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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교수의 강연이 기독교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공감과 의문

울산대 교수로서 스스로 대광고등학교 강제채플 문제의 부당성을 제기하였던 종자연에 속했던그리고 군승으로 살아온 자신의 과거를 드러내면서 기독교에 귀의하여 불교적 세계관을 딛고 섰으며 또한 종자연에서 추구했던 그런 세속적 가치관을 벗어 내던지고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갈아입었다는 주장과 함께 한국교회 젊은이들에게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는혹은 <<엘정책연구원>>을 개원하고 그 영향력을 구체화하려고 하는 이정훈 교수의 강연을어떤 분의 신중한 문제의식과 함께 꼭 듣고 의견을 제시해 줄 것을 권유받은 후로일련의 동영상을 통하여 듣고 공감과 의문이라는 두 다른 문제의식을 갖게 되었다(https://www.youtube.com/watch?v=X9ooXuAvrOY).  

▲유태화 교수(백석대학교
신학대학원 조직신학)

우선그가 주장하는 기독교적인 가치 주장에 대하여는 개종한 뒤 매우 짧은 시간에 상당히 포괄적이고 체계적인 기독교 이해에 도달한 것으로 파악되며 조심스럽지만 비교적 긍정적인 마음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특별히 프로테스탄트교회의 후예로서 칼빈주의와 신칼빈주의의 신학에 대한 이해를 표준적인 가치로 삼고 기독교세계관적인 논의를 전개하는 것에 대하여는 영육이원론적인 경향이 배태되어 있는 한국교회의 전망에서 볼 때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특별히 칼빈의 자연법 사상의 진수를 잘 파악하고그리고 율법의 제3의 용도와 자연법 사이의 연관성을 조심스럽게 끌어안으면서 기독교인의 동성애에 대한 입장혹은 마르크스와 레닌적 사상체계에 대한 분석적이고 비판적인 입장을 전개하고더 나아가서 그리스도인인 어떻게 자연법 사상을 기반으로 비그리스도인과 이런 문제에 대한 공감을 이끌어내고 협력을 도모해 갈 것인가를 논의하는 대목에서는 그의 신학적 통찰에 숙연해지기까지 하였다.

다음으로그가 주장하는 마르크시스트적인 사회혁명 이론의 근간을 찾아서 맥락을 따라 그 이해의 연원과 특징을 매우 포괄적이면서도 세세한 관찰과 함께 정리하고 이해하도록 돕는 지점도 흥미롭고 또한 매우 설득력이 있다고 여겨졌다이런 점에서 그의 법철학 혹은 법 사상사를 전공한 학자로서의 특징이 잘 반영된 전문적인 길 안내자로서의 역할을 그가 잘 수행한다고 생각된다특별히 사회계층적인 전복을 꾀하는그 결과로서 기득권세력을 죄악시 하는 진영논리를 만들어 권위와 전통적 가치에 대한 기반을 해체하는 그들의 전략 전술이 결과적으로 미칠 수 있는 파괴적인 양상을 소련과 중공의 혁명과정을 통하여 세세하게 설명하는 지점은 역사적이고 학문적인 충실한 이론을 배경으로 제안된다고 생각되어이러한 관찰에 대하여는 공감을 하게 된다.

마지막으로바로 앞에서 제언한 이런 이해의 맥락을 현재 한국사회에 적용하는 과정에서 현재 한국의 권력집단이 마르크시스적인 사회혁명 혹은 전복을 꾀하려고 한다는 혐의를 제기하는데이에 대하여는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더욱이 이런 분석을 넘어서서 현 권력집단이 마오쩌뚱의 정치적 선동을 빌려와 청년세대를 자기의 진영으로 끌어들여기득권세력의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세력 기반을 무력화시키고권위를 훼손하여 부모나 학교 교사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꼰대로 돌리고공산주의자들의 선동에서 보듯이 성을 기능화 시켜서 양성평등을 넘어 동성애를 고착화시킴으로써 사회질서의 근간을 교란하는 방식으로 인간의 삶을 유물론적인 세계관 아래 가두려는 시도를 전개하고 있다는 것이다기독교인 청년들의 집회에서는 이러한 정책의 끝은 교회를 해제하는 것인데그런 조짐이 읽힌다며 교회여 일어나라고 선동을 하는 수준의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특별히 이 마지막 문단에서 전개하는 그의 논점은 두 가지 점에서 시의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된다첫째로현 권력집단이 과연 마르크시스적인 공산혁명을 꾀하고 있는가에 대한 진정성 여부에 의심이 간다는 것이다천민적 자본주의에 근거한 민주주의를 추구해온 대한민국이 거의 물신적인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자본에 근거한 갑질을 일삼고 있는 시점에서개인의 사회적 기회의 평등이나 과정의 공정성이나 결과의 정의로움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에로의 선회를 꾀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사회의 진보 과정이 아닌가 싶은 마음이 들고현재의 권력집단은 어느 정도로 올바르게 그 길을 걷고 있는가에 대하여 일어나는 회의적인 의심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런 길을 향하여 걸음을 내딛고 있지 않은가 싶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운동을 이끄는 인물 가운데서 상당수가 과거 사회주의 관련 서적을 읽고 그런 운동에 전념했던 인물인 것은 어느 정도 감안할 여지가 없지 않으나그들이 이미 역사적인 반성을 거치고 있는 낡은 마르크스레닌마오이즘식의 사회혁명체제로의 회귀를 꾀한다고 판단하는 것은 매우 시대착오적인 발상이요 역사해석이라고 아니할 수 없기 때문이다물론 이들이 내세우고 있는 역사바로세우기의 과정에서 이승만을 넘어서는 역사적 정통성에로의 몰두는 뚜렷하게 관찰되지만이것이 공화적 민주주주의의 길을 포기했다는 사실로 읽히기보다는 권위주의적인 체질을 합리적인 시스템을 구축함으로써 억제하고 보다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에로의 진보를 꾀하려는 것으로 읽고 해석하는 것이 좋을듯하기 때문이다.  

▲이정훈 교수(출처: 엘정책연구원)

둘째로이런 이해를 한국교회와 연관시키면서대한민국의 정체성을 기독교적인 관점으로 기획한 인물이 바로 이승만이며이승만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을 실현한 진정한 자유민주주의에 기반한 대한민국을 국제사회에 알린 인물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면서기독교인은 바로 이러한 역사적 관점을 공유하고미래의 기독교 대한민국을 세워가야 한다고따라서 좌파에 기울어진 현 권력집단에 대하여는 분기탱천하여 반대해야 한다고 젊은이를 일깨우는 강연을 하는 것에 대하여는 실로 걱정스러운 마음이 일지 않을 수 없다한편으로그의 이런 평가가 어떤 면에서 일리가 있다고 생각되는 지점도 없지 않으나다른 한편으로 지금의 변화된 역사적 시점에서 볼 때는 대한민국의 건국 연대를 1919년 3월로 잡고남북한의 통일을 기대하는 미래지향적인 한반도 정책을 추구하는 것이 기독교인이 추구해야 할 중요한 가치가 아닐까 싶은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적어도 좌파에 경도된 현 권력집단이 추구하는 바가 기득권세력 7000만 명을 희생시킨 마오쩌뚱의 홍위병혁명과 연결된다는 그의 주장이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이라면그리고 천민자본주의적 민주주위에서 평등과 공정과 정의를 추구하는 사회민주주의에로 선회하는 것이 공화제를 포기하지 않는 길을 찾는 과정이라는 것이 더 적절한 역사 이해라면기독교는 역사를 보는 눈을 바꾸어 이승만의 공헌과 동시에 그가 살았던 불행한 전쟁 상황에서 벗어나 한반도의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기 위한 가능한 길을 적극적으로 찾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변화하는 세대를 보면서또한 68혁명이후 갈라진 백성의 상태를 깊이 인식하면서 불란서에서 이는 대안 찾기의 움직임을 보면서 보다 유연한 세계관을 가지고 공존을 꾀하며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이 서로 대화할 수 있는 분위기를 찾아나서는 것이 기독교적인 삶의 본질을 살려 가는데 더 유익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무엇보다도 기독교는 어떤 의미에서 보면 특정한 어떤 정파적 이해나 혹은 어떤 특정한 사회체제 이해와 자신을 동일시 할 수 없는 공동체가 아니겠는가 싶은 것이다체제나 혹은 이념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서 복음이 재생산하는 질서를 구현하기 위하여 애쓸 수 있는 귀한 자리를 선점하고 살아가는 것이 기독교이기 때문이다사실 어떤 체제하에서도 기독교는 복음을 따라서 자신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야 할 그런 진리의 종교이기 때문이다막스 베버를 통하여자본에 기반한 삶의 부조리한 측면을 다시 새롭게 발견하고 배웠던 서구 기독교가 사회적 평등을 지향하는 수정된 자본주의의 길을 찾은 것도그리고 그런 기반 위에서 삶을 다시 새롭게 체계화할 수 있었던 것도그리하여 네덜란드나 독일이나 스위스 같은 사회가 형성된 것도변화화는 시대를 살아가는 대한민국의 기독교가 관심을 기울여 보아야 할 중요한 삶의 미래적 차원이기 때문이다적어도 이 시대를 살아가는 기독교인의 반성적 사고 가운데 이런 차원이 결여된다는 것은 매우 비극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개인이 하나님 앞에 서는 것과 공동체적인 책무를 다하며 공공의 선을 추구하는 기독교적 공동체가 형성되는 것 사이의 불연속성을 상정하고 후자를 마르크스주의와 동일시하는 이정훈 교수의 주장은 매우 편협한 진영논리에 포로된 것임을 드러내는 하나의 예일 뿐이다역으로 어쩌면 마르크스주의자가 그런 공동체를 사도행전 2장에서 보고 배웠을 수 있기 때문이다혹여 좌파가 공산주의이고 우파가 자본주의라면기독교는 좌도 우도 아닌 공동체라고 말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전자를 무신론으로후자를 유신론의 진영으로 단순하게 가르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거나 혹은 지나가고 있기 때문이다더 나아가서 무신론만큼이나 맘모니즘도 위험하기는 매 한가지이기 때문이다기독교는 이 둘 사이의 근원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둘 모두 봉착할 수 있는 위기가 무엇인지를 깊이 비판적으로 숙고하며 자신의 미래적 삶을 기획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한국사회의 시민민주항쟁이라고 할 수 있는 1987년 6월의 정신을 계승한다고 자처하는 세력이 민주당이고정치적 자유와 시민적 평등사회의 길을 도모하는 일에 마음을 내준 것이 당시의 백성들이었다고 본다면그런 정신을 따라서 평등과 공정과 정의의 가치를 내걸고 그것을 삶의 매우 중요한 출발점으로 인식하는 오늘의 2030세대가 그런 정신을 대체계승했다고 생각된다그러면 1987년 당시 거리를 메웠던 그들이 오늘의 집권세력이 된 지금 그 정신을 제대로 읽고 정치적으로 대처했는지아니면 정치집단으로서 자신의 권력을 다지는 기회로 삼았는지의 분수령이 사실은 조국사태를 가로지르는 정신이라고 보고민주당은 이미 그러한 정신을 거스르며 자신을 권력화 하는 길로 접어들지 않았는가 싶다. “조국사태는 조국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1987년의 시대정신을 허무는 기재로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깊이 헤아려야 할 것이다개혁을 주체적으로 내세웠던 자들에게서 그 외침이 어떻게 구현되었는지를 비판적으로 숙고하지 않는 정치세력은 스스로를 해체하는 길에 접어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사실 어느 정치세력도 자신의 정체성을 기독교가 제안하는 그런 신적인 공동체와는 동일시될 수 없는 것이 자명하다만일 이러한 길이 가능했다면천국의 도래를 왜 최종적인 희망으로 상정했겠는가사도 바울이 언급했던 이 세대의 정신이 어떤 옷을 입고 나타나더라도 그것은 그 자체로 부단히 극복되어야만 하는 역사적 발전과정의 일환일 뿐하나님 나라와 동일시될 수는 없는 것이다이런 점에서 특정한 체제를 지원하거나 혹은 역사 내의 어떤 한정된 단체를 후원하는 것으로 환원되는 기독교적 선택은 그 자체로 위험천만한 일이다오히려 이정훈 교수가 언급하는 자연법사상의 토대를 신중하게 고려하여 분열된 삶의 통합을 꾀하는 칼빈주의나 신칼빈주의가 대안일 수 있거나 혹은 대안적 삶을 찾아가는 중요한 전거가 될 수 있다고 본다그런 점에서는 이정훈 교수가 한국의 프로테스탄트교회를 위한 좋은 방향을 선점했다고 보고이 방향을 향하여 좀 더 집중된 논의와 제안을 위한 시간을 갖고 학문적 공을 들이기를그리고 그런 열매와 함께 기독교 대중 앞에 나서기를 바라는 것이다.  

 

유태화 교수 bareunmedia@naver.com

사도 바울의 창조 신학(4)

편집자 주조덕영 박사의 사도 바울의 창조 신학 글을 4회에 거쳐 연재합니다조덕영 박사는 조신학연구소 소장창조론 오픈 포럼 공동대표평택대 신학부 겸임교수로 사역하고 있다.

창조 신앙을 복음으로 연결하는 바울

파이네(P. Feine)가 바울의 복음이 그리스도 중심적”(christozentrisch)으로 바울이 자신만의 고유한 하나님 표상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고 본 것은 바울이 어떠한 인물이었는지를 바라보는 신학자들의 일반적 정서를 바르게 표현한 말이다사도 바울은 어떤 사도보다 구약성서의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넘어 초대 기독교의 인식에 대한 새로운 신 이해를 심어준 인물이었다그렇다면 이 바울의 모호한 하나님 표상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조덕영 박사

참된 창조와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다고 거짓 것들을 비판만 하고 있을 바울은 아니었다바울은 우리가 한 하나님 곧 만물을 창조하신 아버지가 계실 뿐 아니라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그분이 바로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요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다고 했다(고전8:6). 바울의 하나님 표상”(신론)이 창조주 예수 그리스도로 확장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비록 바울이 조직신학자는 아니었으나 히브리적 창조창조주창조 신앙에 그치지 않고 바울은 당연하게 기독론적 접근으로 나아갔다바울이 원하는 것은 창조와 창조주 신앙에 그치지 않고 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며 그분의 고난에 참여하고 그분의 죽음을 본받아 부활의 영광에 이르는 것이었다.

이것은 다이스만이 말한 대로 하나님의 새로운 가르침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입장을 발견한 것이었다즉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의 창조 신앙을 창조주 성육신과 십자가와 부활의 신앙과 신학으로 연결하여 기독교 구속 신학을 완성하고 있다.

누가는 사도행전 17장에 나오는 바울의 아레오바고 연설에서 바울이 아테네 시민들에게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겨놓은 제단을 소개하면서 이곳에 있던 헬라의 신 이해를 통해 복음을 어떤 방식으로 전하려 하였는지를 소개하고 있다바울은 아테네 사람들에게 종교성이 많다는 덕담 비슷한 언급을 하면서 복음을 소개하고 있다사실 이 도시는 우상이 가득한 도시였다(17:16). 바울은 아테네의 이런 풍경을 보고 격분하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정적인 바울은 마음을 가다듬고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다회당의 유대인 및 경건한 이방인들과 토론하고 장터로 나가 날마다 거기 모이는 사람들과 토론하였다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철학자들과도 논쟁하였다. “외국 신들을 선전하는 것 같다는 이들에게 바울은 한 사람에게서 모든 민족을 만들고 온 땅 위에 살게 하신 창조주 하나님은 각 나라의 연대를 미리 정하시고 그들의 국경을 정하셨으며 이제는 죽음에서 부활하여 죽음을 이기신 그리스도를 통해 회개하고 영원히 사는 영생의 복음을 전하였다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말에 어떤 사람들은 비웃었고 또 더 듣고 싶다는 사람들도 있었다(17:32).

이 부분에 대해 주석은 바울의 선교 전략이 실패했다고 보는 측과 성공적이었다고 보는 견해로 나누어져 있다슈바이처는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바울의 사상이 여기서는 하나님 안에” 있다는 이교 사상으로 대치되었다고 말한다이 연설이 복음이 아니라 헬라 시인들과 사상가들을 전거로 삼아 하나님에 대한 참 된 지식을 확증하려 했다는 점에서 2세기 변증론자들의 합리주의를 보여준다고 말하는 학자도 있다콘젤만이 주장한 것처럼 정말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이방인에게 미련한 것으로 알려졌기에 교묘히 그것을 회피하려고 한 것이었을까?

과연 바울의 선교 전략은 실패한 것이었을까수많은 사람들이 공산권북한이슬람 등 창의적 선교지역에 복음을 전하고 있다하지만 복음의 양적 열매는 가시적으로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그렇다고 그들의 선교 전략이 실패한 것일까바울이 전한 복음에 아테네의 몇 사람들은 복음에 반응하고 바울을 따르고 믿었다그중에는 놀랍게도 아레오바고의 법관 디오누시오(Dionysius)와 다마리(Damaris)라는 여자와 그 밖에 몇 사람이 있었다결코 복음은 좌절되지 않았다하나님께서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신 이유 가운데는 바리새인 출신 바울의 확고한 유대적 창조 신앙이 뿌리박혀 있었음을 선교 방식의 지혜 속에서 확인이 되는 것이다.

바울이 유대인들을 접촉할 경우에는 그들에게 일부러 창조 신앙을 역설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하지만 이방인들은 다르다선교 전략상 그들에게는 먼저 창조주 하나님 선포를 통해 그리스도 복음을 전파할 필요가 있었다신 자체를 부정하는 공산주의자들에게도 이 전략은 동일하다이방인의 사도인 바울에게 있어 그리스도 복음을 전하기 위한 기초 선결 지식으로서의 창조 신앙 선포는 선교 전략 상 이렇게 중요한 것이었다.

바울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그리스도의 의와 십자가의 도를 강조한 로마서의 저자다로마서는 그리스도인을 대상으로 한 서신이요 아레오바고 연설은 이방인을 대상으로 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브루스는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으로 복음을 전하고자 했던 바울의 선교적 지혜로서 이것을 복음적(evangelium)이라기보다는 복음의 예비(Praeparatio)적 성격을 띠는 연설로 보아야 한다고 역설한다사도 바울은 복음의 신출내기가 아니었다복음의 본질(텍스트)와 상황(컨텍스트)를 구별 못할 만큼의 미숙한 전도자는 전혀 아니었던 것이다.

예수에게 있어서도 이 같은 유비는 설득의 도구였다예수는 창조계식자연계시를 구속 계시의 접촉점으로 부단히 사용하셨다예수의 자연계시는 단순한 자연계시와 자연 신학에 그치지 않고 구속 계시로 연결하는 복음 사역의 예비적 과정이었다예수의 창조주 자연계시는 이신론(理神論)에 머무르지 않고 복음적 창조주 하나님 계시로 나아간다.

골로새서에서 사도 바울은 예수를 창조주 하나님으로 묘사하면서 영적 존재들도 피조 된 존재들이라고 설명하였다(1:16). 4복음서는 모두 이들 영적 존재들인 사단과 귀신의 존재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신약 성경에 사탄은 32회 가운데 14회 복음서에서 언급되며 귀신은 복음서를 제외한 신약(고전딤전성경에 11회 언급된 가운데 복음서에는 100여 회가 넘는 빈도로 등장하고 있다사도 바울과 달리 예수는 이들 영적 존재의 창조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으나 사탄과 귀신과 같은 영적 존재들이 있음과 더불어 그들도 예수 자신의 통치 아래 있음을 보여준다또한 영적 존재인 사탄과 귀신에 대해 예수는 인격을 가진 그들과 대화한다물론 그들이 예수의 사귐의 대상은 아니었다.

예수에게 사탄은 꾸짖어 쫓아낼 존재요(8:33), 귀신도 악하고 더러워 추방해야 할 존재였다(12:43, 45). 예수는 십자가 죽음과 3일 만에 살아날 것을 예언한 가르침에 대해 예수께 항변하며 이 같은 일이 예수에게 일어나지 않기를 소원하던 제자 베드로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라고 말하며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로 책망하였다또한 사탄은 제자 가룟 유다에게 들어갔다(13:27). 그렇게 복음서의 예수는 인류 타락과 죄와 불순종의 배후에 있는 인간이 그 전모를 파악하기 결코 쉽지 않은 심각한 영적 존재에 대해 자연스럽게 계시하고 있다이것은 마치 자연계시를 통해 의인 욥의 고난의 배후에 있는 사탄의 존재를 계시하신 하나님을 연상케 하는 한다(1-2장 참조). 심지어 하나님은 욥기 41장에서는 사탄이라는 언급을 한마디 하지 않으면서도 리워야단이라는 동물(자연계시)를 통해 모든 높은 자를 내려다보며 모든 교만한 자들에게 군림하는 왕으로서의 사탄에 대해 암묵적 계시를 하고 있다욥이 깨닫고 회개하고 은혜 받고 복 받은 것은 구속 계시가 아닌 놀랍게도 모두 70여 가지에 달하는 속사포 같은 하나님의 자연계시 속에서 이루어졌다교만하고 군림(소위 갑질’)하는 자는 베드로나 가룟 유다처럼 사탄의 도구나 다름없다 할 것이다.

예수를 창조주 하나님으로 인식하는 것은 기독교 신학의 핵심이요 기독론의 중심이다예수의 자연계시가 자연을 초월함 속에서 전개되는 것은 삼위의 제 2위이신 창조주 하나님예수의 모습을 드러낸다초대교회 교부 이레네우스 역시 말씀과 하나님의 영즉 그리스도와 성령을 우주를 창조하는 하나님의 두 손이라고 표현하여 삼위일체적 창조를 언급한다그런데 20 세기 들어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을 비롯한 현대 신학자들은 예수를 구속사(Heilsgeschichte) 내에 묶어두려는 의도적 시도를 통해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애써 숨기려드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들기도 한다하지만 사도 바울도 그리스도가 인간만이 아닌 모든 피조물의 창조주임을 언급한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1:15-17). 예수는 곧 창조주임을 전파하여 자연스럽게 그 예수를 우리의 주()요 구주(救主)로 연결한다(고전8:6). 바로 예수가 전한 그 방식이었다.

 


 

 

나가면서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존재론적 간극(ontological gap)이 엄연한 현실 아래에서 자연계시의 구원적 가치(salvific value)의 문제는 포스트모던 시대를 맞으면서 여전히 그치지 않고 있다전면 부정론과 비관론을 넘어 오히려 논쟁은 더 심화 되는 듯하다포스트모던 신학자 클락 피녹(Clark H. Pinnock)은 일반 계시를 구원적 가치에 적극적으로 연결을 시도하는 인물이다오늘날 일반 계시에 구원의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가톨릭 신학의 공식 입장이다대표적 종교 다원주의자 존 힉(John Hick)은 신적 계시로서의 성경을 포기하고 자연 종교로 돌아가고 있다.

하지만 반 틸(Cornelius Van Til)은 개혁신학의 특징 가운데 일반 계시의 명료성을 말하나타락한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일반 계시로는 누구도 실제적인 하나님을 참된 창조주로 알지 못한다고 주장한다그러므로 성경이 필요함을 역설한다우리 인간은 늘 제한을 가진 도구로 하나님을 이해할 수밖에 없다그것은 하나님의 계시의 불완전이라기보다 분명 인간의 죄성과 그에 따른 교제의 상실 그리고 피조물로서의 인간이 지니는 한계 때문이다인간은 오직 부분을 다룰 수 있을 뿐이다하지만 특수 계시가 적용되는 공간은 여전히 일반 계시의 영역이다이 점을 깨닫는다면 창조된 우주 안에 하나님이 계시(啓示)는 인간의 정신 활동 가운데서 제한적으로 살아날 수 있다.

예수의 자연계시는 두 가지 측면 즉 자신이 곧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시요 동시에 그리스도이심을 드러내는 구속 계시를 향한 연결 고리를 제공하는 길잡이 역할을 한다이신론의 영향 속에서 자연에 의존하는 신학이 계시를 뒷받침하기보다 희생시켜 왔다는 생각이 20 세기 신학을 지배하여 온 것은 분명 사실이다그래서 지난 세기 신학자들이 자연계시의 합리성을 알면서도 자유주의 신학자라거나 무지한 신학자라는 공격을 염려하여 자연 신학이라는 언어의 불충분성 때문에 자연계시의 유용성조차 포기해버리는 경우가 많았다고 볼 수 있다.

알리스터 맥그라스(Alister McGrath)가 자연 신학에 대한 바르트의 극단적인 부정적 견해에 대해 바르트의 비판이 (1) 부적절한 성경적 기초에 기초하며, (2) 바르트 자신이 개혁신학의 전통에 있다는 주장이나 칼빈이 자연 신학에 대해 반대자의 입장에 있었다는 견해는 모두 잘못이요, (3) 자연 신학에 대한 바르트의 부정적 태도는 자연과학에 대한 무관심 때문이라고 비판한 것은 바로 20 세기 주요 신학에 있어 자연계시와 자연 신학을 보는 편견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보여준다.

삼위의 제 2위이신 창조주 하나님예수가 바라보고 언급하고 사역한 공생애를 통한 창조계식(자연계시)는 결국 궁극적 구속 계시로 연결되는 접촉점을 찾는 작업이었다이처럼 사도 바울의 창조 신앙도 결국 체계적으로 의도한 작업은 아니었을지라도 궁극적으로는 개종 이전의 히브리적 창조 신앙을 그리스도에게 연결한다즉 바울은 기독교 신앙을 정립하는 과정 속에서 창조 신앙을 구속 신앙의 완성을 위한 마중물이요기초석으로 삼았다그는 통전적인 기독교 사랑의 실현으로서의 하나님 계시를 구원론적종말론적 구원창조 신앙으로 연결하는조직적이며 선교적인 작업을 통해서 자신의 창조 신앙을 복음을 전혀 몰랐던 이방인들을 향한 자연스러우면서도 필연적인 논리적 도구로 사용하였다고 볼 수 있겠다

조덕영 박사 bareunmedi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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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이단과 사이비의 해외 진출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한국에서 가장 큰 교세를 자랑하며 많은 피해 사례를 양산하는 신천지는 아시아 16개국유럽 9개국오세아니아 2개국아프리카 5개국북아메리카 2개국남아메리카 6개국 등 총 40개국에 진출해 있다.

기쁜소식선교회 박옥수 구원파는 아시아를 넘어 미국오세아니아아프리카에 진출하며 전 세계에 202개의 건물을 세웠다생명의말씀선교회 이요한 구원파는 81개국에 진출해 338개의 센터를 세웠다.

통일교는 공식적으로 195개국에 그들의 선교사를 파송했으며성범죄자가 교주인 JMS에 미혹되는 외국인들이 존재한다.

한국에서 해외로 파송된 선교사님들은 문화나 언어 보다 한국의 이단사이비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현지인에게 제공될 정보가 극히 제한적이라는 점도 대책에 걸림돌이다.

바른미디어(bami.kr, 조믿음 발행인)는 해외에 진출한 한국 이단 사이비에 대한 공신력 있는 정보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이번에 무료 배포되는 PDF 파일은 신천지하나님의교회구원파통일교, JMS에 대한 간략한 정보간단한 이단 사이비 예방법사이비 종교 메커니즘에 대한 내용을 담아 영어중국어일본어로 번역했다.

바른미디어는 이번 일을 시작으로 해외에 배포할 수 있는 다양한 콘텐츠를 제작할 예정이다또한 한국의 이단과 사이비로 인해 발생한 피해 사례 등을 해외 각국 공공 기관에 알리고정체를 모르고 이들과 관계하는 민간단체 등에 전달해 해외 피해자들이 발생하지 않도록 예방하는 일을 진행할 계획이다.

바른미디어 자료 신청https://forms.gle/zA4TmsP718occA8Q6 

 

바른미디어 bareunmedia@naver.com

그루밍과 사이비 종교

그루밍 성범죄 과정, 사이비 종교 포교 과정과 유사


그루밍(grooming)은 불과 5-6년 전까지만 해도 평범하게 사용되거나 혹은 사회상을 반영한 신조어였다마부(groom)가 말을 빗질하고 목욕시켜 깨끗하게 만든다는 데서 유래한 단어로 동물의 털을 손질하거나단장할 때 사용해왔다언젠가부터 자신의 외모에 아낌없이 투자하는 남성들을 지칭하는 그루밍족이라는 말도 탄생했다이 단어가 최근에는 성범죄 관련 용어로 익숙해졌다포털사이트에 그루밍을 검색하면 성범죄 관련 기사나 글이 압도적으로 많이 노출된다.

그루밍 성범죄란 가해자가 피해자로부터 깊은 신뢰 관계를 얻어 심리적으로 종속관계를 만든 다음 성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말한다피해 계층은 어린아이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사랑받고 싶은 욕구가 클수록 그루밍 성범죄에 취약하다피해자들은 자신이 피해자라는 사실을 잘 인지하지 못한다겉만 보면 합의에 의한 관계로 비치기도 해 처벌이 쉽지 않다는 점에서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었다.  


 

그루밍 성범죄의 6단계사이비 종교 포교 과정과 유사

미국의 법정신의학박사인 마이클 웰너는 그루밍 성범죄가 이뤄지는 6단계 개념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1) 대상자 고르기

2) 신뢰 얻기

3) 욕구 충족

4) 고립시키기

5) 성적 관계

6) 회유 및 협박으로 통제

가해자는 대상자부터 찾는다마구잡이로 고르지 않는다기간을 두고 대상자의 정보를 파악한다취약점이 명확하게 눈에 띌수록 좋다이후 대상자에게 접근해 욕구와 결핍을 충족시켜주며 신뢰 관계를 맺는다가해자는 대상자와 둘만 있거나 특별관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상황을 자주 연출해 자신의 통제권에서 벗어날 수 없도록 고립시킨다.

대상자가 가해자를 신뢰하고 깊이 의존하면 서서히 신체 접촉이 시작된다잦은 신체 접촉은 결국 성관계로 이어진다가해자는 이 모든 과정을 피해자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유도한다마치 둘 사이가 연인 관계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기도 한다대상자가 피해 사실을 인지했을 때가해자는 주변에 알리겠다라고 협박하거나회유를 통해 통제하며 관계를 유지한다.

그루밍 성범죄 과정은 사이비 종교의 포교 과정과 매우 유사하다단순한 순서만이 아닌 사람의 심리를 이용하는 지점까지 닮아있다.

대상자 고르기

포교 대상자의 등급을 나누는 일은 사이비 종교 신도들의 포교 과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신도들은 포교 대상자를 A, B, C 등급으로 나눠 포교가 잘 될 것 같은 사람과 잘되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을 구분한다.

포교가 용이한 사람은 누구일까미국의 공신력 있는 기독교 상담기관인 New Life Clinics의 설립자 스티븐 아터번은 잭 펠톤과 함께 저술한 『해로운 신앙』에서 해로운 신앙에 빠지기 취약한 자들이 가지는 공통점을 언급한 바 있다.

엄한 부모 밑에서 자란 자실망 경험이 있는 자자존감이 낮은 자학대 피해자 등이 대표적이다사이비 종교에 빠진 사람 모두가 이런 환경에서 자란다는 뜻은 아니지만 주된 요인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해로운 신앙』에 따르면 엄한 부모 밑에서 자라거나 혹은 학대를 받으며 성장한 자녀는 성인이 되면 자신의 부모와 유사한 성향을 가지는 사람들에게 끌리거나 독재적 성향을 가진 교주에게 쉽게 굴복하는 심리 상태를 가지는 경우가 있다부모의 이혼을 경험했거나 부모로부터 버림받았을 때 발생한 실망 경험은 또다시 버림받을까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이어진다.

두려움과 낮은 자존감을 가진 자들에게 끈끈한 소속감을 제공하며 다가오는 사이비 종교 신도들은 상당히 매력적인 존재다.

 

▲사이비 종교 포교 과정

 

욕구 충족을 통한 신뢰 얻기

신도는 포교 대상자의 필요를 채워주며 신뢰 관계를 쌓는다가족 혹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서 받아야 할 사랑과 돌봄을 받지 못한 사람일수록 사랑을 베풀어주는 것처럼 보이는 사이비 종교 신도의 접근에 쉽게 미혹된다관계는 사이비 종교에 빠지는 여러 가지 이유 중 가장 중요한 원인이다.

좋은 말이 아닌 좋은 사람의 말을 듣는다는 이야기가 있다사이비 종교의 교리를 처음부터 믿는 사람은 없다하지만 깊은 신뢰 관계를 가진 사람이 제시하는 성경 공부 혹은 그에 준하는 모임을 거절하기란 쉽지 않다교리를 전하는 사람이 나에게 매우 좋은 사람으로 인지되어 있다면교리를 믿게 되는 진입장벽이 낮아진다사이비 종교에 빠지는 진입로에서 관계는 교리보다 훨씬 강력하게 작용한다교리가 틀려도 사람이 좋아서 사이비 종교에 남아있겠다는 사람이 발생하는 이유다.

이 때문에 사이비 종교 신도들은 관계 맺기에 매우 공을 들인다짧게는 수개월 길면 일 년이 넘도록 포교 대상자에게 자신의 정체와 접근 목적을 철저하게 감춘다친구연인선후배 등 인간 대 인간이 맺을 수 있는 가용한 모든 방법을 이용해 관계를 맺으며 나는 너에게 절대로 해로운 것을 주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각인시킨다.

포교 과정에서 원초적(?)인 방법을 사용하기도 한다물질이 필요한 사람에게 물질을이성에 취약한 사람에게 성을 포교에 이용하기도 한다포교 대상자는 라는 존재에 관심을 가진다고 착각하지만신도에겐 같은 단체로 끌고 올 하나의 포교 대상일 뿐이다사이비 종교 신도는 결코 그 사람 자체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고립시키기 및 성적 관계

그루밍 성범죄의 네 번째다섯 번째 단계인 고립시키기와 성적 관계는 본격적인 세뇌 성경공부 모임으로 볼 수 있다포교 단계에서 벌어지는 성경공부는 대부분 비밀리에 이뤄진다많은 사이비가 성경공부가 시작되면 사탄의 방해가 시작되니 비밀로 하라라고 강조한다짧게는 수개 월 길게는 일 년까지 집중적으로 세뇌 성경공부 모임을 시킨다성경을 통해 자신들의 교주를 발견하게 만드는 과정이다.

고립을 시키기 위해선 독특한 무언가를 제시해야 한다여기서 사이비 종교의 메커니즘이 설명된다사이비 종교는 신도들에게 특별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들기 위해 희소성 모델(혹은 제로섬 모델)을 제시한다희소성 모델이란 물질(혹은 그 무엇)이 희소하여 모두가 골고루 나눌 수 없다는 전제에서부터 출발한다앤 윌슨 섀프는 『중독사회』에서 희소성 모델을 중독의 특성 중 하나로 꼽기도 했다.

사이비 종교는 대부분 구원(혹은 영생)을 빌미로 희소성 모델을 작동하는 경우가 많다특히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상징 수 144,000을 실제 숫자라고 주장하며사람들로 하여금 144,001등이 되지 않도록 다그친다그때부터 신도에게 144,000 안에 드는 일은 단 한 가지 관심사이자 전 삶을 바쳐서 획득해야 하는 일이 된다신도는 자신의 관심사만 보고 옆을 보지 못하는 터널 비전 현상(편집자 주터널의 출구만 보이고 주변은 어둡게 보이는 현상으로 당장 눈앞의 상황에 집중해 주변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인지하거나 이해하는 능력이 떨어지는 상태)에 빠지게 된다희소성과 터널 비전은 두려움의 전조가 된다. 144,001등이 되면 안 된다는 두려움이 신도의 삶을 짓누른다그럴수록 더욱 깊은 터널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종말을 빌미로 신도들을 통제하는 사이비 종교도 희소성과 터널 비전을 작동한 모델로 볼 수 있다사람은 기본적으로 종말을 두려워한다종말은 개인적 종말과 총체적 종말로 구분할 수 있다개인적 종말은 죽음총체적 종말은 이 세상의 종말이라고 할 수 있겠다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에게 영생을 담보하는 미혹총체적 종말을 두려워하는 이에게 종말의 때와 시를 알고 있는 우리와 함께하면 안전하다는 속삭임은 희소성 모델이다신도를 터널 비전에 빠지게 만드는 수단이기도 하다.

협박과 회유로 통제

대다수 사이비 종교는 신도의 온·오프라인을 통제한다인터넷을 선악과라고 가르쳐 정보를 차단하거나같은 믿음을 공유하지 않는 가족과 갈라지라라고 종용하기도 한다·오프라인을 통제할 때도 역시 구원을 박탈당하지 않으려면이라는 단서를 달아 두려움을 유발한다신도가 단체를 탈퇴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두려움’ 때문이다두려움은 의존을 낳기도 한다두려움을 피하려고 하든해결하려고하든 신도는 자신의 두려움을 해결해 줄 것처럼 보이는 교주의 가르침에 더욱 빠져든다통제를 당하는지 인지하지 못한 채.

사이비 종교 교주의 두려움 유발은 뒤집으면 회유를 위한 수단이 된다구원 박탈을 빌미로 두려움을 유발했다는 것은 반대로 말하면 천국 보장을 빌미로 회유를 했다는 뜻이다회유 보다 두려움 유발이 선행하는 이유는두려움을 해결할 존재는 오직 교주뿐임을 받아들이게 하기 위함이다사람을 지배하기 위해선 그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을 채워줘야 하는데교주는 보상을 독점함으로 신도를 통제한다.

한편사이비 종교에서 탈퇴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느끼는 또 다른 종류의 두려움도 있다가령 사이비 종교에 오랜 시간 몸담은 사람의 경우해당 단체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아도 탈퇴까지 수 만 가지의 생각을 하게 된다자신이 믿고 따랐던 신적인 존재 교주에 대한 배신감자신의 인생을 허비한 허망함이 사회를 살아가기 위한 준비가 전혀 되지 않은 두려움을 겪기도 한다.

탈퇴자들을 향한 시선의 변화 필요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지점이 있다대다수 우리 사회의 구성원은 그루밍 성범죄 피해자들을 향해 분별하지 못한 너의 책임이라고 정죄하지 않는다그루밍의 과정을 이해하고 가해자의 비윤리적이고 부도덕한 행실을 알기 때문이다.

그루밍 성범죄의 단계와 닮아 있는 사이비 종교의 포교 과정을 이해한다면 신도 혹은 탈퇴자들에 대한 시각의 변화를 꾀할 수 있지 않을까? ‘허황된 교리를 왜 믿는지 모르겠다라며 사이비 종교에 빠진 사람에게만 모든 책임을 돌리는 일은 교리적 측면에서만 접근한 잘못된 시선이다교리도 중요하지만 교리를 믿게 되는 과정을 살피는 일도 중요하다.

사람을 빠트리는 이단과 이단에 빠지는 사람이 동시에 연구될 때 더 나은 사이비 종교 대책의 길이 열릴 수 있다.

조믿음 발행인 bareunmedia@naver.com

한국교회 최초의 JMS 교리 비판서 출간

김경천 목사의 『거짓을 이기는 믿음』


기독교복음선교회(이하 JMS)의 교리를 전문으로 분석한 책이 나왔다기독교포털뉴스(발행인 정윤석)가 펴낸 『거짓을 이기는 믿음』(저자 김경천)은 한국 최초의 JMS 교리 비판서다.

책은 한 인간을 신으로 믿게 만드는 첫 단추가 되는 교리인 비유론을 집중적으로 비판하는 동시에 주요 교리에 대한 신학적성경적 비판을 밀도 있게 담았다.

 

▲신국판 / 272 페이지 / 13,000원 / 발행일: 2019년 5월 10일

 

 

한편 김경천 목사는 약 30년간 JMS에 몸담으며 홍보부장교육부장지방개척자교역자부총재지역회장신학장 지내다 2009년 12월 탈퇴했다탈퇴 후 감리교신학대학원(M.Div), 총신대선교대학원(Th.M)을 졸업했다현재 안산 상록교회 이단상담소에서 팀장을 맡고 있다.

김 목사는 JMS 외에도 다양한 이단에 빠진 사람들을 상담해 예수 품으로 돌이키는 사역을 하고 있다특히 네이버 카페 가나안(JMS 떠나 예수 품으로)’의 매니저로 활동하며 JMS에서 탈출한 사람들의 신앙회복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

 

바른미디어 bareunmedia@naver.com

사도 바울의 창조 신학(3)

편집자 주조덕영 박사의 사도 바울의 창조 신학 글을 4회에 거쳐 연재합니다조덕영 박사는 조신학연구소 소장창조론 오픈 포럼 공동대표평택대 신학부 겸임교수로 사역하고 있다.

4. 인간의 의식주 문제(고린도전서 8장을 중심으로)

사도 바울이 인간의 의식주 문제에 대해 심각한 의미를 부여한 적은 없다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을 빼곤 무엇이든지 자신에게 유익하던 것을 그리스도를 위해 모두 해로 여길 뿐 아니라 모든 것을 해로 여기고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처럼 여겼던 사람이기 때문이다그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았다(4:12). 하지만 모든 세상은 그리스도의 세상이요 모든 창조 세상은 그리스도가 지으시고 운행하시는 섭리의 땅이다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케 하는 일이 바울의 사역 속에 기다리고 있었다.   

▲조덕영 박사

 

 

그중 가장 첨예한 문제는 매일 닥치는 섭생에 관한 것이었다모세 율법은 다양한 음식 규례를 다루지 않던가고린도 지역에서 이 문제가 정면으로 발생한다바울은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였을까헬라의 고린도지역은 우상과 잡신과 음란이 넘쳐나는 도시였다시장에 출하되는 육류들 대부분은 온갖 잡신들을 향한 음란한 제사 속에서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들이었다고린도 교인들은 이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들을 먹어도 되는 것인지 바울에게 질문하였다이 문제는 초대교회 심각한 이슈이기도 했다(1514-15). 고린도전서 8장 본문을 통해 이 우상에 바쳐진 제사 음식과 먹거리 전반에 대한 관점을 살펴보자.

(1) 첫째 우상(idol)은 아무 것도 아니다(고전8: 1-7).

당시 고린도 사람들은 우상에 대해 약간의 지식들이 있었다그걸 가지고 서로 고기를 먹어도 되느니 먹으면 안 되느니 논쟁을 벌였다여기에 대해 바울은 다음의 다섯 가지를 지적한다. 1) 지식(여기서 지식은 남보다 별난 신비적 지식 즉 영지주의적 지식을 말함)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든다. 2) 지식보다 덕을 세우는 것이 사랑이다. 3) 지식이 있다고 생각(자랑)하는 자들은 실은 당연히 알만한 것도 잘 모르는 자들이다. 4) 참된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것과 관련된다. 5) 따라서 하나님이 알아주는(인정하는사람이 참 지식을 가진 사람이다.

이 같은 관점에서 볼 때 우상은 사람이 만든 것으로 인간의 길흉화복흥망성쇠생사를 주관하지 못한다따라서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대단하게 여길 필요도겁낼 필요도거리낄 필요도 없다제사 음식이든 우상에게 바쳐졌던 음식이든 먹든 안 먹든 아무런 문제가 없다우리는 창조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아닌가(6). 우상에 바쳐진 고기를 먹느냐 안 먹느냐의 문제는 사실 믿는 이의 논쟁거리가 아닌 것이다오히려 반대로 이방인들이나 따질 문제이다속되고 부정 탄다고 여기는 사람에게나 두려움을 줄 뿐이다.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롬 14:14).

(2) 둘째 식물은 우리를 세우지 못 한다먹거리의 유익은 아주 작은 유익에 불과할 뿐이다(8).

이것을 일반 은총이라 한다즉 믿지 않는 이들도 누릴 수 있는 자연 은총이다물론 인간에게 바른 먹거리의 유익은 분명 있다(단 10). 평범하게 먹든 잘 먹든 작은 유익일 뿐이요 영생을 믿는 신앙의 눈으로 본다면 다만 약간의 유익(수명 연장육체적 건강)이 있을 뿐이다건강하게 살아도 결국 인간은 언젠가 죽게 마련이다(90:10). 세우지 못 한다는 말은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말이다.

본질상잘 먹는 유럽 사람들이나 가난한 아프리카 사람들이나 우상 식물을 먹는 자들이나 먹지 않는 자들이나 식물은 우리의 영적 삶을 세우는 일과 별 관련이 없다음식은 선하지만거룩과 무관하다음식을 먹지 않는다고 해서 더 경건해지는 것은 아니다바리새인들은 정결법과 안식일 규정을 철저히 준수했다하지만그들은 결코 정결하지도안식을 누리지도 못했다경건에 이르는 길을 사도 바울은 말씀과 기도야고보는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고 자신을 지키는 것이라고 했다하나님께서 만드신 것들은 그 자체로 속된 것은 없다다만부정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만 부정할 뿐이다.

(3)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자유함이 믿음 약한 자를 넘어지게 만드는 장애물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하고 절제하라(9-12).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요 우리를 세우는 것도 아니므로 먹든지 안 먹든지 별 문제는 없다하지만 자유 하더라도 절제할 필요가 있다믿음 약한 사람들은 사소한 것에도 믿음이 혼란을 겪기 마련이다형제에게 죄를 지으면 안 되고 형제의 양심을 상하게 해서도 안 된다그런 것들은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과 다르지 않다약한 자를 실족케 함은 아주 큰 죄이다(18:6). 자유하다고 목사가 거리낌 없이 아무 것이나 함부로 먹는 것을 보고 초신자들이 멋대로 따라하면 교회는 질서가 무너지며 혼란이 발생한다사실 목사들이나 교회 지도자들은 무엇이든 먹어도 문제없다고 보양식조차 함부로 거리낌 없이 즐기는 경우가 있으나 때론 조심해야 한다필자는 애완동물을 아주 사랑하는(?) 어느 기독언론 기자가 사철탕 등 보양식 즐기는 교회지도자들을 비분강개(悲憤慷慨)하며 강하게 비판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4) 사도 바울의 개인적 처방은 신앙 지식보다 앞선 복음을 위한 배려와 사랑이다(13).

먹어도 아무 상관없는 이 우상 제물 문제에 대해 사도 바울은 어떤 개인적 처방을 하고 있을까바울은 무엇을 먹어도 아무 상관이 없음을 잘 알고 있었으나 복음을 위해 기꺼이 절제한다복음만 전해진다면 고기 한 점 덜 먹는 것이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이것이 올바른 지식을 바탕으로 남을 배려하는 사랑으로 나아가는 복음의 대선배 사도 바울의 결단이었다.

필자는 과거 부산에 집회를 갔다가 하루 세끼를 모두 회만 먹은 적이 있다집회 장소와 대접해주시는 분들이 모두 다르다보니 생긴 불상사(?)였다내륙 지방 출신 사람이라 회를 그다지 먹을 기회가 많지 않았던 내게는 아주 큰 고역(苦役)이었다사도 바울이 볼 때 이웃을 배려하는 것이 사랑의 마음이었지만(1-3대접해주시는 분들의 준비된 사랑을 생각해서 거부 하지 못하고 필자는 하루 종일 회를 꾸역꾸역 열심히 먹었다사도 바울의 개인적 처방은 신학적 지식과 처방보다 사랑이 먼저였다사도 바울은 먹어도 상관없는 우상에 바쳐진 제물을 형제들을 위한 배려로 평생 먹지 않겠다고 고백한다과연 그리스도인들이 강아지를 친자식처럼 여기는 형제들을 위해 사철탕 먹기를 금할 수 있을까이것이 범인(凡人)들은 흉내 내기 어려운 사도 바울의 결단이었다.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은 먹지 말라고 할 터이나 음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딤전4:1-3).

사도 바울의 새 창조 신앙

바울의 창조 신앙은 단순한 창조 신앙에 머물지 않는다창조주요 구속의 주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준비한다즉 성경의 창조 신앙은 궁극적으로 새 창조(구원 창조신앙으로 발전한다바울은 이 새 창조를 주로 강림(파루시아)과 부활이라는 말로 표현한다(살전4:16, 17). 게할더스 보스는 이 강림과 부활에 대해 첫 번째 부활은 그리스도가 강림하실 때 일어나고두 번째 부활은 그리스도가 그의 나라를 바치실 때 일어난다고 보았다부활의 시기와 빈도에 대해서는 신학적 관점들이 다양하게 존재한다본고는 이 부분을 지면의 제약 상 다루지 않는다다만 필자가 주목하는 바울의 새 창조 사상은 이 강림과 부활 속에 사도 바울이 사람뿐 아니라 모든 피조물들이 허무함의 종살이의 고통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기 위해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 중에 있다고 한 말이다(8:18-22).

기독교는 결코 동물을 무시하거나 동물에게 무례한 종교가 아니다인간은 피조물의 주인도 아니다청지기일 뿐이다바울은 동물 역시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이요 언약의 약속 안에 있는 존재임을 암시한 것이다하나님은 사람뿐 아니라 수많은 가축이 있는 니느웨 성을 불쌍히 여기셨다(4:11). 창조는 종말론적 구원을 지향한다태초에 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에 모든 피조물을 위한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실 것이며(65:17, 21:1), 아담의 죄로 인해 파괴된 인간과 동물 간에도 평화가 다시 회복될 것이다(65:25). 그 때까지 인간은 다스림의 위치에서 소명을 감당해야 한다이 다스림은 군림이 아니다.

인도의 신학자요 생태학자인 켄 그나나칸(Ken Gnanakan)은 이 다스림’ 안에는 사랑상호 연결지속 가능한 창조성다른 이들을 위한 배려종으로서의 섬김청지기하나님의 창조물에 대한 존경심정의라는 여덟 가지 요소가 들어있다고 했다마치 예수께서 죄 짐 맡은 우리 구주요 좋은 친구였던 것처럼 인간은 당연히 동물들과 사랑 안에서 함께해야 하는 것이다바울은 창조주 하나님의 새 창조 속에 이 같은 하나님 사랑의 본질이 담겨 있음을 시사한 것이다(계속).

조덕영 박사 bareunmedia@naver.com

【한컷기독교핵심용어】 기독론

 

온전하고 완전하고 구별된 두 본성인 신성과 인성이 변화됨 없이혼합이나 혼동 없이 서로 분리될 수 없게 결합되었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8장 2항 중)

 

바른미디어 bareunmedia@naver.com

JMS, 대전 월드컵 경기장에서 행사 개최 예정


 

 

JMS(기독교복음선교회정명석)가 5월 12일 대전 월드컵 경기장에서 국제 평화 축구 축제를 개최해 주의가 요구된다.

 

바른미디어 bareunmedi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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