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 : 2017년 5월월

박옥수 구원파의 억지 주장

구원파 아니다?


기쁜소식선교회(대표 박옥수)가 ‘우리는 구원파가 아니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본지의 ‘구원파 박옥수, 호주에서 성경 세미나 연다’라는 기사를 문제 삼아 언론중재위원회에 반론을 청구했다. 이들은 “박옥수 및 기쁜소식선교회는 구원파가 아니며 유병언과 관련이 없음을 여러 언론을 통해 밝혀진 바 있음에도 불구하고 해당 기사 내용은 불특정 다수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한 소지가 있다”고 신청이유를 밝혔다.

구원파는 별칭

우리나라에는 대표적으로 세 종류의 구원파가 있다. 세월호 사건과 맞물려 언급된 기독교복음침례회(권신찬(사망), 유병언(사망) 구원파), 기독교복음침례회의 분파인 생명의말씀선교회(대한예수교침례회, 이요한 구원파), 생명의말씀선교회와 같은 대한예수교침례회라는 교단명을 사용했지만, 별개의 단체인 기쁜소식선교회(박옥수 구원파)다. 물론 아류도 존재한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통합, 합신, 고신, 기성 등 한국의 주요교단들은 이들의 비성경적인 문제점을 지적하며 ‘이단’으로 결의했다. 단체 사이에 상의한 교리가 있지만, 구원 교리의 오류가 대표적이라 ‘구원파’라고 지칭했다. 즉, 구원파는 기성교회가 붙인 별칭이다.

용어 사용 문제

구원파가 공식명칭은 아니지만, 교단 결의에 근거해 이들을 ‘이단’, ‘구원파’라고 표현하는 것은 법적인 제재를 받지 않는다. 한 예로 오정호 목사(새로남교회)는 대전광역시기독교연합회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 위원장 이었던 지난 2004년, 박옥수 구원파 세미나의 실체를 알리기 위해 ▲구원파 박옥수 ▲구원파는 한국교단이 이단으로 규정했다 ▲구원파는 성경세미나를 통해 대전 시민에게 다가간다는 등의 내용을 담은 전단 30여만 부를 배포했다.

기쁜소식선교회는 오 목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고, 사건은 대법원까지 이어졌다. 당시 대법원은 오정호 목사에게 무죄를 선고하며, 구원파라는 용어에 대해 “피고인들의 주관적인 종교적·교리적 분석에 기초한 순수한 의견 또는 논평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판시했다.

박옥수 구원파 측이 ‘구원파’라는 용어를 사용했다는 이유로 소송을 제기한 사례들이 더 있지만 무죄 혹은 불기소 처분되었다. 박옥수 구원파 측이 이 같은 사실을 모를 리 없다. ‘아니면 말고’ 식의 문제 제기는 근절되어야 한다.

조믿음 기자 jogogo@hanmail.net

〔 책 소개 〕 『개혁교회 신앙고백서 해설집』

『개혁교회 신앙고백서 해설집』(저자: 신원균 목사)은 신조의 필요성과 더불어 고대신조, 종교개혁 신조, 웨스트민스터 신조 채택 과정 등을 소개하고 있다.

저자는 “개혁교회에서 신조는 성경 다음으로 중요한 신앙과 삶의 제 2의 기준 문서“라며 “신앙고백서의 내용을 제대로 배우기 시작할 때,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고 신앙이 회복될 것“이라고 밝혔다.

바른미디어 bareunmedia@gmail.com

법적 선언으로서의 칭의

박재은 박사의 칭의 바르게 이해하기(4)


칭의 교리를 다룸에 있어 “칭의”(justification)란 단어의 의미 자체를 정확히 규정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왜냐하면 칭의라는 단어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칭의의 구조, 과정, 결과가 판이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칭의는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법적 선언”으로 이해해야 한다. 칭의는 왜 “하나님의 법적 선언”으로 이해해야 하는가? 총 세 가지로 그 이유들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1) 성경적 이유, (2) 신학적 이유, (3) 실천적 이유들이 바로 그것들이다.

▲ 박재은 박사

성경적 이유

구약에서는 “의롭다”라는 뜻을 표현하기 위해 히브리어 짜다크가 사용되었고, 신약에서는 디카이오오(δικαιόω)라는 헬라어 단어가 사용되었다. 둘 다 법정적 선언(forensic declaration)의 의미가 내포된 단어이다. 구약에서는 대표적으로 신명기 25장 1절을 예로 들 수 있다. “사람들 사이에 시비가 생겨 재판을 청하면 재판장은 그들을 재판하여 의인은 의롭다 하고 악인은 정죄할 것이며.” 재판장은 의인을 의롭다 선언하고, 죄인을 악하다 선언하는 법적인 권리와 권위가 있는 존재이다. 죄인과 의인을 가르는 기준은 법적으로 공명정대(公明正大)해야 한다.

 

​성경에서는 이 공명정대한 기준점을 하나님의 성품에 돌리고 있다. 즉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공의로운 분이시므로 그의 법적 선언은 언제나 옳은 것이다. “…나는 악인을 의롭다 하지 아니하겠노라”(출 23:7). 성경에서 법적인 선언은 곧 심판을 의미한다. “주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행하시되 주의 종들을 심판하사 악한 자의 죄를 정하여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돌리시고 공의로운 자를 의롭다 하사 그의 의로운 바대로 갚으시옵소서”(왕상 8:32). 지금까지 언급된 모든 구약구절들은 “의롭다”의 히브리어 동사인 짜다크를 기본 어근으로 삼아 법적으로 의롭다 선언하는 의미가 내포되어있다.

 

신약 성경에서도 “의롭다”를 뜻하는 헬라어 동사인 디카이오오를 사용하여 법적 선언의 의미가 내포된 형태로 칭의 논의가 전개되는 것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로마서 8장이 대표적이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롬 8:33). 이 구절은 법적 용어로 가득 찬 구절이다. 하나님의 법정적 선언에 대해 그 누구도 법적으로 “고발”(혹은 “송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로마서 4장 5절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이 구절에서 “의롭다 하시는”(δικαιοῦντα)이란 표현은 법적 선언으로서의 칭의 개념을 잘 드러내 준다. 즉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이유는 그 죄인이 어떤 행위를 해서가 아니라(그러므로 “일을 아니할지라도”) 혹은 경건했기 때문도 아니라(그러므로 “경건하지 아니한 자”) 오히려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죄인의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간주” 혹은 “여겨 주신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법적 선언으로서의 칭의 개념이 명확히 드러난다. 신구약 성경에서 짜다크와 디카이오오의 사용은 죄인을 “의롭게 만들어 주는” 의미가 아니라 여전히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법적으로 “의롭다고 선언, 여겨, 칭해” 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의롭다”의 성경적 용례는 본질적인 갱신이나 의롭게 변화되어가는 과정을 지칭한다기보다는 죄인의 “신분”이 바뀐 것에 대한 공개적인 “법적 선언”에 더 가깝다. 이러한 성경적 용례는 다음부터 살펴볼 신학적 이유와도 밀접하게 관련을 맺어 논의의 물꼬를 튼다.

신학적 이유

신구약 성경 속에서 사용된 “의롭다”라는 단어가 뜻하는 바는 내부적 변화나 갱신을 뜻하기보다는 바뀐 신분에 대한 법적 선언이라는 사실을 앞에서 살펴보았다. 또한, 법적 선언을 하는 주체는 공의로운 재판장이신 하나님이라는 사실도 살펴보았다. 이를 확고히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칭의 선언의 궁극적 주체를 하나님께로 돌릴 수 있다: 법적인 선언은 재판장이 가진 고유 권한이다. 공의로운 재판장은 사사로운 감정이 아닌 법을 기준으로 재판한다. 유일무이하고 영원한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법에 근거해 내리는 법적 선언은 언제나 옳고 언제나 공의롭다. 하나님의 성품이 가득 깃들어 있는 그의 법은 무궁하며 공명정대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함부로 하나님의 판단에 토를 달 수 없다(욥 32:2). 하나님만이 칭의 선언의 궁극적 주체이다. 이러한 고백은 인간 스스로가 칭의 선언의 궁극적 주체가 되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 차 있는 근현대 칭의론의 인간중심주의적 경향에 경종을 울리는 고백이다.

 

​만약 칭의 선언의 주체를 인간으로 상정한다면 이것이야말로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라는 격이다. 전적 타락한 인간이 전적 타락한 또 다른 인간을 향해 의롭다고 선언할 수 없다. 공의 상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자기 스스로를 의로운 자로 셀프 칭의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상천하지에 가장 공의로운 분만이 죄인을 법적으로 의롭다고 선언하실 수 있는 자격과 권리가 있다.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다. 이것이 바로 법적 선언으로서의 칭의 사건이 내포하는 의미이다.

(2) 칭의는 신분의 변화이지 내부적 갱신과 변화를 뜻하지 않는다: 칭의는 죄인의 신분을 의인의 신분으로 간주하는 것(여겨주는 것, 칭해주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칭의는 죄인의 내부적 질이 결정적으로 갱신되고 변화되어 실제적으로 “의로운 자가 되는” 내부 탈바꿈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러한 내부 탈바꿈의 이야기는 칭의란 용어보다는 로마 가톨릭식의 의화(義化)라는 용어가 더 어울린다. 로마 가톨릭과는 다르게 개신교 신학에서는 칭의를 내부 탈바꿈이 아닌 법적 선언으로 본다. 이 차이는 “전가”(imputation)와 “주입”(infusion)이라는 단어로 서로 간에 존재하는 팽팽한 의미 차이를 부각시킬 수 있다. 즉 전가란 죄인 밖에 존재하는 “낯선 의”(iustitia aliena)가 죄인에게 신비적으로 넘어오는 것을 지칭한다(그러므로 “전가”). 이 낯선 의는 우리 안에서는 절대 발견 할 수 없는 의이기 때문에 낯선 의(혹은 외부적 의)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지칭한다(이는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의 설명이기도 하다). ​

반면 주입이라는 용어는 하나님의 의가 은총이라는 형태로 죄인에게 직접적으로 주입되는 것을 뜻한다. 주사를 맞듯이 하나님의 의의 은총이 신자에게 주입되기 때문에 신자의 영적인 본질과 도덕적인 본질이 신자의 내부에서 실제적 변화와 갱신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주입 개념은 바로 위에서 논의한 칭의 선언의 궁극적 주체를 누구로 볼 것인가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많은 문제를 양산해냈다. 왜냐하면 주입 교리가 가능하게 되기 위해서는(즉 하나님의 의의 은총이 신자에게 주입되기 위해서는), 신자가 미리 마음의 성향과 의지의 뜻을 내부적으로 “준비”해야 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선행 준비 없이는 주입도 없다. 결국 칭의 선언의 유일무이한 궁극적 주체가 “하나님 외에” 또 다른 존재가 필요하다는 논리가 생겨난다. 이러한 로마 가톨릭 논리는 칭의를 법적 선언으로 파악 한 종교개혁 신학과 극렬하게 논쟁해 온 대척점이었다.

 

실천적 이유

칭의를 법적 선언으로 이해하는 견해를 껄끄럽게 생각하는 진영은 다음과 같은 이유를 가지고 반대 논리를 펴나간다. (1) 만약 칭의가 법적 선언에 불과하다면, 그러한 칭의는 신자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사변적”(speculative) 탁상공론에 불과한 교리가 될 것이다. (2) 만약 칭의가 법적 선언 정도에 그치고 만다면, 점점 더 의롭게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삶을 살아내야 하는 신자의 삶의 태도에 부정적 영향을 초래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법적 선언으로서의 칭의 사건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발로로 생겨난 얕은 논리이다.

 

​법적 선언으로서의 칭의 사건은 절대로 탁상공론의 공허한 교리로 그 생명선이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신자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구체적 행동 지침을 내려주는 매우 실천적 교리이다. 의롭다고 간주 될 그 어떤 자격도 없는 자가(롬 4:5)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의롭다 칭함을 받았다면(롬 3:24) 이 사실을 깨달은 자가 마땅히 해야 할 행동은 받은 은혜에 감사하여 최선을 다해 주어진 순례자의 길을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살아내는 일일 것이다(엡 4:24).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일관되게 가르치는 바요, 지속적으로 요구하는 바이다. 또한 이것이야말로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히 12:4).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으로 인해 우리의 죄책은 남김없이 해결되었고(이에 대해서는 “6회: 죄인인가 의인인가: 과거, 현재, 미래의 죄는 모두 사해졌는가?”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이로 인해 더 이상 죄인이 아니라 의인으로 신분이 바뀐 것에 대한 법적인 선언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죄성의 유혹에 빠져 살아가고 있다(롬 7장). 그러므로 그리스도와의 연합 가운데 이미 받은 “의인”이라는 신분은 죄와 싸워나갈 수 있는 참되고 강력한 원동력을 신자들에게 제공할 수 있다. 죄가 더 이상 신자의 삶에 궁극적인 주인 노릇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롬 8:2). 이것이야말로 법적 선언으로서의 칭의 교리가 한껏 품고 있는 실천성의 정수이다.

나가는 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는 공의로운 재판장이신 하나님의 법적 선언으로 죄인의 신분이 아닌 의인의 신분으로 비로소 하나님 앞에 담대히 설 수 있게 되었다. 신자는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골 1:22)로 선언되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선언을 받은 우리는 이제 더 이상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결코 정죄함이 없다”(롬 8:1). 법적 선언으로서의 칭의는 감격이요 은혜이다. 우리를 본질상 진노의 자녀에서 의의 자녀로 신분적 입적을 해주셨다(엡 2:3). 의롭고 영원한 재판장이신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그리스도의 온전한 의의 전가를 통해, 우리의 새로운 신분을 법적으로 만 천하에 선포하셨다. 이것이 바로 법적인 선언으로서의 칭의 사건의 모체요 핵심이다. 법적 선언으로서의 칭의는 우리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위대하고 감격적인 사건 중의 사건이요 복 중의 복이다.

편집자 주: 필자 박재은 박사는 미국 칼빈 신학교에서 조직전공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현재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조직신학을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 『칭의, 균형 있게 이해하기』(부흥과개혁사), 『성화, 균형 있게 이해하기』(부흥과개혁사)가 있다.​

박재은 박사 jepark.theopneustos@gmail.com

무심코 마신 음료, 알고 보니 통일교 제품?

일화, 약 30가지 음료 생산


일부 지역의 낮 기온이 32도까지 오르는 등 초여름 날씨가 지속되고 있다. 자연스레 음료, 아이스크림에 손이 가는데, 무심코 마신 음료가 통일교 제품일 수 있어 크리스천들의 주의가 요구된다.

맥콜은 통일교 기업인 일화에서 생산하는 음료 중 가장 유명하다. 일화는 지난 2012년 “맥콜이 1982년 첫 출시 된 이후 30년간 50억 캔이 팔렸다”라고 밝힌 바 있다. 한 매체는 50억 캔을 거리로 환산하면 약 65만Km로, 지구를 16바퀴 돌 수 있을 정도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일화는 지난해 매출액 1,722억, 663억의 매출총이익, 38억의 영업이익을 기록했다.

▲ 통일교 기업인 일화에서 생산하는 음료들. 이 외에도 몇 종류가 더 있다.

 맥콜 다음으로 자주 접하는 통일교 음료로는 홈플러스 콜라, 사이다가 있다. 제조원이 일화다. 홈플러스가 통일교는 아니지만, 홈플러스 콜라, 사이다는 만드는 곳이 일화라는 뜻이다. 가격 경쟁력도 갖췄다. 1.5L 기준, 롯데 칠성 사이다와 코카콜라가 각각 2,450원, 2,890원인데 반해 홈플러스 콜라, 사이다는 950원으로 절반 가격도 안 된다.

이외에도 초청탄산수, 탑씨, 아임보리 등 일화에서 생산되는 음료는 약 30가지나 된다. 음료 대량 구매가 많은 교회 수련회가 다가오는 만큼, 통일교 제품에 대한 경각심을 늦춰서는 안 된다.

조믿음 기자 jogogo@hanmail.net

판결문에 명시된 하나님의교회의 반사회성

하나님의교회피해가족모임(하피모, 공동대표 김용한 외 2명) 회원들은 하나님의교회(김주철, 장길자)측의 악의적인 고소, 고발로 어려움을 겪어 왔다. 최근에는 전세가 역전된 형국이다. 하피모 회원들이 승소할 때마다, 판결문에 하나님의교회의 반사회적인 문제점들이 담기기 시작했다. 이는 하나님의교회의 실체를 드러내고, 그들을 향한 비판의 폭을 넓히는 결과로 이어졌다.​

가정파괴

‘장길자를 하나님으로 믿고 이혼과 가출을 조장하는 하나님의교회’라고 시위한 하피모 회원 네 명은 하나님의교회로부터 고소를 당했다. 1심과 2심에서 무죄가 선고되었는데, 2심 판결문에는 하나님의교회의 교리와 종교활동 때문에 가정파괴가 야기된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는 내용이 담겼다. 검사 측이 상고했지만 지난 5월 11일, 대법원은 이를 기각했다. 이번 판결은 법원이 하나님의교회가 가정파괴의 원인이 된다고 인정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 하나님의교회 피해자들의 일인시위

낙태

하나님의교회가 임신하지 않도록 유도하거나, 낙태를 종용했다는 사실은 피해자와 탈퇴자들 사이에서 종종 회자된다. 낙태 종용 의혹은 미국에서도 제기된 바 있다. 낙태 사례도 분명히 존재한다. 수원지방법원 성남지원은 하나님의교회가 하나님의교회피해대책전국연합(하대연)의 네이버 카페 운영자와 네이버를 상대로 낸 인터넷카페폐쇄 가처분을 기각하는 결정서에 “하나님의교회 신도였던 임산부가 그 종교 활동을 위하여 남편과 상의 없이 낙태를 해 가정불화가 발생한 사실”이라고 명시했다.

시한부 종말론

하나님의교회는 1988년, 1999년, 2012년 등 세 번의 시한부 종말론을 주장했다. 자신들은 종말의 날짜를 정한 적이 없다며 발뺌했지만, 인터넷카페폐쇄 가처분 기각 결정서에는 “1988년 종말이 온다는 취지의 전도서를 만들고 인침을 받는 144,000명 외에는 모조리 멸망한다는 종말론을 주장”했다고 명시되어있다. 또한 “하나님의교회 신도가 종말론을 믿고 약 500만 원에 달하는 비상용 물품을 구입하는 등 비정상적인 종교생활을 했다”며 시한부 종말론으로 인한 폐해까지 드러났다. 「국민일보」와 하나님의교회와의 소송에서 “하나님의교회가 1988년, 1999년, 2012년 종말을 제시하여 시한부 종말론을 제시했다”라는 판결도 나왔다.

 

한편, 하나님의교회는 종말을 이용해 신도들에게 공포감을 심는 동시에 도피처를 제시했다. 도피처는 하나님의교회다. 도피처를 건축해야 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하나님께 제일 큰 축복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 데 필요한 자금을 드리는 것”이라는 설교 등으로 건축헌금을 강요했다.

집단폭행

하피모 회원들은  2013년 12월 말부터 약 3개월 간 ‘하나님의교회 신도들이 탈퇴자의 집을 찾아가 폭행한 사건이 누구의 사주였는지 답변 바란다’는 내용으로 시위를 했다.

 

​하나님의교회 측이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지만, 수원지방법원은 지난 2015년 11월, “하나님의 교회 신도 4명은 위 교회에 같이 다닌 피해자 이OO이 약 1년 전 교리문제로 위 교회를 나간 후 주변에 이를 비방하고 다니는데 격분하여 피해자 이OO 집에 들어가 이OO의 손목과 다리 및 가슴을 묶고 폭행하여 상해를 입게 하였고, 이OO의 아들인 피해자 이△△(4세)의 손목을 묶고 청테이프로 입을 막는 등 폭행하여 이들을 감금하였다는 범죄사실로 유죄판결(대구지방법원 2000고단2426)을 선고받았고, 그 무렵 대구 MBC 방송국은 하나님의 교회 교인들이 탈퇴한 교인들을 찾아가 폭행을 저지른 사건이 6건에 이른다는 내용의 뉴스를 방송하였다”라고 판시하며 하피모 회원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사건은 대법원에까지 올랐지만 기각되었다.

조믿음 기자 jogogo@hanmail.net

신천지, HWPL 앞세운 걷기 행사

평화행사와 외국인 포교는 교리변개에 따른 신도 단속용


신천지 위장단체 HWPL(Heavenly Culture World Peace Restoration of Light, 하늘문화세계평화광복 대표 이만희)이 5월 25일, 전 세계 주요 도시에서 평화걷기대회를 개최해 외국인 포교와 신도 단속에 나선다. 한국에서는 서울 송파구 올림픽로 일대에서 진행된다.

▲ 평화걷기대회 홍보 포스터(출처: HWPL 페이스북)

외국인 포교에 집중하는 이유는?

신천지의 위장행사와 외국인 포교는 교리변개에 따른 신도 단속용으로 볼 수 있다. 신천지는 신도 14만 4천이 채워지면 ‘신천지 시대가 열리고 영생한다’라고 신도들을 속여 왔지만, 신도 수는 20만을 목전에 두고 있다.

신천지는 인 맞은 신도 14만 4천이 하늘의 순교한 14만 4천의 영혼을 덧입고 영생한다고 가르쳐왔다. 이때 신천지를 믿지 않던 많은 무리가 신천지로 몰려드는데, 그들이 요한계시록 7장 9절의 흰 옷을 입은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 즉 흰무리다.

▲ 평화걷기대회 홍보 포스터(출처: HWPL 페이스북)

신천지는 ‘흰무리 교리’를 14만 4천이 채워 질 때를 기점으로 변개했다. 2014년을 시작하며 표어로 내세웠던 ‘흰무리 창조’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본래 흰무리는 자연스럽게 ‘몰려드는’ 존재지 ‘창조’해야 하는 존재가 아니다.

하지만 교리를 자연스럽게 창조로 변개하면서, 신도들에게 흰무리 창조법을 가르쳤다. 바로 신천지가 지난 몇 년간 주장해온 ‘종교대통합’이다. 이만희 씨는 신천지를 중심으로 종교를 통합하고 이름을 신천지로 하겠다는 허무맹랑한 주장을 했다. 외국인들을 한국으로 불러 모으는 일에 열중하면서 신도들로 하여금 흰무리가 창조되고 있다는 착각을 심어주었다.

신천지가 최근 몇 년간 진행한 위장행사들은 교리변개에 따른 신도단속용이었다. 이번 걷기대회 역시 흰무리 창조라는 교리의 연장선으로 이해할 수 있다.

조믿음 기자 jogogo@hanmail.net

한국성서대학교 대학원 성경주해 세미나 개최

한국성서대학교 대학원(총장 강우정, 대학원장 김현광)이 6월 12일(월), 목회자를 위한 성경주해 세미나를 개최한다.

‘창세기 주해와 설교’라는 주제로 진행되는 세미나에는, 장세훈 교수(국제신학대학원대)가 ‘창세기의 오석과 정석’, 강규성 교수(성서대학원)가 “창세기 2장 주해와 신학 그리고 적용”, 송태근 목사(삼일교회 담임)가 “하나님의 형통(창 45:1∼5) 주해와 설교”라는 주제로 각각 강의한다.

김현광 대학원장은 “성서대 대학원은 지역교회와 목회자를 섬기는 학교로 계속 발전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성서대는 2017년부터 성경주해 과정(Th.M.)을 신설하는 등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한 성경 재교육에 힘쓰고 있다.

조믿음 기자 jogogo@hanmail.net

하피모, 하나님의교회 김주철 고발

저작권법 위반, 개인정보보호법 위반, 명예훼손 혐의


▲  성남시 분당구 이매동 하나님의교회

하나님의교회피해가족모임(하피모, 공동대표 김용한 외 2명) 공동대표 3인이 저작권법 위반, 개인정보보호법 위반 및 명예훼손 혐의로 김주철 씨(하나님의교회 총회장)를 지난 4월 24일 대검찰청에 고발했다.

저작권법

무단 게재 다수 발견된 책, 신도들에게 판매

하피모는 고발장을 통해 ▲김주철 씨는 하나님의교회 대표 이사직과 멜기세덱 출판사의 대표 이사직을 역임하면서 『확실한 증거』 라는 책자를 발행했다 ▲대한성서공회, 대한기독교서회, 생명의말씀사, 아가페출판사, 나침반출판사, 성서교재간행사 등이 출간한 도서의 일부를 토시 하나 틀리지 않고 2∼8쪽씩 수록해 1995년부터 지금까지 계속 발행했다 ▲신도들을 대상으로 책을 판매했는데, 매년 4만 부씩, 80만 부 이상 판매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 김주철 씨(출처: 하나님의교회 홈페이지)

하피모의 수집자료에 따르면, 『확실한 증거』는 22개 출판사 27권의 책 내용 일부를 재편집 없이 짜깁기했다. 더 큰 문제는 책을 신도들에게 판매했다는 점이다. 하나님의교회 탈퇴자들은 『확실한 증거』가 권당 1∼2만 원 정도의 가격으로 팔렸고, 자신은 물론 신도들이 책을 구매했다고 입을 모은다.

개인정보보호법과 명예훼손

하피모는 개인정보보호법 위반과 명예훼손 혐의로 김주철 씨 외에 두 명의 하나님의교회 당회장을 함께 고발했다. 고발장을 통해 ▲피고발인들은 하피모 회원들의 초상(사진), 이름, 주소, 생년월일 등의 개인정보를 무단으로 수집했다 ▲(수집된 정보를) 신도들, 일반인, 경찰 공무원, 「법무경찰신문」에 제공해 대대적으로 유포했다고 밝혔다.

해당 사건은 지난 2015년 한 차례 불기소처분된 바 있다. 하피모는 수사가 정확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입장이다. 하피모 관계자에 따르면 당시 수사를 맡은 검사는 (하나님의교회)성도등록증을 보고 하피모 회원들의 개인정보를 알게 되었다는 하나님의교회 측의 말을 믿어주었다. 하지만 하나님의교회 신도인 적이 없었던 피해자들의 정보가 수집되었고, 탈퇴자들의 개인정보는 성도등록증의 정보와 일치하지 않았다. 또한 하나님의교회가 작성한 개인 정보를 담은 문건의 내용은 성도등록증에도 없는 내용이다.

관계자는 “인터넷 카페에 피해자들의 개인정보가 있다는 하나님의교회 측의 주장을 검사가 받아들였지만, 하피모 카페에는 그런 정보가 전혀 없다”라며 “하나님의교회가 수집한 개인정보들이 (이니셜 처리는 했지만) 「법무경찰신문」을 통해 그대로 보도되었다. 수집된 개인정보가 유출되었다는 명백한 증거 아니냐”라고 반문했다.

한편, 하피모는 하나님의교회의 반사회성과 교리적 이단성을 널리 알려, 피해를 막기 위한 공익적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일인시위, 집회, 교리 반박 등 온·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조믿음 기자 jogogo@hanmail.net

십계명을 어떻게 10개로 나눌까?

손재익 목사의 십계명 바르게 이해하기(3)


10개의 명령, 10개의 말씀, 어떻게 나눌까?

십계명 혹은 언약의 10가지 말씀이라는 표현에 의하면 십계명은 10개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10개로 나눌까요? 이런 질문이 낯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찬송가 뒤편에 나오는 대로 10개로 나누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분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제1계명은 당연히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라고 생각하고, 제6계명은 당연히 “살인하지 말라”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 손재익 목사

하지만, 한번 생각해 봅시다. 성경에는 어떻게 10개로 나누라는 말이 없습니다. 성경은 어떤 것이 제2계명인지, 어떤 것이 제5계명인지를 말한 적이 없습니다. 출애굽기 20장 13절에는 “제6계명”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구약성경을 경전(經典)으로 받아들이는 유대교와 로마가톨릭, 개신교는 10개를 각각 다른 방식으로 나눕니다.

유대교의 구분방식

유대교는 십계명의 머리말에 해당하는 출애굽기 20장 2절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를 제1계명에 포함시키고, 출애굽기 20장 3∼6절을 제2계명으로 삼습니다. 제3계명부터는 개신교의 구분방식과 같습니다.

로마가톨릭의 구분방식

로마가톨릭은 출애굽기 20장 4∼6절은 빼고, 출애굽기 20장 7절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를 제2계명으로 봅니다. 그리고는 10개라는 숫자를 맞추기 위해서 출애굽기 20장 17절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를 제9계명과 제10계명으로 나눕니다. 로마가톨릭은 자신들이 분류한 제9계명은 육체의 탐욕, 제10계명은 재물의 탐욕에 대한 계명이라고 가르칩니다.

▲ 로마가톨릭 십계명

개신교의 구분방식

개신교는 어떻게 구분합니까? 출애굽기 20장 2절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를 십계명의 머리말로 봅니다. 그리고 출애굽기 20장 3절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를 제1계명으로 봅니다. 출애굽기 20장 17절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를 하나의 계명인 제10계명으로 봅니다.

어떤 구분이 옳을까?

위의 구분 방식 중에서 어떤 구분 방식이 옳을까요? 성경이 명시적으로 “이것은 제1계명이다. 이것은 제4계명이다”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성과 상식으로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유대교처럼 출애굽기 20장 2절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를 하나의 명령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이 부분은 십계명의 머리말이라고 보아야지, 계명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로마가톨릭처럼 출애굽기 20장 17절을 2개의 명령으로 나누는 것 역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출애굽기 20장 17절은 “~하지 말라”(You shall not~)는 말이 한 번만 나오기 때문입니다. 또한 로마서 7장 7절은 “탐내지 말라”를 율법의 한 부분으로 언급하고, 로마서 13장 9절에도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라고 제7, 6, 8계명을 언급하면서 제10계명을 하나의 계명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출애굽기 20장 17절을 둘로 나누는 로마가톨릭의 구분 방식은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사실 로마가톨릭이 제10계명을 둘로 나눈 것은 제1계명과 제2계명의 차이를 희미하게 하고자 한 목적 외에 없습니다. 그들은 제2계명 “하나님을 형상화 하지 말라”는 것을 지키지 않고 다양한 성상을 만들기 때문에 제2계명을 아예 빼 버렸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성경이 명시적으로 “이것은 제1계명이다. 이것은 제4계명이다”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개신교회가 구분하는 방식,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찬송가의 뒷면에 실려 있는 구분방식이 가장 바람직합니다.

편집자 주: 필자 손재익 목사는 한길교회(http://cafe.daum.net/hgpch)를 담임하고 있다. 저서로 『십계명, 언약의 10가지 말씀』(디다스코)이 있다.

손재익 목사 bareunmedia@gmail.com

밧세바가 다윗을 유혹했을까?

장상태 목사의 성경 오해 풀고 읽기(3)


밧세바는 다윗을 유혹한 음녀일까? 강해설교로 유명한 어떤 목사님은 밧세바를 다윗을 넘어뜨린 여자로 말씀했다. 다윗은 문제없이 믿음 가운데 지내고 있는데, 밧세바라는 여인이 갑자기 등장해서 다윗을 넘어뜨렸다고 설교했다. 사무엘하 11장에 나오는 다윗의 범죄사건을 검색하면 상당히 많은 설교자들이 이런 해석을 하고 있다. 과연 맞는 해석일까? 이런 해석은 어디서 시작이 되었고, 본문은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살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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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상태 목사

먼저, 밧세바가 다윗을 유혹했다는 견해가 많이 알려진 계기가 있다. 중세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미술작품들은 밧세바를 음녀로 그리고 있다. 16세기 얀 마시스, 17세기 회화의 아버지 루벤스, 19세기 상징주의 화가 구스타프 모로와 같은 유명한 화가들은 모두 밧세바를 유혹하는 여인으로 묘사했다. 미술작품에서 이런 역사는 중세시대 여성관에서 시작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중세시대 결혼한 여성은 남성의 불륜에 원인 제공자로 인식되었다. 특히 중세 교부들은 여성을 “하수구 위에 세워진 사원“, “아이를 만드는 기계“, “악마의 소굴“로 이해했다. 이런 문화사적이 배경이 밧세바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에 일조를 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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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에 대한 선입견으로 성경을 보면, 본문이 보여주는 의미를 왜곡하게 된다. 성경의 본래 의미는, 선입견을 벗고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내용을 자세히 읽어야 알 수 있다. 본문에서는 다윗과 밧세바의 문제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을까?

먼저 1절을 살펴보자. “그 해가 돌아와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매”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 당시에 이스라엘 주변 팔레스틴은 봄과 가을에 주로 전쟁을 많이 했다. 겨울에 비가 많이 오고 봄이 되면 비가 그친다. 비가 그치면, 도로 사정이 좋아서 전쟁할 수 있는 기본적인 환경이 만들어진다. 이때, 1절 하반 절에서 다윗은 요압과 모든 군대를 랍바로 보냈고 다윗만 홀로 다윗성에 남았다. 그런데, 다윗은 랍바성으로 가야 했다. 왜냐하면, 12장 26∼28절 에서 요압이 다윗에게 랍바로 내려오라고 전령을 보내서 요청한다. 다윗은 전쟁 현장에 있어야 했다. 왕으로서 당연한 직무였다. 그래서 밧세바를 범하기 전까지 사무엘하 10장까지는 다윗이 직접 출정해서 전쟁을 치렀다. 10장 18∼19절에서는 아람 군대를 직접 쳐서 죽였다.

구약시대 전쟁은 단순히 힘의 대결이 아니다. 일반 역사에서 보는 단순한 영토 확장이 아니다. 구약시대 전쟁은 언제나 하나님의 통치와 관련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왕을 대리자로서 통치하시는 역사를 보여주시는데, 그중에 하나가 전쟁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을 군대와 관련된 만군의 여호와로 부르기도 한다. 모든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왕은 하나님의 지혜와 힘을 의지해야 한다. 그러나 다윗은 11장을 시작하면서, 전쟁과 관련해서 이전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 준다. 마치 힘든 일은 아랫사람에게 맡기고 나는 좀 즐기고 싶다는 뉘앙스를 풍기며, 나태하고 게으른 모습을 보여 준다.

이런 자세는 2절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저녁때에 다윗이 그의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옥상에서 거닐다가” 다윗이 저녁때에 침상에서 일어났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낮에 잠을 자고 있었다는 뜻이다. 모든 이스라엘 군대가 전쟁터에 나가서 고생하고 있을 때, 왕이 낮잠을 자고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암시할까? 다윗이 얼마나 안일한지 1절과 대비하며 극적으로 드러낸다.

성경은 한 사건이나 인물의 태도를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같은 다른 장면을 대비시키며 보여 준다. “성경 오해 풀고 읽기 1편”에서도 누가복음 5장 1절과 2절은 매우 다른 두 장면을 보여 준다. 무리가 옹위하며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장면과 베드로가 배에서 나와 그물을 씻는 장면을 대비시키며, 이미 예수님을 알고 있던 베드로가 왜 말씀을 듣는 무리 속에 있지 않은지 독자들에게 의문을 던지게 한다.

11장도 비슷하다. 왜 다윗은 모든 이스라엘 군대가 고생하고 있을 때, 낮잠을 자고 있었을까? 아끼는 부하와 이스라엘 군대가 목숨을 걸고 거룩한 전쟁에 임하고 있는데, 이것을 아는 왕이라면 최소한 엎드려 기도하는 장면이나 제사라도 드리는 장면이 기록되어야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왕으로서 최소한의 체면이라도 세울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이미 1절과 2절은 다윗의 범죄를 예고하고 있다. 왕이 중요한 임무를 부하에게 모두 맡긴 채, 낮잠을 자다가 늦게 깨자, 인간의 타락한 죄성이 꿈틀대기 시작한다.

이제 다윗은 옥상을 거닐다가 아름다운 여성이 목욕하는 장면을 발견한다. 고대사회에서 성안에 주택구조는 매우 조밀했고 인구밀도가 상당히 높았다. 다윗성과 가옥구조를 감안할 때, 매우 가까운 거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밧세바가 저녁쯤에 목욕을 했다는 사실은 4절을 근거로 볼 때, 부정을 씻고 새롭게 하루를 시작하는 의식으로 볼 수 있다. 밧세바가 부정을 씻는 의식을 일부러 잘 보이는 옥상에서 했는지, 집안에서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또한, 의도적인 유혹인지도 전혀 힌트를 주지 않는다. 밧세바는 평범하게 부정을 씻는 의식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 외에 어떤 유혹에 대한 단서를 제공하지 않는다.

어떤 설교에서는 ‘밧세바가 왜 다윗의 동침 요구에 저항하지 않았는가’라고 묻기도 한다. 이 문제는 3절에 나오는 가족 관계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밧세바의 아버지는 엘리암이다. 엘리암은 다윗의 용맹한 군사 30명 중에 한 사람이다. 할아버지 아히도벨은 다윗의 전략가였다. 그녀의 가족은 모두 다윗의 신하들이었다. 다윗은 모르는 어떤 이스라엘 사람보다 훨씬 더 왕으로서 요구를 제시하기 쉬웠고, 밧세바는 신하의 가족으로서 명령에 순종할 수밖에 없는 위계 관계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다윗은 3절에서 먼저 치밀하게 인적사항을 확인한 후, 4절에서 전령을 보내 밧세바를 데려오게 했다. 미술역사에서 루벤스나 렘브란트가 이 장면을 묘사할 때, 전령이 밧세바에게 편지를 보내고, 편지를 받은 밧세바가 생각을 하는 장면으로 그리고 있지만, 성경 본문은 이를 지지하지 않는다. 예술적 상상력이 만들어낸 허구일 뿐이다. 다윗은 위계 관계를 이용해서, 밧세바를 불러 자신의 성적 욕구를 푸는 악한 짓을 했다. 지금의 법적 용어로 말하자면, 위계에 따른 성범죄라고 할 수 있다.

왜 다윗은 이렇게 무너졌을까? 성경은 정확하게 말하고 있지 않지만, 위 해석을 근거로 볼 때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기름 부음 받은 왕이 하나님께서 맡겨 준 임무와 사명을 잊어버리고, 육신의 즐거움에 탐닉할 때, 타락한 본성은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어떤 훌륭한 신앙인이라도, 타락한 본성이 어떤 선을 행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이다. 성경 인물을 신앙의 모델로 삼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신앙을 가진 인간이 신앙의 모델이 될 수 없다. 신앙인 자체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죄인인 인간을 통해서 하나님은 어떻게 구속의 역사를 이끌어 우리를 은혜로 이끄시는지 주목해야 한다. 아무리 신앙과 믿음이 좋아도, 그 사람의 공로가 아니라, 믿음을 고백하게 하시는 하나님, 죄의 비참함 가운데 도무지 어떤 선도 행할 수 없는 자를, 어떻게 함께 하셔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고야 마시는지 우리는 항상 기억해야 한다.

사무엘하 11장 1∼5절

1 그 해가 돌아와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매 다윗이 요압과 그에게 있는 그의 부하들과 온 이스라엘 군대를 보내니 그들이 암몬 자손을 멸하고 랍바를 에워쌌고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더라

2 저녁 때에 다윗이 그의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옥상에서 거닐다가 그 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지라

3 다윗이 사람을 보내 그 여인을 알아보게 하였더니 그가 아뢰되 그는 엘리암의 딸이요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아니니이까 하니

4 다윗이 전령을 보내어 그 여자를 자기에게로 데려오게 하고 그 여자가 그 부정함을 깨끗하게 하였으므로 더불어 동침하매 그 여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5 그 여인이 임신하매 사람을 보내 다윗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임신하였나이다 하니라

편집자 주: 필자 장상태 목사는 좋은우리교회를 담임하고, 튤립성경연구 섬김이, 디다스코 출판사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장상태 목사 jangsst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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