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운동은 대한예수교장로회 합신과 고신이 참여금지로 결의하고, 한국기독교장로회 산하 목회와신학연구소가 불건전한 신학이라고 교단 총회에 보고한 사상이다. 하지만 교단의 결의와 상관없이 많은 목회자와 성도가 이 사상에 영향을 받고 있다. 워낙 한국 교회에 깊숙하게 자리 잡아 이 운동에 영향을 받고 있음에도 신사도운동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하는 아이러니한 현상도 자주 목격한다.
신사도운동에 대한 오해도 많다. 신사도운동가들의 집회에 금가루나 입신 등의 극단적 신비주의 현상이 나타나서인지 ‘신비주의 = 신사도운동’으로 단순화하는 경향이 짙다. 그러나 신사도운동은 ‘은사 지속론이면 찬성, 은사 중지론이면 반대’라는 이분법적 문제가 아니다.
▲ 피터 와그너(출처: 피터 와그너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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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운동은 나름의 정리된 신학적 입장을 가지고 있다. 물론 전혀 새로운 신학을 주장하고 나선 건 아니다. 풀러신학교의 교회성장학자였던 피터 와그너를 신사도운동의 주창자라 부르는데, 그는 이미 존재했던 여러 신학 사상들을 조직화, 체계화, 극대화했다. 말도 많고 탈도 많고 오해도 많은 신사도운동. 이 운동은 무엇이고, 왜 논란이 될까?
사도와 선지자의 현존성
New Apostolic Reformation(신사도개혁운동). 이 운동의 정체성은 이름에서 부터 확실하게 드러난다. 문자 그대로 신(新)사도운동이다. 성경 시대의 사도와 선지자가 현시대에도 존재한다는 주장이 신사도운동의 핵심사상이다. 피터와그너는 “한 마디로 말해서 우리는 지금 제2 사도 시대에 살고 있다. 내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판단해보자면, 우리는 2001년 경부터 제2의 사도시대를 맞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1)고 주장한다.
와그너는 체 안, 신디 제이콥스, 로렌스 콩, 척 피어슨 등과 함께 사도의 모임인 국제사도연맹(The International Coalition of Apostles, ICA)을 창설했다. 피터 와그너는 사도뿐만 아니라 선지자직도 계승된다고 말한다. 그는 사도와 선지자의 사역을 엄격하게 분리한다. 선지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시를 선별적으로 사도에게 알리는 역할을 한다. 사도는 선지자로부터 예언의 말씀을 받아 분별해야 하는 짐을 지는데 이 모든 과정에서 선지자는 사도에게 복종해야 한다.
사도와 선지자는 오늘날에도 존재 하는가
오늘날에도 사도와 선지자는 존재할까? 결론부터 말하면 현시대에 사도와 선지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성경에서 사도는 헬라어로 ‘άπόστολος’(아포스톨로스)로서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다소 단순한 뜻이지만, 역사적으로 예수님의 제자 중 선별된 열두 사도나 바울 등 극히 일부에게만 사용된 특별한 직분이다. 사도의 핵심 사역은 교회를 세우는 일이었다. 이 사역은 현시대에 되풀이될 이유가 없다. 또한, 2001년경부터 제2의 사도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피터 와그너의 주장을 입증할만한 성경적 근거가 없다.
사도 시대 이후 자칭 사도 외에 그 누구도 사도 직분을 사용하지 않았다. 이승구 교수는 “일반적인 직통 계시파는 1세기 사도들의 독특한 지위를 인정하면서 예언 사역이 지속된다고 주장해 왔다”2)고 지적한다.. 하나님의 음성을 귀로 직접 듣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조차 사도의 독특성은 인정했다는 뜻이다.
존 스토트는 “그들(편집자 주: 사도)은 역사적 예수님, 특별히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한 자들(행 1:21~22; 고전 9:1; 15:8~9)이라는 점과 그리스도에 의해 개인적으로 임명되고 권위가 주어졌다는 점(막 3:14) 그리고 가르치는 사역을 위해서 성령의 특별한 영감을 받았다는 점(예를 들면, 요 14:25~26; 16:12~15)에서 독특하다”3)고 전한다. 스토트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사도들의 증거 안에서 완성되었으며, 성경의 정경이 완성된 지 오래이기 때문”4)에 더 이상 선지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밝힌다.
미국의 저명한 개혁주의 신학자 마이클 호튼은 “신약성경은 사도들의 비상한 사역과 목사와 장로의 일상적인 사역 사이에 분명한 선을 긋는다(딤전 6:20; 딤후 1:13~14). 사도들은 그리스도를 직접 목격한 사람들이었고, 바울 또한 자신이 사도직을 교회가 아닌 그리스도에게서 직접적으로 받은 사실을 바탕으로 자신의 사도직을 주장했지만(갈 1:11~23) … 사도들은 직접적으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었고 그들의 말씀 선포와 그들이 쓴 글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인 반면(딤후 3:16), 지금 우리는 성령의 조명을 받아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말을 통해, 목사와 교사의 입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다 … 하나님은 사도와 선지자를 주셨고(엡 4:11)사도 시대의 비상한 사역 속에 신유와 방언과 예언의 은사도 나타났지만 이들 편지에는 사도들의 계승자들이 사도들의 직분으로 안수 받았다는 어떤 가르침도 존재하지 않는다”5)고 전한다.
은사에 대해 신중 수용론적 관점을 가진 로버트 소시 역시 “현재의 교회 사역을 사도들을 계승한 것이라고 믿는 이들조차 최초의 성경적 사도들은 어떤 면에서 유일무이했다는 점에 동의한다”6)며 사도의 독특성은 보편적으로 인정된 견해라고 전한다.
사도와 선지자의 현존을 주장하면 계시에 대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신사도운동가들은 하나같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적인 계시를 받는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지금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같은 말을 그들의 집회에서 자주 들을 수 있는 이유다. 피터 와그너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하나님으로부터의 계시는 두 가지 방식으로 사도들에게 전달된다. 한 가지 방법은 사도 바울과 같은 방식인 직접적으로 계시를 받는 것이다.7)
이 같은 계시관은 성경의 완전성과 절대성을 해친다. 하나님은 현시대의 사람에게 직접 음성을 들려주시며 말씀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이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정경 66권)이 완성된 이후, 그에 준하는 다른 계시는 불필요하다. 성경보다, ‘들었다’에 높은 권위를 부여하는 위험을 초래해선 안 된다. 하나님은 무질서를 조장하시지 않는다. “그리스도가 왔고 그의 사역은 다 이루어졌고, 그의 말씀은 완성되었기 때문에 특별 계시를 새롭게 형성하는 요소들은 더 이상 붙여질 수 없었다”8)는 바빙크의 지적을 깊이 새겨야 한다.
임파테이션: 성령의 능력은 전이 되는가
신사도운동가들은 사도연맹을 만들고 안수를 통해 사도직을 수여한다. 안수로 성령의 능력을 전이시킬 수 있다는 일명 ‘impartation’(임파테이션)을 주장한다. 집회 도중 쓰러지고 바닥에 뒹구는 현상은 성령의 능력을 전이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근거 구절로 로마서 1장 11절을 제시한다.
로마서 1장 11절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임파테이션은 11절의 ‘나누어 주다’라는 뜻을 가진 영어 단어 ‘impart’에서 유래했다. 본문을 얼핏 보면 바울이 신령한 은사를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길 원하고 그것이 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은사’는 하나님의 주권으로 주어진다.
로마서 12장 6절(상)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고린도전서 12장 11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바울이 상호 모순되는 말을 한 것일까? 많은 사람이 ‘은사’라고 하면 신비한 능력을 떠올린다. 잘못된 선입관이다. ‘은사’는 헬라어로 ‘χ́αρισμα’(카리스마) 인데 이는 ‘χ́αρις’(카리스)에서 유래한 단어다. 카리스는 신약성경에서 100회 이상 사용된다. 많은 경우 은혜로 사용되지만, 감사(롬 6:17; 롬 7:25), 아름다움(벧전 2:19, 20), 칭송(행 2:47), 마음(행24:27)등 다양한 의미를 가진다. 한 단어가 여러 뜻으로 사용되면, 정확한 해석을 위해 다른 본문에서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예(용례)를 찾거나 문맥을 통해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바울은 자기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와 사랑을 로마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마음을 드러냈을 뿐 신비한 능력을 나누어 주겠다고 말하지 않았다. 바울이 이를 ‘신령한πνευματικος, 프뉴마티코스’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자신이 받은 은혜와 사랑이 ‘성령’으로부터 왔기 때문이다. 바울의 의도는 12절에서 확실하게 드러난다.
로마서 1장 12절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바울은 로마인들에게 자신이 가진 신비한 능력을 할당해 주길 원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길 원했고 이 과정이 일방통행이 되지 않길 소망했다. 존 스토트는 바울의 모습을 두고 “비록 사도이기는 하지만 자신에게 그러한 교제가 필요함을 인정하지 않을 만큼 교만하지 않다”9)라고 말한다.
일곱 산: 부로 이루는 하나님 나라
피터 와그너는 인간이 아담의 타락으로 사탄에게 빼앗긴 세상의 통치권을 다시 찾아와야 한다는 ‘통치신학 Dominion, 통치’을 주장한다. 신사도운동은 세상을 종교, 가정, 교육, 정부, 미디어, 예술과 연예, 비즈니스 등 일곱 영역으로 나누고 이를 ‘Seven mountain’(일곱 산)이라고 지칭한다.
일곱 산을 정복해 사회변혁을 일으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겠다고 말한다. 정복한 산 꼭대기에 사도가 위치한다. 일곱 산의 정복을 예수님의 재림과 연결시켜 하나님 나라 건설이 빨라질수록 예수님께서도 더 속히 오신다고 밝힌다.
신사도운동가들은 이 세상에 이룰 하나님 나라에 초점을 맞추는데, 사람의 힘으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할 수 있다는 오만함이 보인다. 저들에 의하면 예수님은 이 세계에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 재림하시는 분이다. 하지만 실상은 그 반대다.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일곱 산을 정복해서가 아닌 예수님의 재림으로 이뤄진다.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는 것(마 24:7), 진리가 미움을 당하는 것(요15:18)이 바로 말세의 징조요 예수님의 말씀이다. 그런데 어떻게 인간의 힘으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해 예수님의 재림을 앞당길 수 있을까.
더 심각한 문제는 신사도운동가들이 ‘돈’을 일곱 산 정복을 위한 수단으로 선택했다는 점이다. 신사도운동 집회에서 ‘부의 이동’, ‘가난의 영을 파쇄하라’, ‘번영의 영을 초청하라’는 등의 말을 쉽게 들을 수 있다. 피터 와그너는 폭력, 지식, 부가 다른 무엇보다 사회를 변혁시켜온 주체인데 특히 부의 영향력이 막강하다고 말한다. 와그너는 “인류 역사를 통틀어 다른 무엇보다도 세 가지가 사회를 변혁시켰다. 폭력, 지식, 그리고 부였다. 그리고 이들 중에서 부의 영향력이 가장 막강하다! 심지어 성경에도 ‘돈은 범사에 이용되느니라’고 기록되어 있다(전 10:19). 지루한 과정이 있었지만 마침내 나는 부를 영적인 질병처럼 경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위해 부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감탄하기 시작했다”10)고 밝힌다.
와그너는 부를 이용하라는 자신의 주장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돈은 범사에 이용되느니라’라는 전도서 말씀을 근거로 제시했다. 하지만 문맥을 무시한 해석을 했다. 전도서 10장 16~20절은 화 있는 나라 와 복 있는 나라의 특징에 대한 설명이다.
전도서 10장 16절 왕은 어리고 대신들은 아침부터 잔치하는 나라여 네게 화가 있도다
17절 왕은 귀족들의 아들이요 대신들은 취하지 아니하고 기력을 보하려고 정한 때에 먹는 나라여 네게 복이 있도다
18절 게으른즉 서까래가 내려앉고 손을 놓은즉 집이 새느니라
19절 잔치는 희락을 위하여 베푸는 것이요 포도주는 생명을 기쁘게 하는 것이나 돈은 범사에 이용되느니라
20절 심중에라도 왕을 저주하지 말며 침실에서라도 부자를 저주하지 말라 공중의 새가 그 소리를 전하고 날짐승이 그 일을 전파할 것임이니라
19절은 화있는 나라 사람의 특징이다. 화 있는 나라 사람은 쾌락을 위해 포도주를 마시고 돈으로 모든 일을 처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돈을 하나님과 견주어 비교하면서까지 경계하라고 당부하셨다(마 6:24). 물질이 주는 유혹이 너무나 커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고 하셨다(마 19:23). 부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이룰 수 있다면 예수님은 왜 그토록 돈의 위험성을 경고하셨을까? 하나님 나라는 돈으로 확장시켜나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특징은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다(롬 14:17). 하나님 나라는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헌신한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삶에 하나님의 신적 통치가 이루어지며 확장된다.
영적 도해: 지역을 장악하는 귀신
통치신학을 통해 신사도운동의 세계관을 알 수 있다. 신사도운동은 하나님과 사탄의 대결구도라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이 사상의 결과물이 영적 도해이고, 이는 지역 귀신론과 땅 밟기로 이어진다. 영적 도해란 이 세상을 하나님이 지배하는 영역과 사단이 지배하는 영역으로 나누어 놓은 소위 영적인 지도다. 지역을 지배하는 귀신이 있는데 그 땅에 들어가 기도와 찬송으로 지역의 귀신을 무찌르는 것이 땅 밟기다.
영적 도해와 지역 귀신론은 성경이 아닌 순전히 피터 와그너의 경험에서 도출된 사상이다. 와그너는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지역의 영들의 영역에서 주도권을 쥐기를 원한다는 음성을 선명하게 들었다며 이 말씀이 마귀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 초보자였던 사람에게 놀라운 임무였다”11)고 주장한다. 모든 신학적 명제는 성경을 기초로 만들어져야 한다. 지역 귀신론을 지지하는 단 한 구절의 성경말씀도 찾아 볼 수 없다. 김재성 교수는 “성경은 지역적인 귀신들의 개념을 지지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직접적으로 지역적인 귀신들과 정면대립하거나 그 어떤 방식으로든지 상호작용을 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없다. 예수님은 결코 어떤 지역에 가셔서 그 곳의 세상 권세를 장악하고 있다고 하는 귀신들을 결박하는 일을 중심사역으로 전개하신 적이 없다”12)고 지적한다.
열린 유신론: 미래를 보시지 않는 하나님
피터 와그너는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놀라실 뿐만 아니라 마음도 바꾸실 수 있다”며 자신을 열린 유신론자라고 밝힌다. 열린 유신론Open Theism이란 캐나다 출신의 신학자 클락 피노크가 주창한 것으로 개방 신론이라고도 불린다. 열린 유신론자들은 미래가 부분적으로 확정되어 있지 않고 ‘열려’있는 것은 하나님도 마찬가지라고 주장한다.13) 하나님은 미래를 스스로 알지 않기로 작정하고 피조물의 의지에 따라 자신이 어떻게 행동할지 결정한다는 뜻이다.
피터 와그너의 말처럼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 미래에 눈감고 계시며 피조물의 의지를 적극 지지하시는 분일까? 하나님은 때때로 놀라실 뿐 만 아니라 마음을 바꾸실 수도 있을까? R.C. 스프로울은 이렇게 반문한다.
내 기도에 하나님의 마음을 바꾸게 하는 것이 있는가?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고자할 때, 내 기도 이전에는 하나님조차 정보나 지식에서 부족한 어떤 것이 있는가? 내가 기도할 때 하나님의 마음을 변화시킬 만한 정보, 지시 혹은 충고를 하나님께 할 수 있는가? … 우리는 하나님의 자신의 경륜에도 없는 그런 지혜를 가지고 있지 못한다.14)
열린 유신론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초월성을 제한하는 사상이다. 열린 유신론은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잠 16:9)는 말씀에 정면으로 대치되며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 22:42)라는 예수님의 기도를 무의미하게 만든다.
각종 신비주의 현상과 종교의 영
신사도운동가들의 집회에서는 직통 계시, 입신, 치유, 집단 방언 등의 현상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신사도운동가들은 이런 현상이 교회 성장에 필수적인 요소라고 생각한다. 저들은 교회는 언제나 동일한 방식으로 성장하지 않았다며, 신사도운동이 오늘날 교회 성장의 새 가죽부대라고 주장한다. 와그너는 지난 2014년 1월 6~9일, 한국에서 열린 HIM 회복 콘퍼런스에서 신사도운동은 새 포도주를 담는 새 부대지만, 교단주의는 새 포도주를 담을 수 없는 옛 부대라고 비판했다.
신사도운동가들은 자신들의 사상에 반대하는 자들을 종교의 영에 사로잡혔다고 비판한다. 와그너가 말하는 종교의 영이란 “종교적인 계략들을 사용함으로써 변화를 막고 현재의 상태에 머물도록 임무를 부여받은 사탄의 대행자”15)다. 종교의 영이라는 말은 성경에 없다. 이 같은 주장은 “신사도운동가들은 종교의 영에 사로잡혀 있다”는 반대논리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성경의 지지를 받을 수 없는 영을 만들어 그 사상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싸잡아 비판하는 것은 배타주의요 교조주의일 뿐이다.
신사도운동 어디서 유래했나
서두에서도 밝혔지만 신사도운동은 피터 와그너의 창작물로 보기 어렵다. 신사도운동은 어딘가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와그너 역시 자신이 영향 받은 인물이나 단체, 사상들을 자주 언급한다. 와그너는 신사도 운동의 뿌리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신사도 개혁 운동의 뿌리는 1900년 아프리카 독립교회 운동이 처음으로 시작된 당시로 올라간다. 1975년경에 시작된 중국 가정교회 운동과 1980년경에 출현한 라틴 아메리카의 대중교회 운동도 다른 대륙에서 나타난 동일한 영적 현상의 일부분들이다. 1970년경에 나타난 미국의 독립적 은사주의 교회들도 현재의 신사도적 개혁 운동에 가장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선구자이다.16)
신사도운동에 영향을 준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윌리엄 브랜험(William Branham)이다. 행크 해네그래프에 따르면 윌리엄 브램험은 삼위일체를 거부하고, 종말의 대략적인 일자를 정하는 오류를 범했다.
브란함은 “1977년쯤에는 로마 가톨릭 통제 아래 모든 분파가 세계교회협의회에 속할 것이고 그러면 휴거가 일어나고 세계는 파괴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 브란함의 빗나간 예언은 브란함의 잘못된 교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브란함은 ‘뱀의 씨앗 교리’를 주장하며, 이브가 뱀과 관계를 맺어 가인을 잉태했다고 주장했다. … 브란함은 성경적 삼위일체 교리를 강경하게 거부했다. … 브란함은 “삼위일체론으로 세례받은 사람들은 오직 예수의 이름으로 다시 세례를 받아야한다”고 주장했다.17)
빈야드 운동의 창시자 존 윔버도 빼놓을 수 없다. 피터 와그너는 치유나 축사 사역은 존 윔버에게 막대한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한다. 이 밖에 피터 와그너는 영적 도해와 지역귀신론은 오스카 쿨만, 잭 헤이포드, 조용기 목사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다. 또한 조용기 목사와 빌 헤몬이 가난의 영을 파쇄하는 데 도움을 줬다고 밝혔다. 자신이 열린 유신론자가 된 결정적인 계기는 대표적 열린 유신론자들인 클라크 피녹, 존 샌더스, 그레그 보이드의 책을 접하면서고, 세상을 구성하는 일곱 산에 대한 패러다임은 랜스 월나우를 초청한 콘퍼런스에서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신사도운동은 기독교 역사 속에서 발흥과 쇠퇴를 반복해온 많은 운동과 사상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며 와그너가 체계화해 극대화한 하나의 무브먼트로 이해할 수 있다.
신사도운동? 신사도적 운동?
어떤 단체가 신사도운동을 하는 곳인지를 따져보려면 제일 먼저 사도직을 인정하고 통치신학, 열린 유신론, 영적 도해 등을 주장하는지 살펴야 한다. 사도직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신사도운동이라 보기 어렵다. 하지만 “우리는 사도직을 인정하지 않으니 신사도운동이 아니다”라고 발뺌하면서도 신사도운동이 가진 신학을 일부 차용하는 단체들이 있다. 사도를 인정하지 않아도 많은 부분 신사도운동과 유사점이 있다면 신사도적 운동이라고 표현하는 것을 제안한다.
신사도운동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자임을 천명하고, 성경 무오설을 지지한다. 하지만 1세기의 특수한 직분인 사도가 현시대에도 존재하고 하나님으로부터 특별계시를 받는다고 주장한다. 영적도해, 지역귀신론이 특별계시에서 파생되었으며, 극단적 신비주의 집회를 낳았다. 잘못된 성경 해석으로 하나님 나라를 부로 이루겠다는 주장까지 펼치며 반대자들은 종교의 영에 사로잡혔다고 비판한다. 이처럼 신사도운동은 여러모로 성도들의 올바른 신앙을 위협하는 불건전한 사상이다.
1) 피터 와그너, 『Dominion』(서종대 역, WLI KOREA, 2007), 23.
2) 이승구, 『거짓과 분별』(예책, 2014), 205.
3) 존 스토트, 『성령 세례와 충만』(김현회 역, IVP, 2014), 125.
4) 같은 책, 126.
5) 마이클 호튼, 『개혁주의 조직신학』(이용중 역, 부흥과개혁사, 2012), 881-882.
6) 리처드 개핀 외 3인, 『기적의 은사는 오늘날에도 있는가』(이용중 역, 부흥과개혁사, 2009), 132.
7) 피터 와그너, 『사도와 선지자』(임수산 역, 쉐키나, 2008), 55.
8) 헤르만 바빙크, 『개혁교의학1』(박태현 역, 부흥과개혁사, 2011), 470.
9) 존 스토트, 『로마서 강해』(정옥배 역, IVP, 1996), 126.
10) 피터 와그너, 『변화를 위한 지침서』(진현우 역, WLI KOREA, 2014), 362.
11) 같은 책 158.
12) 김재성, 『교회를 허무는 두 대적』(킹덤북스, 2013), 36.
13) 그레고리 A. 보이드, 폴 R. 에디, 『복음주의 신학 논쟁』(박찬호 역, CLC, 2014), 113.
14) R.C. 스프로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해설1』(이상웅, 김창영 역, 부흥과개혁사, 2011), 77.
15) 피터 와그너, 『종교의 영으로부터의 자유』(김도현 역, WLI KOREA, 2008), 20.
16) 피터 와그너, 『Dominion』(서종대 역, WLI 31), 25.
17) 행크 해네그래프, 『빈야드와 신사도의 가짜 부흥운동』(이선숙 역, 부흥과개혁사, 2009), 257-258.
조믿음 기자 jogogo@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