 정체성을 기독교적인 관점으로 기획한 인물이 바로 이승만이며이승만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을 실현한 진정한 자유민주주의에 기반한 대한민국을 국제사회에 알린 인물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면서기독교인은 바로 이러한 역사적 관점을 공유하고미래의 기독교 대한민국을 세워가야 한다고따라서 좌파에 기울어진 현 권력집단에 대하여는 분기탱천하여 반대해야 한다고 젊은이를 일깨우는 강연을 하는 것에 대하여는 실로 걱정스러운 마음이 일지 않을 수 없다한편으로그의 이런 평가가 어떤 면에서 일리가 있다고 생각되는 지점도 없지 않으나다른 한편으로 지금의 변화된 역사적 시점에서 볼 때는 대한민국의 건국 연대를 1919년 3월로 잡고남북한의 통일을 기대하는 미래지향적인 한반도 정책을 추구하는 것이 기독교인이 추구해야 할 중요한 가치가 아닐까 싶은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적어도 좌파에 경도된 현 권력집단이 추구하는 바가 기득권세력 7000만 명을 희생시킨 마오쩌뚱의 홍위병혁명과 연결된다는 그의 주장이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이라면그리고 천민자본주의적 민주주위에서 평등과 공정과 정의를 추구하는 사회민주주의에로 선회하는 것이 공화제를 포기하지 않는 길을 찾는 과정이라는 것이 더 적절한 역사 이해라면기독교는 역사를 보는 눈을 바꾸어 이승만의 공헌과 동시에 그가 살았던 불행한 전쟁 상황에서 벗어나 한반도의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기 위한 가능한 길을 적극적으로 찾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변화하는 세대를 보면서또한 68혁명이후 갈라진 백성의 상태를 깊이 인식하면서 불란서에서 이는 대안 찾기의 움직임을 보면서 보다 유연한 세계관을 가지고 공존을 꾀하며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이 서로 대화할 수 있는 분위기를 찾아나서는 것이 기독교적인 삶의 본질을 살려 가는데 더 유익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무엇보다도 기독교는 어떤 의미에서 보면 특정한 어떤 정파적 이해나 혹은 어떤 특정한 사회체제 이해와 자신을 동일시 할 수 없는 공동체가 아니겠는가 싶은 것이다체제나 혹은 이념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서 복음이 재생산하는 질서를 구현하기 위하여 애쓸 수 있는 귀한 자리를 선점하고 살아가는 것이 기독교이기 때문이다사실 어떤 체제하에서도 기독교는 복음을 따라서 자신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야 할 그런 진리의 종교이기 때문이다막스 베버를 통하여자본에 기반한 삶의 부조리한 측면을 다시 새롭게 발견하고 배웠던 서구 기독교가 사회적 평등을 지향하는 수정된 자본주의의 길을 찾은 것도그리고 그런 기반 위에서 삶을 다시 새롭게 체계화할 수 있었던 것도그리하여 네덜란드나 독일이나 스위스 같은 사회가 형성된 것도변화화는 시대를 살아가는 대한민국의 기독교가 관심을 기울여 보아야 할 중요한 삶의 미래적 차원이기 때문이다적어도 이 시대를 살아가는 기독교인의 반성적 사고 가운데 이런 차원이 결여된다는 것은 매우 비극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개인이 하나님 앞에 서는 것과 공동체적인 책무를 다하며 공공의 선을 추구하는 기독교적 공동체가 형성되는 것 사이의 불연속성을 상정하고 후자를 마르크스주의와 동일시하는 이정훈 교수의 주장은 매우 편협한 진영논리에 포로된 것임을 드러내는 하나의 예일 뿐이다역으로 어쩌면 마르크스주의자가 그런 공동체를 사도행전 2장에서 보고 배웠을 수 있기 때문이다혹여 좌파가 공산주의이고 우파가 자본주의라면기독교는 좌도 우도 아닌 공동체라고 말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전자를 무신론으로후자를 유신론의 진영으로 단순하게 가르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거나 혹은 지나가고 있기 때문이다더 나아가서 무신론만큼이나 맘모니즘도 위험하기는 매 한가지이기 때문이다기독교는 이 둘 사이의 근원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둘 모두 봉착할 수 있는 위기가 무엇인지를 깊이 비판적으로 숙고하며 자신의 미래적 삶을 기획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한국사회의 시민민주항쟁이라고 할 수 있는 1987년 6월의 정신을 계승한다고 자처하는 세력이 민주당이고정치적 자유와 시민적 평등사회의 길을 도모하는 일에 마음을 내준 것이 당시의 백성들이었다고 본다면그런 정신을 따라서 평등과 공정과 정의의 가치를 내걸고 그것을 삶의 매우 중요한 출발점으로 인식하는 오늘의 2030세대가 그런 정신을 대체계승했다고 생각된다그러면 1987년 당시 거리를 메웠던 그들이 오늘의 집권세력이 된 지금 그 정신을 제대로 읽고 정치적으로 대처했는지아니면 정치집단으로서 자신의 권력을 다지는 기회로 삼았는지의 분수령이 사실은 조국사태를 가로지르는 정신이라고 보고민주당은 이미 그러한 정신을 거스르며 자신을 권력화 하는 길로 접어들지 않았는가 싶다. “조국사태는 조국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1987년의 시대정신을 허무는 기재로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깊이 헤아려야 할 것이다개혁을 주체적으로 내세웠던 자들에게서 그 외침이 어떻게 구현되었는지를 비판적으로 숙고하지 않는 정치세력은 스스로를 해체하는 길에 접어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사실 어느 정치세력도 자신의 정체성을 기독교가 제안하는 그런 신적인 공동체와는 동일시될 수 없는 것이 자명하다만일 이러한 길이 가능했다면천국의 도래를 왜 최종적인 희망으로 상정했겠는가사도 바울이 언급했던 이 세대의 정신이 어떤 옷을 입고 나타나더라도 그것은 그 자체로 부단히 극복되어야만 하는 역사적 발전과정의 일환일 뿐하나님 나라와 동일시될 수는 없는 것이다이런 점에서 특정한 체제를 지원하거나 혹은 역사 내의 어떤 한정된 단체를 후원하는 것으로 환원되는 기독교적 선택은 그 자체로 위험천만한 일이다오히려 이정훈 교수가 언급하는 자연법사상의 토대를 신중하게 고려하여 분열된 삶의 통합을 꾀하는 칼빈주의나 신칼빈주의가 대안일 수 있거나 혹은 대안적 삶을 찾아가는 중요한 전거가 될 수 있다고 본다그런 점에서는 이정훈 교수가 한국의 프로테스탄트교회를 위한 좋은 방향을 선점했다고 보고이 방향을 향하여 좀 더 집중된 논의와 제안을 위한 시간을 갖고 학문적 공을 들이기를그리고 그런 열매와 함께 기독교 대중 앞에 나서기를 바라는 것이다.  

 

유태화 교수 bareunmedia@naver.com

사도 바울의 창조 신학(4)

편집자 주조덕영 박사의 사도 바울의 창조 신학 글을 4회에 거쳐 연재합니다조덕영 박사는 조신학연구소 소장창조론 오픈 포럼 공동대표평택대 신학부 겸임교수로 사역하고 있다.

창조 신앙을 복음으로 연결하는 바울

파이네(P. Feine)가 바울의 복음이 그리스도 중심적”(christozentrisch)으로 바울이 자신만의 고유한 하나님 표상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고 본 것은 바울이 어떠한 인물이었는지를 바라보는 신학자들의 일반적 정서를 바르게 표현한 말이다사도 바울은 어떤 사도보다 구약성서의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넘어 초대 기독교의 인식에 대한 새로운 신 이해를 심어준 인물이었다그렇다면 이 바울의 모호한 하나님 표상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조덕영 박사

참된 창조와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다고 거짓 것들을 비판만 하고 있을 바울은 아니었다바울은 우리가 한 하나님 곧 만물을 창조하신 아버지가 계실 뿐 아니라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그분이 바로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요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다고 했다(고전8:6). 바울의 하나님 표상”(신론)이 창조주 예수 그리스도로 확장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비록 바울이 조직신학자는 아니었으나 히브리적 창조창조주창조 신앙에 그치지 않고 바울은 당연하게 기독론적 접근으로 나아갔다바울이 원하는 것은 창조와 창조주 신앙에 그치지 않고 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며 그분의 고난에 참여하고 그분의 죽음을 본받아 부활의 영광에 이르는 것이었다.

이것은 다이스만이 말한 대로 하나님의 새로운 가르침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입장을 발견한 것이었다즉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의 창조 신앙을 창조주 성육신과 십자가와 부활의 신앙과 신학으로 연결하여 기독교 구속 신학을 완성하고 있다.

누가는 사도행전 17장에 나오는 바울의 아레오바고 연설에서 바울이 아테네 시민들에게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겨놓은 제단을 소개하면서 이곳에 있던 헬라의 신 이해를 통해 복음을 어떤 방식으로 전하려 하였는지를 소개하고 있다바울은 아테네 사람들에게 종교성이 많다는 덕담 비슷한 언급을 하면서 복음을 소개하고 있다사실 이 도시는 우상이 가득한 도시였다(17:16). 바울은 아테네의 이런 풍경을 보고 격분하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정적인 바울은 마음을 가다듬고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다회당의 유대인 및 경건한 이방인들과 토론하고 장터로 나가 날마다 거기 모이는 사람들과 토론하였다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철학자들과도 논쟁하였다. “외국 신들을 선전하는 것 같다는 이들에게 바울은 한 사람에게서 모든 민족을 만들고 온 땅 위에 살게 하신 창조주 하나님은 각 나라의 연대를 미리 정하시고 그들의 국경을 정하셨으며 이제는 죽음에서 부활하여 죽음을 이기신 그리스도를 통해 회개하고 영원히 사는 영생의 복음을 전하였다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말에 어떤 사람들은 비웃었고 또 더 듣고 싶다는 사람들도 있었다(17:32).

이 부분에 대해 주석은 바울의 선교 전략이 실패했다고 보는 측과 성공적이었다고 보는 견해로 나누어져 있다슈바이처는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바울의 사상이 여기서는 하나님 안에” 있다는 이교 사상으로 대치되었다고 말한다이 연설이 복음이 아니라 헬라 시인들과 사상가들을 전거로 삼아 하나님에 대한 참 된 지식을 확증하려 했다는 점에서 2세기 변증론자들의 합리주의를 보여준다고 말하는 학자도 있다콘젤만이 주장한 것처럼 정말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이방인에게 미련한 것으로 알려졌기에 교묘히 그것을 회피하려고 한 것이었을까?

과연 바울의 선교 전략은 실패한 것이었을까수많은 사람들이 공산권북한이슬람 등 창의적 선교지역에 복음을 전하고 있다하지만 복음의 양적 열매는 가시적으로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그렇다고 그들의 선교 전략이 실패한 것일까바울이 전한 복음에 아테네의 몇 사람들은 복음에 반응하고 바울을 따르고 믿었다그중에는 놀랍게도 아레오바고의 법관 디오누시오(Dionysius)와 다마리(Damaris)라는 여자와 그 밖에 몇 사람이 있었다결코 복음은 좌절되지 않았다하나님께서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신 이유 가운데는 바리새인 출신 바울의 확고한 유대적 창조 신앙이 뿌리박혀 있었음을 선교 방식의 지혜 속에서 확인이 되는 것이다.

바울이 유대인들을 접촉할 경우에는 그들에게 일부러 창조 신앙을 역설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하지만 이방인들은 다르다선교 전략상 그들에게는 먼저 창조주 하나님 선포를 통해 그리스도 복음을 전파할 필요가 있었다신 자체를 부정하는 공산주의자들에게도 이 전략은 동일하다이방인의 사도인 바울에게 있어 그리스도 복음을 전하기 위한 기초 선결 지식으로서의 창조 신앙 선포는 선교 전략 상 이렇게 중요한 것이었다.

바울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그리스도의 의와 십자가의 도를 강조한 로마서의 저자다로마서는 그리스도인을 대상으로 한 서신이요 아레오바고 연설은 이방인을 대상으로 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브루스는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으로 복음을 전하고자 했던 바울의 선교적 지혜로서 이것을 복음적(evangelium)이라기보다는 복음의 예비(Praeparatio)적 성격을 띠는 연설로 보아야 한다고 역설한다사도 바울은 복음의 신출내기가 아니었다복음의 본질(텍스트)와 상황(컨텍스트)를 구별 못할 만큼의 미숙한 전도자는 전혀 아니었던 것이다.

예수에게 있어서도 이 같은 유비는 설득의 도구였다예수는 창조계식자연계시를 구속 계시의 접촉점으로 부단히 사용하셨다예수의 자연계시는 단순한 자연계시와 자연 신학에 그치지 않고 구속 계시로 연결하는 복음 사역의 예비적 과정이었다예수의 창조주 자연계시는 이신론(理神論)에 머무르지 않고 복음적 창조주 하나님 계시로 나아간다.

골로새서에서 사도 바울은 예수를 창조주 하나님으로 묘사하면서 영적 존재들도 피조 된 존재들이라고 설명하였다(1:16). 4복음서는 모두 이들 영적 존재들인 사단과 귀신의 존재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신약 성경에 사탄은 32회 가운데 14회 복음서에서 언급되며 귀신은 복음서를 제외한 신약(고전딤전성경에 11회 언급된 가운데 복음서에는 100여 회가 넘는 빈도로 등장하고 있다사도 바울과 달리 예수는 이들 영적 존재의 창조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으나 사탄과 귀신과 같은 영적 존재들이 있음과 더불어 그들도 예수 자신의 통치 아래 있음을 보여준다또한 영적 존재인 사탄과 귀신에 대해 예수는 인격을 가진 그들과 대화한다물론 그들이 예수의 사귐의 대상은 아니었다.

예수에게 사탄은 꾸짖어 쫓아낼 존재요(8:33), 귀신도 악하고 더러워 추방해야 할 존재였다(12:43, 45). 예수는 십자가 죽음과 3일 만에 살아날 것을 예언한 가르침에 대해 예수께 항변하며 이 같은 일이 예수에게 일어나지 않기를 소원하던 제자 베드로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라고 말하며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로 책망하였다또한 사탄은 제자 가룟 유다에게 들어갔다(13:27). 그렇게 복음서의 예수는 인류 타락과 죄와 불순종의 배후에 있는 인간이 그 전모를 파악하기 결코 쉽지 않은 심각한 영적 존재에 대해 자연스럽게 계시하고 있다이것은 마치 자연계시를 통해 의인 욥의 고난의 배후에 있는 사탄의 존재를 계시하신 하나님을 연상케 하는 한다(1-2장 참조). 심지어 하나님은 욥기 41장에서는 사탄이라는 언급을 한마디 하지 않으면서도 리워야단이라는 동물(자연계시)를 통해 모든 높은 자를 내려다보며 모든 교만한 자들에게 군림하는 왕으로서의 사탄에 대해 암묵적 계시를 하고 있다욥이 깨닫고 회개하고 은혜 받고 복 받은 것은 구속 계시가 아닌 놀랍게도 모두 70여 가지에 달하는 속사포 같은 하나님의 자연계시 속에서 이루어졌다교만하고 군림(소위 갑질’)하는 자는 베드로나 가룟 유다처럼 사탄의 도구나 다름없다 할 것이다.

예수를 창조주 하나님으로 인식하는 것은 기독교 신학의 핵심이요 기독론의 중심이다예수의 자연계시가 자연을 초월함 속에서 전개되는 것은 삼위의 제 2위이신 창조주 하나님예수의 모습을 드러낸다초대교회 교부 이레네우스 역시 말씀과 하나님의 영즉 그리스도와 성령을 우주를 창조하는 하나님의 두 손이라고 표현하여 삼위일체적 창조를 언급한다그런데 20 세기 들어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을 비롯한 현대 신학자들은 예수를 구속사(Heilsgeschichte) 내에 묶어두려는 의도적 시도를 통해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애써 숨기려드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들기도 한다하지만 사도 바울도 그리스도가 인간만이 아닌 모든 피조물의 창조주임을 언급한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1:15-17). 예수는 곧 창조주임을 전파하여 자연스럽게 그 예수를 우리의 주()요 구주(救主)로 연결한다(고전8:6). 바로 예수가 전한 그 방식이었다.

 


 

 

나가면서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존재론적 간극(ontological gap)이 엄연한 현실 아래에서 자연계시의 구원적 가치(salvific value)의 문제는 포스트모던 시대를 맞으면서 여전히 그치지 않고 있다전면 부정론과 비관론을 넘어 오히려 논쟁은 더 심화 되는 듯하다포스트모던 신학자 클락 피녹(Clark H. Pinnock)은 일반 계시를 구원적 가치에 적극적으로 연결을 시도하는 인물이다오늘날 일반 계시에 구원의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가톨릭 신학의 공식 입장이다대표적 종교 다원주의자 존 힉(John Hick)은 신적 계시로서의 성경을 포기하고 자연 종교로 돌아가고 있다.

하지만 반 틸(Cornelius Van Til)은 개혁신학의 특징 가운데 일반 계시의 명료성을 말하나타락한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일반 계시로는 누구도 실제적인 하나님을 참된 창조주로 알지 못한다고 주장한다그러므로 성경이 필요함을 역설한다우리 인간은 늘 제한을 가진 도구로 하나님을 이해할 수밖에 없다그것은 하나님의 계시의 불완전이라기보다 분명 인간의 죄성과 그에 따른 교제의 상실 그리고 피조물로서의 인간이 지니는 한계 때문이다인간은 오직 부분을 다룰 수 있을 뿐이다하지만 특수 계시가 적용되는 공간은 여전히 일반 계시의 영역이다이 점을 깨닫는다면 창조된 우주 안에 하나님이 계시(啓示)는 인간의 정신 활동 가운데서 제한적으로 살아날 수 있다.

예수의 자연계시는 두 가지 측면 즉 자신이 곧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시요 동시에 그리스도이심을 드러내는 구속 계시를 향한 연결 고리를 제공하는 길잡이 역할을 한다이신론의 영향 속에서 자연에 의존하는 신학이 계시를 뒷받침하기보다 희생시켜 왔다는 생각이 20 세기 신학을 지배하여 온 것은 분명 사실이다그래서 지난 세기 신학자들이 자연계시의 합리성을 알면서도 자유주의 신학자라거나 무지한 신학자라는 공격을 염려하여 자연 신학이라는 언어의 불충분성 때문에 자연계시의 유용성조차 포기해버리는 경우가 많았다고 볼 수 있다.

알리스터 맥그라스(Alister McGrath)가 자연 신학에 대한 바르트의 극단적인 부정적 견해에 대해 바르트의 비판이 (1) 부적절한 성경적 기초에 기초하며, (2) 바르트 자신이 개혁신학의 전통에 있다는 주장이나 칼빈이 자연 신학에 대해 반대자의 입장에 있었다는 견해는 모두 잘못이요, (3) 자연 신학에 대한 바르트의 부정적 태도는 자연과학에 대한 무관심 때문이라고 비판한 것은 바로 20 세기 주요 신학에 있어 자연계시와 자연 신학을 보는 편견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보여준다.

삼위의 제 2위이신 창조주 하나님예수가 바라보고 언급하고 사역한 공생애를 통한 창조계식(자연계시)는 결국 궁극적 구속 계시로 연결되는 접촉점을 찾는 작업이었다이처럼 사도 바울의 창조 신앙도 결국 체계적으로 의도한 작업은 아니었을지라도 궁극적으로는 개종 이전의 히브리적 창조 신앙을 그리스도에게 연결한다즉 바울은 기독교 신앙을 정립하는 과정 속에서 창조 신앙을 구속 신앙의 완성을 위한 마중물이요기초석으로 삼았다그는 통전적인 기독교 사랑의 실현으로서의 하나님 계시를 구원론적종말론적 구원창조 신앙으로 연결하는조직적이며 선교적인 작업을 통해서 자신의 창조 신앙을 복음을 전혀 몰랐던 이방인들을 향한 자연스러우면서도 필연적인 논리적 도구로 사용하였다고 볼 수 있겠다

조덕영 박사 bareunmedi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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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이단과 사이비의 해외 진출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한국에서 가장 큰 교세를 자랑하며 많은 피해 사례를 양산하는 신천지는 아시아 16개국유럽 9개국오세아니아 2개국아프리카 5개국북아메리카 2개국남아메리카 6개국 등 총 40개국에 진출해 있다.

기쁜소식선교회 박옥수 구원파는 아시아를 넘어 미국오세아니아아프리카에 진출하며 전 세계에 202개의 건물을 세웠다생명의말씀선교회 이요한 구원파는 81개국에 진출해 338개의 센터를 세웠다.

통일교는 공식적으로 195개국에 그들의 선교사를 파송했으며성범죄자가 교주인 JMS에 미혹되는 외국인들이 존재한다.

한국에서 해외로 파송된 선교사님들은 문화나 언어 보다 한국의 이단사이비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현지인에게 제공될 정보가 극히 제한적이라는 점도 대책에 걸림돌이다.

바른미디어(bami.kr, 조믿음 발행인)는 해외에 진출한 한국 이단 사이비에 대한 공신력 있는 정보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이번에 무료 배포되는 PDF 파일은 신천지하나님의교회구원파통일교, JMS에 대한 간략한 정보간단한 이단 사이비 예방법사이비 종교 메커니즘에 대한 내용을 담아 영어중국어일본어로 번역했다.

바른미디어는 이번 일을 시작으로 해외에 배포할 수 있는 다양한 콘텐츠를 제작할 예정이다또한 한국의 이단과 사이비로 인해 발생한 피해 사례 등을 해외 각국 공공 기관에 알리고정체를 모르고 이들과 관계하는 민간단체 등에 전달해 해외 피해자들이 발생하지 않도록 예방하는 일을 진행할 계획이다.

바른미디어 자료 신청https://forms.gle/zA4TmsP718occA8Q6 

 

바른미디어 bareunmedia@naver.com

사도 바울의 창조 신학(3)

편집자 주조덕영 박사의 사도 바울의 창조 신학 글을 4회에 거쳐 연재합니다조덕영 박사는 조신학연구소 소장창조론 오픈 포럼 공동대표평택대 신학부 겸임교수로 사역하고 있다.

4. 인간의 의식주 문제(고린도전서 8장을 중심으로)

사도 바울이 인간의 의식주 문제에 대해 심각한 의미를 부여한 적은 없다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을 빼곤 무엇이든지 자신에게 유익하던 것을 그리스도를 위해 모두 해로 여길 뿐 아니라 모든 것을 해로 여기고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처럼 여겼던 사람이기 때문이다그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았다(4:12). 하지만 모든 세상은 그리스도의 세상이요 모든 창조 세상은 그리스도가 지으시고 운행하시는 섭리의 땅이다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케 하는 일이 바울의 사역 속에 기다리고 있었다.   

▲조덕영 박사

 

 

그중 가장 첨예한 문제는 매일 닥치는 섭생에 관한 것이었다모세 율법은 다양한 음식 규례를 다루지 않던가고린도 지역에서 이 문제가 정면으로 발생한다바울은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였을까헬라의 고린도지역은 우상과 잡신과 음란이 넘쳐나는 도시였다시장에 출하되는 육류들 대부분은 온갖 잡신들을 향한 음란한 제사 속에서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들이었다고린도 교인들은 이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들을 먹어도 되는 것인지 바울에게 질문하였다이 문제는 초대교회 심각한 이슈이기도 했다(1514-15). 고린도전서 8장 본문을 통해 이 우상에 바쳐진 제사 음식과 먹거리 전반에 대한 관점을 살펴보자.

(1) 첫째 우상(idol)은 아무 것도 아니다(고전8: 1-7).

당시 고린도 사람들은 우상에 대해 약간의 지식들이 있었다그걸 가지고 서로 고기를 먹어도 되느니 먹으면 안 되느니 논쟁을 벌였다여기에 대해 바울은 다음의 다섯 가지를 지적한다. 1) 지식(여기서 지식은 남보다 별난 신비적 지식 즉 영지주의적 지식을 말함)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든다. 2) 지식보다 덕을 세우는 것이 사랑이다. 3) 지식이 있다고 생각(자랑)하는 자들은 실은 당연히 알만한 것도 잘 모르는 자들이다. 4) 참된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것과 관련된다. 5) 따라서 하나님이 알아주는(인정하는사람이 참 지식을 가진 사람이다.

이 같은 관점에서 볼 때 우상은 사람이 만든 것으로 인간의 길흉화복흥망성쇠생사를 주관하지 못한다따라서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대단하게 여길 필요도겁낼 필요도거리낄 필요도 없다제사 음식이든 우상에게 바쳐졌던 음식이든 먹든 안 먹든 아무런 문제가 없다우리는 창조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아닌가(6). 우상에 바쳐진 고기를 먹느냐 안 먹느냐의 문제는 사실 믿는 이의 논쟁거리가 아닌 것이다오히려 반대로 이방인들이나 따질 문제이다속되고 부정 탄다고 여기는 사람에게나 두려움을 줄 뿐이다.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롬 14:14).

(2) 둘째 식물은 우리를 세우지 못 한다먹거리의 유익은 아주 작은 유익에 불과할 뿐이다(8).

이것을 일반 은총이라 한다즉 믿지 않는 이들도 누릴 수 있는 자연 은총이다물론 인간에게 바른 먹거리의 유익은 분명 있다(단 10). 평범하게 먹든 잘 먹든 작은 유익일 뿐이요 영생을 믿는 신앙의 눈으로 본다면 다만 약간의 유익(수명 연장육체적 건강)이 있을 뿐이다건강하게 살아도 결국 인간은 언젠가 죽게 마련이다(90:10). 세우지 못 한다는 말은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말이다.

본질상잘 먹는 유럽 사람들이나 가난한 아프리카 사람들이나 우상 식물을 먹는 자들이나 먹지 않는 자들이나 식물은 우리의 영적 삶을 세우는 일과 별 관련이 없다음식은 선하지만거룩과 무관하다음식을 먹지 않는다고 해서 더 경건해지는 것은 아니다바리새인들은 정결법과 안식일 규정을 철저히 준수했다하지만그들은 결코 정결하지도안식을 누리지도 못했다경건에 이르는 길을 사도 바울은 말씀과 기도야고보는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고 자신을 지키는 것이라고 했다하나님께서 만드신 것들은 그 자체로 속된 것은 없다다만부정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만 부정할 뿐이다.

(3)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자유함이 믿음 약한 자를 넘어지게 만드는 장애물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하고 절제하라(9-12).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요 우리를 세우는 것도 아니므로 먹든지 안 먹든지 별 문제는 없다하지만 자유 하더라도 절제할 필요가 있다믿음 약한 사람들은 사소한 것에도 믿음이 혼란을 겪기 마련이다형제에게 죄를 지으면 안 되고 형제의 양심을 상하게 해서도 안 된다그런 것들은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과 다르지 않다약한 자를 실족케 함은 아주 큰 죄이다(18:6). 자유하다고 목사가 거리낌 없이 아무 것이나 함부로 먹는 것을 보고 초신자들이 멋대로 따라하면 교회는 질서가 무너지며 혼란이 발생한다사실 목사들이나 교회 지도자들은 무엇이든 먹어도 문제없다고 보양식조차 함부로 거리낌 없이 즐기는 경우가 있으나 때론 조심해야 한다필자는 애완동물을 아주 사랑하는(?) 어느 기독언론 기자가 사철탕 등 보양식 즐기는 교회지도자들을 비분강개(悲憤慷慨)하며 강하게 비판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4) 사도 바울의 개인적 처방은 신앙 지식보다 앞선 복음을 위한 배려와 사랑이다(13).

먹어도 아무 상관없는 이 우상 제물 문제에 대해 사도 바울은 어떤 개인적 처방을 하고 있을까바울은 무엇을 먹어도 아무 상관이 없음을 잘 알고 있었으나 복음을 위해 기꺼이 절제한다복음만 전해진다면 고기 한 점 덜 먹는 것이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이것이 올바른 지식을 바탕으로 남을 배려하는 사랑으로 나아가는 복음의 대선배 사도 바울의 결단이었다.

필자는 과거 부산에 집회를 갔다가 하루 세끼를 모두 회만 먹은 적이 있다집회 장소와 대접해주시는 분들이 모두 다르다보니 생긴 불상사(?)였다내륙 지방 출신 사람이라 회를 그다지 먹을 기회가 많지 않았던 내게는 아주 큰 고역(苦役)이었다사도 바울이 볼 때 이웃을 배려하는 것이 사랑의 마음이었지만(1-3대접해주시는 분들의 준비된 사랑을 생각해서 거부 하지 못하고 필자는 하루 종일 회를 꾸역꾸역 열심히 먹었다사도 바울의 개인적 처방은 신학적 지식과 처방보다 사랑이 먼저였다사도 바울은 먹어도 상관없는 우상에 바쳐진 제물을 형제들을 위한 배려로 평생 먹지 않겠다고 고백한다과연 그리스도인들이 강아지를 친자식처럼 여기는 형제들을 위해 사철탕 먹기를 금할 수 있을까이것이 범인(凡人)들은 흉내 내기 어려운 사도 바울의 결단이었다.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은 먹지 말라고 할 터이나 음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딤전4:1-3).

사도 바울의 새 창조 신앙

바울의 창조 신앙은 단순한 창조 신앙에 머물지 않는다창조주요 구속의 주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준비한다즉 성경의 창조 신앙은 궁극적으로 새 창조(구원 창조신앙으로 발전한다바울은 이 새 창조를 주로 강림(파루시아)과 부활이라는 말로 표현한다(살전4:16, 17). 게할더스 보스는 이 강림과 부활에 대해 첫 번째 부활은 그리스도가 강림하실 때 일어나고두 번째 부활은 그리스도가 그의 나라를 바치실 때 일어난다고 보았다부활의 시기와 빈도에 대해서는 신학적 관점들이 다양하게 존재한다본고는 이 부분을 지면의 제약 상 다루지 않는다다만 필자가 주목하는 바울의 새 창조 사상은 이 강림과 부활 속에 사도 바울이 사람뿐 아니라 모든 피조물들이 허무함의 종살이의 고통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기 위해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 중에 있다고 한 말이다(8:18-22).

기독교는 결코 동물을 무시하거나 동물에게 무례한 종교가 아니다인간은 피조물의 주인도 아니다청지기일 뿐이다바울은 동물 역시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이요 언약의 약속 안에 있는 존재임을 암시한 것이다하나님은 사람뿐 아니라 수많은 가축이 있는 니느웨 성을 불쌍히 여기셨다(4:11). 창조는 종말론적 구원을 지향한다태초에 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에 모든 피조물을 위한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실 것이며(65:17, 21:1), 아담의 죄로 인해 파괴된 인간과 동물 간에도 평화가 다시 회복될 것이다(65:25). 그 때까지 인간은 다스림의 위치에서 소명을 감당해야 한다이 다스림은 군림이 아니다.

인도의 신학자요 생태학자인 켄 그나나칸(Ken Gnanakan)은 이 다스림’ 안에는 사랑상호 연결지속 가능한 창조성다른 이들을 위한 배려종으로서의 섬김청지기하나님의 창조물에 대한 존경심정의라는 여덟 가지 요소가 들어있다고 했다마치 예수께서 죄 짐 맡은 우리 구주요 좋은 친구였던 것처럼 인간은 당연히 동물들과 사랑 안에서 함께해야 하는 것이다바울은 창조주 하나님의 새 창조 속에 이 같은 하나님 사랑의 본질이 담겨 있음을 시사한 것이다(계속).

조덕영 박사 bareunmedia@naver.com

사도 바울의 창조 신학(2)

편집자 주조덕영 박사의 사도 바울의 창조신학 글을 4회에 거쳐 연재합니다조덕영 박사는 조신학연구소 소장창조론 오픈 포럼 공동대표평택대 신학부 겸임교수로 사역하고 있다.

III. 사도 바울의 인간관

1. 창조주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인간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이기는 하나 아이러니하게도 창조주 하나님을 외면한사도 바울이 말하듯 인간의 본성은 핑계할 수 없는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창조주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한다바울은 사람이 하나님을 알면서도 그분을 하나님으로 영광스럽게 하지 않고 감사하지도 않으며 생각은 쓸모없고 마음은 어리석어 어두워졌다고 했다(1:21).

▲조덕영 박사

사도 바울은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람은 스스로 지혜로운 체하지만 사실은 어리석으며 영원히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오히려 썩어 없어질 사람이나 새나 짐승이나 기어 다니는 동물 형상의 우상을 섬기는 존재라고 했다(1:21-23). 불멸의 하나님의 영광을 소멸되어 버릴 것의 형상으로 바꾸어버렸다구약 시대뿐 아니라 바울이 살던 1세기 당시에도 샤머니즘과 토템과 물신숭배(der Feitischismus)가 만연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하나님은 그들을 그대로 내어버려 두셨다.

이 같은 인간의 어리석음은 첨단과학기술 시대를 자처하는 21세기가 되었음에도 여전하다우리 사회 속에서도 고급 승용차 앞에 놓인 돼지머리나 정부 행사에 고사(告祀)를 위한 떡이나 기관 단체 행사와 제사에 동물의 머리 고기가 등장하는 것이 여전히 낯설지 않다하늘에나 땅에나 거짓 신들이 많고 많은 신()과 주()가 있고 그것을 따르는 어리석은 피조물들이 여전히 허다하다바울은 인간의 마음이 창조주를 마음에 두기보다 피조 세계의 인간이나 동물이나 자연의 양상들을 섬기기를 좋아한다는 점을 꿰뚫고 있었다.

2. 창조주를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

바울은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을 내어 버려두셨다라고 세 번이나 강조하고 있다(1:24, 26, 28). 사람들이 하나님과 참 된 진리를 찾으려하지 않고 알려고도 하지 않으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부패한 마음으로 합당치 못한 악한 일을 하도록 내어버려두셨다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인간에 대해 하나님이 그대로 내어 버려두자 인간은 하나님의 것을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기 시작했다(1:25). 진리를 거짓과 맞바꾸었다.

바울은 오늘날까지 결혼의 창조 질서를 파괴하여 순리를 역리로 쓰는 동성애도 하나님의 내버려두심의 결과라고 했다(1:26). 바울이 로마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문제를 거론한 것으로 보아 당대 로마 시민들에게도 이 이슈는 가벼운 문제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이 같이 인간 자신이 스스로 마음의 정욕대로 사는 것에 대해 바울은 부끄러운 일이라 하면서 그 잘못된 행위에 대해서는 마땅한 보응(대가)이 있다고 했다그 보응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바울은 설명하지 않았다하나님이 직접적으로 언급하신 보응법적 규제동성 간 불편한 동거잉태하지 못함동성 간 연애로 인해 발생하는 문화적심리적육체적 불편함과 불균형그리고 예기치 못한 질병의 초래 등 보응은 많다.

지금도 동성애를 옹호하는 정치인들이나 우매한 대중들이 있다군 생활을 체험한 남자들에게 있어 군 생활 중 당하는 가장 곤혹스러운 상황과 경험은 바로 동성애 성향의 상관을 만나는 것이다전혀 상대방의 동의 없이 그들이 일방적으로 저지르는 폭력적 행위는 불쾌함뿐이요 어떤 병사에게는 자살의 충동을 일으킬 만큼 혐오스러운 체험이다그것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당하고 감싸라고군 생활을 경험해보지 않고 함부로 말하면 안 된다예수께서 마귀와 귀신과 독사의 새끼들을 감싸라고 하셨던가도착(倒錯)을 정상이라 말하면 안 된다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사람은 사랑해야 하나 죄와 죄인은 보응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그것이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법이다.

이 밖에도 온갖 불의추악탐욕악의가 가득함시기살인분쟁사기악으로 가득한 자들과 수군거리며 서로 헐뜯고 하나님을 미워하고 건방지고 교만하며 자랑하고 악한 일을 꾸며 대고 부모에게 불순종하고 미련하며 언약을 배신하거나 인정도 없고 무자비한 자들이 모두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한 사람들이 행하는 결과물들이다(1:29-31). 하나님의 법은 인간이 이런 식으로 살다가 죽는다는 사실을 끝없이 알려주고 경고한다그런데 어그러진 인간은 자기들만 이런 행위를 하는 게 아니다이렇게 하는 사람들을 옳다고 두둔까지 한다(1:32). 인간을 물질에 불과한 유물론적 일원론적 존재로 믿는 공산주의자들이 상습적으로 거짓말과 악을 정당화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정말 구제불능의 존재인가그렇다인간의 지식은 완전하지 않고 사람을 교만하게 할 뿐이다정부가 한반도 대운하를 밀어붙일 때 그 정당성을 설파한 것은 일부 지식인들과학자들이었다최근 방사성 물질 검출로 대량 회수 소동이 일어난 건강 침대 소동도 음이온이 건강에 이롭다는 일부 방송 의사들의 음이온 예찬에서부터 착안된 광고 결과물이었다임산부의 입덧을 드디어 잡았다고 과학의 성과를 찬양하던 진통제 탈리도마이드는 수많은 사지(四肢기형의 태아로 인해 많은 이들을 고통으로 몰아넣었다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인간에 대해 창조주 하나님은 피조물인 인간처럼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분이 아니다하지만 직접적 보응이 아니더라도 인간은 이렇게 스스로 그 보응을 충분히 달게 받는 것으로 대가를 치른다.

 

3. 바울의 육체론연약한 육체와 신령한 몸

바울은 육체(육신)라는 말을 아주 광범위하게 사용한다영국의 신약학자 브루스(F.F. Bruce)는 육체의 용법에 대해 (1) “사람의 신체”(2:28; 고후12:7; 4:13; 2:29), (2) “인간의 혈통 또는 혈연 관계”(1:3, 9:3, 5, 11:14), (3) 단순한 인류”(2:16; 3:20; 고전1:29)라는 의미로 구분하였다주석가 바클레이(William Barclay)는 이 문제를 좀 더 신학적으로 접근한다.

먼저 그는 신령한 몸과 대조하여 육체라는 말을 사용한다(고전15:44-46). 이 육체는 질병에도 고통 받을 수 있는 연약한 몸이다(4:13). 바울은 예수도 이 연약한 육체로 인해 육체적 죽음을 맞아(1:22) 화목 제물이 되었다고 했다즉 이 몸(육체, sarx)는 쳐서 복종시켜야 되는 연약한 몸이다그런데 이 육체는 또 다른 성향을 보인다. “우리가 육체에 있어(en sarki) 행하나 육체대로(육신의 생각대로, kata sarka) 싸우지 아니하노니”(고후10:3). 이 몸(육체)은 또 다른 경향성즉 중의적 요소와 의미가 있음을 언급한다.

사람의 본능에 속한 육체는 첫째 아담에게서 온 것이요(고전2“14) 신령한 생명은 둘째 아담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얻을 수 있다그러나 이 육신의 몸은 신령한 생활에 적합지 않으므로 사람의 몸이라 하고 신령한 몸은 부활의 몸이라 하였다겉으로 보면 다 같은 육체이나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요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다이 육체의 몸은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해야 한다(6:5).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한다고 우리 몸의 다른 측면이 없는 것이 아니다우리 인간에게는 육체의 상전이 장악할 수 없는 몸이 있다바로 진정한 하늘의 주인이 다스릴 신령한 몸이다.

바울은 율법적 관점에서는 육체적으로 누구보다 신뢰할만한 인물이었다(3:4). 생후 8일 만에 할례를 받은 베냐민 지파에 속한 순수 이스라엘 사람이요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바리새인으로 교회를 핍박하기까지 열심을 내었던 율법에 비추어 보면 흠이 없는 사람이었다그러나 그러한 육체가 전부가 아니었다알고 보니 율법에 매달린 이 육체는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의 가치를 알고 난 다음에는 마치 배설물이요 쓸모없는 쓰레기나 다름이 없었다몸과 마음이 육법을 지켜서 의롭게 되는 게 아니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 육체조차 의롭게 된다(3:9). 그래서 바클레이는 바울이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7:5)라고 말한 표현을 우리가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이라는 뜻으로 이해한다율법적 싸움을 벌이던 때요 자신의 힘으로 무언가 얻으려다가 오직 좌절과 패배와 절망을 맞볼 수밖에 없는 우리 인간의 보편적 모습을 말한다.

바클레이는 이 몸(육체육신, sarx)과 유사한 또 한 단어를 지적한다바로 사르키코스(sarkikos)이다바울은 불신자도 아니요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도 아닌3의 인간 곧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이 있다고 지적한다아이처럼 여전히 단단한 것이 아닌 젖을 먹고 이들 그리스도인들이 있다면 병든 육체가 육신의 질서를 잃어버리듯 교회도 시기와 분쟁에 휘말리게 된다(고전3:3-4). 성화되지 못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설명한 단어라 볼 수 있겠다.

육신을 따라 생각하는 것(8:6)과 육신을 따라 사는 것은 죽는 것이요(8:12, 13) 죄 아래 팔린 삶이다(7:14).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은 벗어버려야 한다(4:22).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이다(5:24). 다시는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기 위해 우리의 옛 사람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아 멸해야 한다(6:6).

조덕영 박사 bareunmedia@naver.com

사도 바울의 창조 신학(1)

편집자 주조덕영 박사의 사도 바울의 창조신학 글을 4회에 거쳐 연재합니다조덕영 박사는 조신학연구소 소장창조론 오픈 포럼 공동대표평택대 신학부 겸임교수로 사역하고 있다.

I. 사도 바울

사도 바울은 과연 누구였을까사도 바울만큼 기독교 역사에서 극적이고독특하고중요한 인물이 있을까그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며무엇을 배웠으며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외모는 어떠했을까출신과 가문은그리고 회심 이전에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다가 부활의 예수를 만난 후 돌연 신앙의 변곡점을 맞았던 것일까스스로 성경을 읽을 수 있는 그리스도인 가운데 한 번쯤 이런 궁금증이 없었던 사람이 있을까?

▲조덕영 박사

바울은 길리기아 다소(9:11;21:39;22:3)에서 로마 시민이었던 부모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성경에서 그의 가족에 대해 더 이상 알려진 내용은 거의 없다제롬(Jerome)은 한 구전을 통해 그의 부모가 원래 기스갈라(Gischala)라고 불린 한 성읍 출신으로 주전 1세기 로마가 팔레스타인을 유린할 때 다소로 도피한 사람들이었다고 했다. 2세기 문헌은 바울의 외모에 대해 체구가 작고 양 눈썹이 붙었으며 코가 좀 크고 머리는 벗겨졌으며 다리가 구부정하고 단단한 몸을 가진 은혜가 충만한 사람이었다사람처럼 보이면서도 때때로 바울은 천사의 얼굴(the face of an angel)을 가진 사람으로 보였다.”라고 묘사하고 있다천사의 얼굴이란 표현이 바울의 어떤 외형적 부분을 묘사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다만 바울이 선한 표정을 가진 평범한 외모의 인물로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로마 시민권을 가진 것으로 보아 평범한 히브리 가정이라기보다는 약간의 기득권을 누린 유대 출신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초대 교회 집사 중 한 사람이었던 스데반을 돌로 치는 자리에 함께 있던 불신자로서 놀랍게도 부활한 예수를 다메섹 도상에서 만났다그의 회심이 세상 그리스도인 가운데 그 누구와도 달리 정말 극적이고 독특한 이유다이후 그는 예수의 12 제자초대교회 집사 출신도 아닌 사람으로 부활하신 예수로부터 친히 이방인의 사도로 임명되었다그런 그가 없었다면 과연 기독교가 지금의 틀을 가진 종교가 될 수 있었을까?

바울에 관한 자료는 거의 전부가 신약성경 안에 들어있다첫째 바울 서신이요 둘째는 사도 행전이다사도 바울은 성경 계시의 저자 40여 명 가운데 가장 많은 성경을 저술한 저자다성경 66권 중 최소 13권이 바울이 쓴 책이다예수 불신자요 기독교 핍박자에서 극적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대면하면서 기독교회의 일원에 동참하게 된 인물로 공교회를 굳건히 견고하게 만든 공로자였다오늘날 기독교가 세계적 종교가 되는 데 있어 그가 최고 공로자 중의 한 사람이라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초대 교부들이 바울 저작들을 연구하고 다룬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루터와 칼빈의 종교개혁 사상도 바울 저작인 로마서의 이신칭의(以信稱義)에서 비롯되었다이후에도 무수히 많은 학자들이 바울 저작들을 언급하고 연구하였다헤겔불트만본 하르낙헤르만 리델포스게할더스 보스, F.F. 부르스칼 바르트그레샴 메이천윌리엄 바클레이알버트 슈바이처, N.T. 라이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배경을 가진 신학자들이 사도 바울 연구에 매달린 것도 기독교 안에서 사도 바울이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가졌던 인물인가를 증거한다비록 바울의 이신칭의만이 정경성의 표준(principium canonicitatis)은 아니었으나 종교개혁 이후 바울 사상의 요점이 기독교의 중심 교리 안에 자리 잡은 것은 분명하다.

바울이 가지는 이런 상징성이 구속 신학의 칭의 교리를 중심으로 이루어짐에 따라 바울 연구에 있어 미흡한 부분들이 생겨났다바로 창조창조주창조 세상에 대한 사도 바울의 관심은 관심에서 밀려난 감이 있다하지만 사도 바울의 창조 이해는 기독교의 올바른 창조 이해와 섭리에 대한 대단히 중요한 기초 자료이며바른 구속 신앙의 근본이 될 수밖에 없다.

이에 본 논문에서는 이 부분들을 다루어보려고 한다사도 바울은 창조를 어떻게 바라보았으며 자신의 복음에 어떻게 이 창조 신앙을 연결하고 있는가즉 사도 바울은 자신의 창조 신앙(신학)을 어떻게 구속 신앙(신학)으로 연결하여 기독교 신학을 완성해 간 것인지를 살펴보려 한다.

신약학자 윌리엄 바클레이(William Barclay)는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하고 믿었는지를 알아보기 전에 우선 두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고 했다.

첫째 바울은 조직신학자가 아니었다는 점을 지적한다예일대 교회사 교수를 지낸 교회사학자 윌리스턴 워커(1860-1922)도 바울이 요즘의 눈으로 보면 조직신학자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그의 저술들(세심하게 계획하고 논증하는 로마서를 포함하여)은 사실 우발적이고 개인적이었다고 했다바울은 신학을 체계화한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사실 바울뿐 아니라 모든 성경 저자들이 그렇다성경이 신학적 체계를 의식하고 쓰여진 책은 아니기 때문이다바울은 사람의 지성이나 지력에 충분한 만족을 줄 어떤 체계를 만드는 일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오직 자신의 경험에 의거한 믿음을 전하여 사람들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도록 하기 위해 그 믿음을 말하는 데 관심이 있었다그는 예수에 대해 말할 때 부활하신 주님에 대하여 자신이 경험한 것이라고 단순하게 말했다이것을 바르게 해석할 책임과 짐은 후대 신학자들에게 있다.

둘째바울 신앙 안에는 정적(靜的)인 것이 전혀 없었다복음의 내용에는 전승의 문제가 있기도 하지만 복음은 본질적으로 계시다이 계시는 성경 저자의 상황에 따라 가변적인 환경 속에서 주어졌다바울도 늘 이같이 변화하는 인간 경험의 조류에 항상 직면하면서 살았다때론 실수도 하고 사색가들과 이단자들을 응대하고 교회가 제도상 정통교회로 정착하기 이전 시기를 살면서 변화무쌍한 상황과 문제에 대면하고 그리스도의 신비스러운 보고에서부터 새로운 진리새로운 보물을 꺼내오는 일을 하였다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위대함과 새로운 풍요로움을 늘 발견하면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소개하려는 의도가 바울에게는 있었다텍스트와 컨텍스트에 대한 사도 바울의 구별과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너무도 정확했다는 의미다이를 바탕으로 바울의 기독론칭의론구원론죄론종말론교회론에 대한 많은 연구가 있었다.

문제는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결코 정적이지 않았던 사도 바울이 변화하는 과학 기술 시대를 살아가는 이 시대를 보고는 무어라 말하고 어떻게 복음을 설명하려 했을까 하는 점이다사도 바울 연구에 있어 주류에서 밀려난 바로 그 부분이다조금은 관심을 덜 받는바로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의 창조와 창조주그리고 작금의 창조 세상에 대한 것이다즉 오늘의 인간율법의식주환경(그리고 과학기술의 발전 속에 있는 세상에 대해 사도 바울의 계시는 어떤 연결 고리를 가질 수 있을까이러한 질문들은 우리 시대 그리스도인들의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조덕영 박사 bareunmedia@naver.com

찰스 핫지의 창조론과 사도 바울의 창조 신학을 알고 싶다면?

창조론오픈포럼 24차 모임


창조론오픈포럼 제24차 모임이 2019년 2월 23일 오전 9시 30분부터 신성교회(서울시 동작구 만양로 35, 정민 목사 시무)에서 진행된다.

창조론오픈포럼은 창조론은 자연과학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신학과 철학과학사인문사회학과 문학예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를 포괄하는 대표적인 학제 간 교류가 필요한 융합적 주제라는 취지로 지난 2007년에 시작된 창조론 전문가들의 모임이다.

 

▲서울대 환경대학원에서 있었던 포럼 모습(출처: 창조신학연구소 공식 블로그)

 

이번 포럼에는 찰스 핫지의 창조론(박찬호 교수), 기원 논쟁과 진화의 의미적 다양성(양승훈 원장), 창세기 1장의 재해석(허정윤 박사), 사도 바울의 창조 신학(조덕영 박사), 영화의 과학적 세계관에 대한 신학적 이해와 평가성결운동과 진화론 그 만남의 역사와 대응신무신론 비판 등의 논문들이 발표될 예정이다.

한편창조론오픈포럼의 관계자는 최근 창조론 오픈포럼의 과월호 논문들은 누리미디어를 통해 보급되고 있는 데 놀랍게도 다양한 사람들에 의해 유료로 다운로드 되고 있다창간호로부터 23호까지 약 200여 편의 논문과 서평이 실려 있는데 한 해 동안 편당 약 2만 원 정도의 인세를 받고 있다금액으로는 많지 않지만 한 편의 논문을 다운로드 할 때 지불하는 인세가 매우 적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관련 논문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라고 밝혔다또한 양승훈 박사는 창조론 오픈포럼이 한국 창조론 운동의 지평을 건강하게 바꾸고 있다고 생각 한다라고 전했다.

창조론오픈포럼은 관심 있는 사람 누구나 참가 가능하며 관련 문의는 공동대표 조덕영 박사(010-8963-0691)에게 하면 된다.

일시: 2019년 2월 23일 오전 9시 30

장소신성교회(서울시 동작구 만양로 35, 정민 목사 시무)

참가비: 1만 원(논문집다과 제공)

문의조덕영 박사(010-8963-0691) 

바른미디어 bareunmedia@naver.com

자연을 잇다

(사)행복한숲, 숲해설가 교육생 모집


산림환경교육 전문기관 ()행복한숲(대표 이원경)이 2019년 숲해설가 5기 교육생을 모집한다숲해설가란 산림교육을 위한 국가자격증 중 하나로국민들이 산림문화·휴양에 관한 활동을 통해 산림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고 올바른 가치관을 가질 수 있도록 해설하거나 교육하는 사람을 말한다.

14년 전부터 경기도 남양주시를 기반으로 활동해온 ()행복한숲은 산림청이 지정한 「산림교육전문가 양성기관」(제숲해설-2014-02)이다. 2011년부터 2014년까지 생태안내자 약 200명을 배출했으며, 2015년부터는 매년 40여 명의 숲해설가를 양성해 약 5,000명의 시민들에게 산림환경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숲은 경이롭다(사진 제공: (사)행복한 숲)

 

()행복한숲은 산림청에 등록된 「산림복지서비스 전문기관」(숲해설업·유아숲교육업·산림치유업)이기도 하다. 2017년부터 광릉 국립수목원의 산림교육 위탁운영뿐 아니라 각종 프로그램을 개발해 운영한다▲교육부 「누리과정」의 환경교육 내용을 분석하여 구성한 유아숲 프로그램 ▲환경부에서 인증한 사회환경교육 프로그램(환경생태교실▲교육부 자유학기제 (꿈길)체험처 등록프로그램 등 유아부터 성인까지 나이대별로 구성된 프로그램이 인상적이다.

목재 중심의 산림교육을 기반으로 자연환경 분야에 대한 관심과 흥미를 갖게 하고환경오염에 대한 문제의식 및 산림보호 생활 실천의 기반을 조성하는 목공 체험교육도 눈길을 끈다.

2019년 숲해설가 5기 교육생을 모집

□ 대상 산림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고 올바른 가치관을 가질 수 있도록 해설하거나 지도교육하려는 의지가 있는 성인

□ 인원 : 40명 이내

□ 교육비 : 120만 원(남양주시민 20% 지원)

□ 문의 : 031-511-6563

□ 신청 및 안내 바로가기 http://cafe.daum.net/eduforest/VQzn/21

바른미디어 bareunmedia@naver.com

하나님의 죽음 vs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

20세기 중후반에 활동한 신학자 가운데 위르겐 몰트만(Jurgen Moltmann)은 삼부작(Trilogy) 가운데 2부에 속하는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이란 제목의 책을 썼다신학을 조금만 접해본 사람이면 이 책의 제목 “Der gekreuzigte Gott”이 일으킬 논란이 금방 다가올 것이다하나님의 죽음이라는 실로 엄청난 논제를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물론 몰트만 자신은 결코 이 사실을 의도하지 않았다그럼에도 누군가에 의해서 하나님의 죽음이 가능한 것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이 제기될 수 있기 때문이다바울이 디모데에게 전한 말씀은 하나님의 죽음이 불가함을 명확히 언질하고 있다(딤전 6:14-16). 오직 하나님에게만 죽지 않음이 있기 때문이다창조와 함께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은 원칙상 죽을 수 있는 존재이나하나님은 그렇지 않다오직 그에게만 죽지 않음이 있기 때문이다위르겐 몰트만의 책 제목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십자가라는 형틀은 죽음 이외의 방식으로는 내려올 수 없는 형 집행 방식이기 때문이다.

▲유태화 교수

이와 대조적으로 하이델베르크신앙교육서는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을 이야기 한다. (40왜 그리스도는 죽기까지 자신을 낮추어야 했습니까왜냐하면 하나님의 공의와 진리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이외에 다른 어떤 방법으로 우리의 죄에 대한 대가를 지불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그리스도 예수를 뜻한다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며 동시에 참 사람이다두 본성이 한 인격에 거하는 존재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 예수이다하이델베르크신앙교육서의 제1저자인 우르시누스(Ursinus)나 그의 신앙고백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이 사실을 매우 주의해서 읽고 이해했었다신성과 인성을 분리 없이 혼동 없이 그리스도 예수라는 한 인격 안에서 읽고 해명해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신성과 인성은 근원적으로 분리되지 않는다심지어는 영혼이 그 육체로부터 분리되었을 때조차도 신성은 육체가 놓인 무덤을 비우지 않았고 동시에 영혼과도 함께 있었다심지어 인성을 따라서 그리스도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때에도 신성은 인성과 분리되지 않았다그러나 동시에 신성은 결코 인성과 혼동되지도 않았다인성을 따라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을 때에즉 영혼이 육체로부터 떠날 때에신성이 인성의 고난을 받고 피를 흘리며 죽음에 넘겨질 때에 본체적으로 혹은 존재론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는 말이다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리스도 예수의 수난은 신성의 직접적인 수난이나 죽음에 넘겨짐이 아니라 인성을 따라서 일어난 일이어서 하나님의 실제적 죽음을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다만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이 있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그리스도 예수라는 한 인격적인 존재는 신성과 인성을 함께 내포하는 존재이되그 인격 안에 있는 신성과 인성은 직접적으로 각각 자신을 상대방에게 전달하지 않고다만 간접적으로만 전달한다쉽게 말하여그리스도 예수의 인격을 통하여 신성이 표현될 때에는 인성이 신성과 함께 있으며인성이 표현될 때에도 신성이 인성과 함께 있지만그러나 어디까지나 직접적으로 신성을 표현하거나 혹은 인성을 표현하거나 하는 사실이 희석되지 않는 방식으로 그렇다는 말이다이런 면에서 보면그리스도의 수난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수난이고따라서 직접적으로 인성의 수난인 것이다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리스도 예수는 그 영혼과 육체로 수난과 죽음에 참여하는 것이다.  

▲몰트만의 Der gekreuzigte Got

이 사실을 하이델베르크신앙교육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37그대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당하셨다고 말할 때그대는 무엇을 고백하는 것입니까예수 그리스도께서 땅위에 사시는 전 생애 동안그러나 특별히 생애의 마지막 순간에전 인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친히 육체와 영혼으로 감당하셨다는 것입니다이렇게그리스도께서 유일한 속죄 제물로 고난을 당하심으로우리의 몸과 영혼을 영원한 정죄로부터 구속하시어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의와 영생을 얻게 해 주셨습니다.

37문답에서 확인하듯이 수난과 죽음의 직접적인 당사자는 인성을 그 인격에 수반한 그리스도 예수인 것이다그리스도 예수 곧 하나님의 아들로서 십자가에서 수난을 당하신 것이다.

이 수난에 신성이 배제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또한 기억해야만 한다인성이 수반된 그리스도 예수의 수난에서 몸과 영혼으로 자기 백성 모두의 죄를 실제로 담당하고 죽음의 심판에 넘겨질 때신성은 인성을 떠나지 않았다직접적인 수난의 당사자인 인성을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이사야 63장 9절에서 하나님이 죄인의 모든 고난에 동참할 수 있듯이죄인의 모든 죄를 담당한 예수의 모든 고난에 오롯이 동참한다우리의 죄를 담당하기 위하여 하늘을 가르고 우리에게로 오사(사 64:1) 성육신 한 그리스도 예수의 전 삶과 그 정점으로서 십자가에서 신성은 온전히 함께하였다인성에 정해진 수난과 고통을 신성이 공감하는 방식으로 경험하는 것이다인성이 실제로 직면했고 경험했던 죽음의 고통까지도 신성이 공감하는 방식으로 실제적으로 경험하였다그러나 실제로 죽지는 않았다.

다만하나님의 아들로서 그와 같이 행함으로써 다음과 같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던 것이다. “제 40왜 그리스도는 죽기까지 자신을 낮추어야 했습니까왜냐하면 하나님의 공의와 진리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이외에 다른 어떤 방법으로 우리의 죄에 대한 대가를 지불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인성의 직접적인 수난에 신성이 분리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다시 말하여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리스도 예수의 수난이었기 때문에한 사람의 죽음이 많은 사람의 죄의 값을 지불하고 죄와 사망에서부터 생명에로 옮길 수 있었던 것이다비록 직접적인 수난과 죽음에 넘겨진 것은 아니었으나간접적으로 인성과 함께 있음으로써 택함받은 모든 백성의 죄를 실제로 감당하여 진노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인성의 수난은 실제적이되 그 효과가 모두에게 미칠 수 있었던 것은 신성이 인성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거기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으로 단번제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인을 속량하는 일을 완결 지을 수 있었던 것이다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의 신비의 힘을 보게 되는 지점이다사실 마귀는 이 사실을 읽을 수 없었을 것이다십자가의 신비는 성령의 사역이 아니고는 접근할 수 없는 진리이기 때문이다(고전 2:14). 그 당대의 지혜자도선비도변론가도 십자가 사건에 감추인 구원의 지혜와 능력을 헤아릴 수 없었다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고전 1:19-21). 심지어 교부들은 사단도 십자가의 신비에 도달하지 못한 것으로 이해했다단순히 인간적인 일인 줄만 알았던그래서 그리스도 예수를 죽음에 붙잡아 둘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그리스도 예수의 신성과 인성의 구현으로 죽음의 권세를 깨트리고 부활하자 속은 것을 알았던 것으로 이해하지 않았던가!

하나님은 죽음에 매이거나 혹은 죽음에 종속되는 분이 아니다오직 하나님에게는 죽지 아니함이 있기 때문이다그리스도 예수의 신비를 친히 목격하고 그로부터 계시를 받았던 바울은 디모데전서 6장 15, 16절에서 다음과 같이 연약한 후배 사역자인 디모데에게 권면하였는데바울이 걸었듯이 전도자와 목회자와 신학자의 길을 걷는 모든 후배들에게도 실로 매우 중요한 말씀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은 복되시고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오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 가운데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아멘” 다만 바울 사도가 갈라디아교회에 보내는 편지(2:20)에서 친히 고백했듯이 이렇게 고백할 뿐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유태화 교수(백석대학교 신학대학원) bareunmedia@naver.com

신천지, 해외 포교 어떻게 하나?

터키 이스탄불 지역 포교 유경험자의 폭로


신천지의 해외 진출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신천지 내부 자료에 따르면 신천지는 해외 40개국에 진출해 22,478명의 신도(2019년 1월 13일 기준)를 보유 중이다신천지 맛디아 지파에서 9년간 활동하고터키 이스탄불 지역에서 2년 이상 포교활동을 펼쳤던 탈퇴자 씨가 1월 22터키 이스탄불 지역의 신천지 포교활동과 현황을 폭로했다.

일 년 동안 소득 없던 포교사업으로 활로 모색

씨에 따르면 처음 일 년은 포교에 큰 소득이 없었다신천지 신도 약 10명이 시리아 난민이 살던 집을 빌려 한 장소에서 지냈다재정적 어려움으로 청년 신도들은 하루 한 끼만 먹는 경우가 많았다.

신천지 신도들은 몇 가지 사업과 문화 활동을 시작하며 포교활동에 박차를 가했다화장품 사업을 시도했지만 지지부진하자 현지 청년들의 왕래가 많은 지역에 “Cheongdo”(편집자 주청도이만희의 고향이 경북 청도)라는 빙수 카페를 만들었다이 카페가 자리를 잡아 한국 음식을 하는 식당으로 리뉴얼 했고매출이 높아 2호점을 계획 중이다.

 

▲신천지 신도들이 터키에 세운 청도 카페

다양한 문화 포교

신천지 신도들은 사업과는 별도로 문화 포교의 장을 만들었다한국 문화원부터 시작했다한국어 교사 자격증을 취득한 신도들이 터키로 와서 한국어 수업을 진행했다매주 토요일은 한국 영화한국 음식 체험한국 놀이 체험 등을 열어 현지인들과 관계를 맺었다유튜브 채널을 만들어 한국 문화 및 언어 등을 주제로 한 영상을 올리기도 했다. A 씨는 한류 열풍으로 인해 한국 문화로 포교하는 일이 비교적 수월했다고 전했다.

씨가 전한 신천지의 포교방법은 국내에서와 유사하다. 1차는 관계 맺기다한국어에 관심을 보이는 현지인들과의 언어 공부남북 분단 문제행복 프로젝트소통 논문 작성도형 상담인문학 세미나 등 다양한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간다특히 한국문화원과 청도카페는 한국에 관심을 가지는 외국인들과 관계를 맺는데 일등 공신이 되었다물론 국내에서처럼 맺은 관계는 성경공부로 이어진다.

해외 신도 어떻게 관리하나

씨는 현재 터키 지역의 신천지 신도가 약 100(수강생 포함)이라고 밝혔다이들은 철저한 관리를 받으며 신천지 교리에 세뇌되고 있다집회는 통역자를 통해 동시통역으로 진행된다집회 후 신천지 교리를 깨달았는지 점검한다한국에서 벌어지는 신천지 시험에도 동참하도록 독려한다신천지 고위 간부들은 터키로 파견된 미혼 신도들에게 현지인들과 결혼해 국적을 따라고 권유하기도 한다.

한편, A 씨는 신천지 터키인 강사가 4교사 가능자가 7(2018년 10월 기준)이라고 전했다이들은 한 달에 약 800리라(한국 돈 약 17만 원)를 받고 함께 합숙하면서 아침 7시부터 자정까지 포교활동에 매달린다.

 

▲터키에서 이뤄지는 신천지 집회

씨는 신천지가 터키에 자리를 잡으면서 이탈리아코소보 등지에까지 활동 범위를 넓히고 있다고 말했다터키 이스탄불에 신도 100명가량이 모이면 타지 개척에 박차를 가할 것이라는 계획을 세웠다고 전했다터키의 한국 식당과 문화원이 신천지 내에서 성공사례가 되어 앞으로 식당과 문화원을 체계적으로 운영하며 포교활동을 펼칠 것으로 전망했다.

여러 나라를 다니며 선교 활동을 펼친 한 선교사는 신천지가 해외에서 이정도로까지 포교활동을 펼치는지 알지 못했다라며 신천지의 포교 방식이 한국인 선교사라면 한 번쯤은 생각하고혹은 현장에서 충분히 사용하고 있는 방식이다경각심을 가지고 어떻게 대응할지 준비해야한다라고 밝혔다.

씨는 신천지에서 비교적 최근에 해외선교부가 만들어졌다고 밝혔다해외포교를 위해서 일정 기간 언어사례 공유말씀 훈련 등을 받고 해외로 보내진다신도들 사이에서 해외로 나가 포교활동을 하겠다는 이들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신천지 내부 자료에 따르면 신천지는 유럽 9개국오세아니아 2개국아프리카 5개국아시아 16개국북아메리카 2개국남아메리카 6개국 등 총 40개국에 진출해 있다신천지 뿐 아니라 통일교는 공식적으로 195개국에 진출해 있으며하나님의교회구원파만민중앙교회 등 많은 이단 사이비가 해외 포교활동을 펼치고 있다교회 혹은 선교단체가 각개 전투 식으로 선교활동을 펼치는 한국교회가 공동 대응책을 마련해야 하는 시점이다.

조믿음 기자 bareunmedi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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