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상태 목사의 성경 오해 풀고 읽기(3)
밧세바는 다윗을 유혹한 음녀일까? 강해설교로 유명한 어떤 목사님은 밧세바를 다윗을 넘어뜨린 여자로 말씀했다. 다윗은 문제없이 믿음 가운데 지내고 있는데, 밧세바라는 여인이 갑자기 등장해서 다윗을 넘어뜨렸다고 설교했다. 사무엘하 11장에 나오는 다윗의 범죄사건을 검색하면 상당히 많은 설교자들이 이런 해석을 하고 있다. 과연 맞는 해석일까? 이런 해석은 어디서 시작이 되었고, 본문은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살펴보겠다.
먼저, 밧세바가 다윗을 유혹했다는 견해가 많이 알려진 계기가 있다. 중세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미술작품들은 밧세바를 음녀로 그리고 있다. 16세기 얀 마시스, 17세기 회화의 아버지 루벤스, 19세기 상징주의 화가 구스타프 모로와 같은 유명한 화가들은 모두 밧세바를 유혹하는 여인으로 묘사했다. 미술작품에서 이런 역사는 중세시대 여성관에서 시작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중세시대 결혼한 여성은 남성의 불륜에 원인 제공자로 인식되었다. 특히 중세 교부들은 여성을 “하수구 위에 세워진 사원“, “아이를 만드는 기계“, “악마의 소굴“로 이해했다. 이런 문화사적이 배경이 밧세바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에 일조를 했다고 볼 수 있다.
여성에 대한 선입견으로 성경을 보면, 본문이 보여주는 의미를 왜곡하게 된다. 성경의 본래 의미는, 선입견을 벗고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내용을 자세히 읽어야 알 수 있다. 본문에서는 다윗과 밧세바의 문제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을까?
먼저 1절을 살펴보자. “그 해가 돌아와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매”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 당시에 이스라엘 주변 팔레스틴은 봄과 가을에 주로 전쟁을 많이 했다. 겨울에 비가 많이 오고 봄이 되면 비가 그친다. 비가 그치면, 도로 사정이 좋아서 전쟁할 수 있는 기본적인 환경이 만들어진다. 이때, 1절 하반 절에서 다윗은 요압과 모든 군대를 랍바로 보냈고 다윗만 홀로 다윗성에 남았다. 그런데, 다윗은 랍바성으로 가야 했다. 왜냐하면, 12장 26∼28절 에서 요압이 다윗에게 랍바로 내려오라고 전령을 보내서 요청한다. 다윗은 전쟁 현장에 있어야 했다. 왕으로서 당연한 직무였다. 그래서 밧세바를 범하기 전까지 사무엘하 10장까지는 다윗이 직접 출정해서 전쟁을 치렀다. 10장 18∼19절에서는 아람 군대를 직접 쳐서 죽였다.
구약시대 전쟁은 단순히 힘의 대결이 아니다. 일반 역사에서 보는 단순한 영토 확장이 아니다. 구약시대 전쟁은 언제나 하나님의 통치와 관련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왕을 대리자로서 통치하시는 역사를 보여주시는데, 그중에 하나가 전쟁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을 군대와 관련된 만군의 여호와로 부르기도 한다. 모든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왕은 하나님의 지혜와 힘을 의지해야 한다. 그러나 다윗은 11장을 시작하면서, 전쟁과 관련해서 이전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 준다. 마치 힘든 일은 아랫사람에게 맡기고 나는 좀 즐기고 싶다는 뉘앙스를 풍기며, 나태하고 게으른 모습을 보여 준다.
이런 자세는 2절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저녁때에 다윗이 그의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옥상에서 거닐다가” 다윗이 저녁때에 침상에서 일어났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낮에 잠을 자고 있었다는 뜻이다. 모든 이스라엘 군대가 전쟁터에 나가서 고생하고 있을 때, 왕이 낮잠을 자고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암시할까? 다윗이 얼마나 안일한지 1절과 대비하며 극적으로 드러낸다.
성경은 한 사건이나 인물의 태도를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같은 다른 장면을 대비시키며 보여 준다. “성경 오해 풀고 읽기 1편”에서도 누가복음 5장 1절과 2절은 매우 다른 두 장면을 보여 준다. 무리가 옹위하며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장면과 베드로가 배에서 나와 그물을 씻는 장면을 대비시키며, 이미 예수님을 알고 있던 베드로가 왜 말씀을 듣는 무리 속에 있지 않은지 독자들에게 의문을 던지게 한다.
11장도 비슷하다. 왜 다윗은 모든 이스라엘 군대가 고생하고 있을 때, 낮잠을 자고 있었을까? 아끼는 부하와 이스라엘 군대가 목숨을 걸고 거룩한 전쟁에 임하고 있는데, 이것을 아는 왕이라면 최소한 엎드려 기도하는 장면이나 제사라도 드리는 장면이 기록되어야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왕으로서 최소한의 체면이라도 세울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이미 1절과 2절은 다윗의 범죄를 예고하고 있다. 왕이 중요한 임무를 부하에게 모두 맡긴 채, 낮잠을 자다가 늦게 깨자, 인간의 타락한 죄성이 꿈틀대기 시작한다.
이제 다윗은 옥상을 거닐다가 아름다운 여성이 목욕하는 장면을 발견한다. 고대사회에서 성안에 주택구조는 매우 조밀했고 인구밀도가 상당히 높았다. 다윗성과 가옥구조를 감안할 때, 매우 가까운 거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밧세바가 저녁쯤에 목욕을 했다는 사실은 4절을 근거로 볼 때, 부정을 씻고 새롭게 하루를 시작하는 의식으로 볼 수 있다. 밧세바가 부정을 씻는 의식을 일부러 잘 보이는 옥상에서 했는지, 집안에서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또한, 의도적인 유혹인지도 전혀 힌트를 주지 않는다. 밧세바는 평범하게 부정을 씻는 의식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 외에 어떤 유혹에 대한 단서를 제공하지 않는다.
어떤 설교에서는 ‘밧세바가 왜 다윗의 동침 요구에 저항하지 않았는가’라고 묻기도 한다. 이 문제는 3절에 나오는 가족 관계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밧세바의 아버지는 엘리암이다. 엘리암은 다윗의 용맹한 군사 30명 중에 한 사람이다. 할아버지 아히도벨은 다윗의 전략가였다. 그녀의 가족은 모두 다윗의 신하들이었다. 다윗은 모르는 어떤 이스라엘 사람보다 훨씬 더 왕으로서 요구를 제시하기 쉬웠고, 밧세바는 신하의 가족으로서 명령에 순종할 수밖에 없는 위계 관계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다윗은 3절에서 먼저 치밀하게 인적사항을 확인한 후, 4절에서 전령을 보내 밧세바를 데려오게 했다. 미술역사에서 루벤스나 렘브란트가 이 장면을 묘사할 때, 전령이 밧세바에게 편지를 보내고, 편지를 받은 밧세바가 생각을 하는 장면으로 그리고 있지만, 성경 본문은 이를 지지하지 않는다. 예술적 상상력이 만들어낸 허구일 뿐이다. 다윗은 위계 관계를 이용해서, 밧세바를 불러 자신의 성적 욕구를 푸는 악한 짓을 했다. 지금의 법적 용어로 말하자면, 위계에 따른 성범죄라고 할 수 있다.
왜 다윗은 이렇게 무너졌을까? 성경은 정확하게 말하고 있지 않지만, 위 해석을 근거로 볼 때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기름 부음 받은 왕이 하나님께서 맡겨 준 임무와 사명을 잊어버리고, 육신의 즐거움에 탐닉할 때, 타락한 본성은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어떤 훌륭한 신앙인이라도, 타락한 본성이 어떤 선을 행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이다. 성경 인물을 신앙의 모델로 삼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신앙을 가진 인간이 신앙의 모델이 될 수 없다. 신앙인 자체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죄인인 인간을 통해서 하나님은 어떻게 구속의 역사를 이끌어 우리를 은혜로 이끄시는지 주목해야 한다. 아무리 신앙과 믿음이 좋아도, 그 사람의 공로가 아니라, 믿음을 고백하게 하시는 하나님, 죄의 비참함 가운데 도무지 어떤 선도 행할 수 없는 자를, 어떻게 함께 하셔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고야 마시는지 우리는 항상 기억해야 한다.
사무엘하 11장 1∼5절
1 그 해가 돌아와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매 다윗이 요압과 그에게 있는 그의 부하들과 온 이스라엘 군대를 보내니 그들이 암몬 자손을 멸하고 랍바를 에워쌌고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더라
2 저녁 때에 다윗이 그의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옥상에서 거닐다가 그 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지라
3 다윗이 사람을 보내 그 여인을 알아보게 하였더니 그가 아뢰되 그는 엘리암의 딸이요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아니니이까 하니
4 다윗이 전령을 보내어 그 여자를 자기에게로 데려오게 하고 그 여자가 그 부정함을 깨끗하게 하였으므로 더불어 동침하매 그 여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5 그 여인이 임신하매 사람을 보내 다윗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임신하였나이다 하니라
편집자 주: 필자 장상태 목사는 좋은우리교회를 담임하고, 튤립성경연구 섬김이, 디다스코 출판사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장상태 목사 jangsstt@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