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세 확장이 원인 아니다.
하나님의교회(총회장 김주철)는 최근 몇 년간 100개 이상의 단독 건물을 마련했다. 기성교회는 세 가지 의문을 품었다. 첫째, 시한부 종말을 주장하면서 건물을 마련한 이유는 무엇인가? 둘째, 건물 마련을 위한 재정은 어떻게 확보했는가? 셋째, 지속해서 건물을 마련할 만큼 교세가 확장되었나?
의문에 대한 답은 ‘교리’에서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의교회피해자가족모임(하피모) 김용한 공동대표는 “모든 것이 시한부 종말론 때문”이라고 전한다.
![]() ▲ 천안 하나님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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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과 도피처
하나님의교회는 1988년, 1999년, 2012년 세 차례나 종말이 온다고 주장하면서, 건물을 세우는 아이러니한 행보를 이어갔다. 종말 분위기가 최고조에 달했던 2012년에는 무려 29곳에 건물을 세웠다. 하나님의교회는 이 모순을 어떻게 정당화했을까?
하나님의교회는 종말을 이용해 신도들에게 공포감을 심는 동시에 도피처를 제시했다. 도피처는 ‘시온’ 즉 하나님의교회다. 신도들은 ‘북방에서 큰 재앙과 멸망이 시작되면 시온으로 도피하라’고 교육받아왔다. 탈퇴자들에 따르면 ‘북방’은 ‘북한’을 뜻하고 핵 도발을 기점으로 재앙이 시작되는데, 이때 하나님의교회 건물로 도피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건축헌금이 십일조보다 일만 배 이상
도피처 건축은 신도들의 재산을 갈취하는 좋은 명분이었다. 신도들은 “종말이 오므로 재물을 땅에 두기보다 하늘에 소망을 두라.”, “하나님께 제일 큰 축복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 데 필요한 자금을 드리는 것”이라는 설교를 반복적으로 들었다. 적금과 보험 해약은 물론, 자가에서 전세로, 전세에서 월세로 집을 옮기면서까지 헌금하는 신도들도 있었다. 건축헌금은 하나님의교회 재정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다. 건축헌금이 십일조 보다 일만 배 이상인 지역도 있었다.
![]() ▲ 대전 하나님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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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 수 증가는 건축의 이유 아니다
하나님의교회의 신도 수 파악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 지속적인 건축은 신도 수 증가 우려를 낳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하피모 관계자들과 탈퇴자들은 신도 수가 오히려 감소했다고 입을 모은다. 하나님의교회 피해자들은 최근 몇 년간 꾸준히 하나님의교회 앞에서 시위를 해왔다. 자연스럽게 출석 신도 수를 가늠해 볼 수 있었다. 피해자들의 현장조사와 탈퇴자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2000년 중반 이후 하나님의교회 교세는 급격히 줄었다는 결론에 이른다. 하피모 관계자들은 국내 하나님의교회 출석 신도 수가 2만 명 선이라고 분석한다.
![]() ▲ 여러 언론에 알려진 하나님의교회 헌당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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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한 공동대표는 “하나님의교회의 교회가 건물을 사들이는 것을 보면서 교세가 확장되는 것 아닌가 걱정하는 시각이 있다. 하지만, 건물 마련은 교세 확장이 아닌 종말 교리에 기인한 현상”이라며 “(하나님의교회가)건축 혹은 건물 매매를 남발하고 이를 지역 뉴스에 기사화해 마치 교세가 확장되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또한 새로운 독립건물은 주변 두세 개의 임대 단위 건물이 합쳐진 것이다. 결과적으로 두세 개의 교회가 없어지고 한 개의 교회가 생겨난 셈”이라고 밝혔다.
연이은 시한부 종말론의 실패와 더불어 피해사례들이 언론 등을 통해 알려지면서 하나님의교회가 궁지에 몰린 형국이다. 종말과 도피처 교리로 신도들을 옥죄는데도 한계가 있다. 하나님의교회는 적극적인 해외진출과 교리변개로 살 길을 도모하지 않을까? 쇠퇴기에 접어든 하나님의교회를 향한 공세적 대응이 필요한 시점이다.
자료제공: 하나님의교회피해자가족모임 김용한 공동대표, 김영석 가족수호자 회원
조믿음 기자 jogogo@hanmail.net
박재은 박사의 칭의 바르게 이해하기(1)
“칭의”(稱義, justification)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통해 죄인을 의롭다 여겨(칭해 혹은 일컬어) 주시는 것을 뜻하는 신학 용어이다. 칭의 교리에 대한 논쟁은 과거에도 있어왔으며, 현재 진행형일 뿐만 아니라, 다가 올 미래에도 그 논쟁의 불씨가 완전히 시들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칭의 교리가 과거, 현재, 미래를 관통해 여전히 논쟁거리로 남아있는 이유는 그 교리 자체가 가진 신학적 중대성 때문이다. 칭의의 성격과 방법 그리고 그 원인들에 대한 “약간의” 다른 관점이 결국엔 다른 모든 신학 측면들에까지 영향을 미쳐 “커다란” 신학적 차이로 귀결되는 경향이 짙다는 측면에서 여전히 칭의 교리는 신학적으로 중대한 것이다. 칭의 교리의 중요성에 대해 여러 관점에서 고찰 할 수 있겠지만 본고에서는 전통적 신학 논제들(loci)의 범주를 따라가며 논의해보도록 하겠다. 순서는 성경신학적 중요성, 역사신학적 중요성, 조직신학적 중요성, 실천신학적 중요성 순으로 진행할 것이다.
▲박재은 박사
1. 성경신학적 중요성
교리란 성경의 가르침을 요약 정리하여 명제적 진술을 하는 것이다. 모든 교리는 성경으로부터 발현되어야만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칭의 “교리”는 신구약 성경에 나타난 칭의의 가르침을 요약 정리하여 명제적 진술을 한 성경적 가르침들의 모음 형태(combined form)를 지닌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들 수 있다. “같은 성경”을 읽는 사람들이 왜 같은 주제에 대해 “다른 교리적 진술”을 하는가? 즉 같은 성경을 보는 사람들이 왜 서로 다른(때로는 서로 “현저히” 다른) 칭의 교리를 말하는가의 문제이다.
이 차이점은 여러 이유들로 인해 불거질 수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성경을 어떤 해석학적 틀 안에서 볼 것인가, 혹은 다양한 해석학적 도구 가운데 어떤 도구를 최우선으로 취하여 사용할 것인가, 또는 특정 본문을 특정 시대적 맥락(context) 가운데서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아니면 신구약 통일성 관점에서 특정 본문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등의 차이로부터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요즘 시대는 특정한 성경 해석법을 최고(the best)라고 감히 말 할 수 없다. 소위 수 없이 많은 “새”(new) 관점들이 물밀 듯이 해석학계를 강타하고 있기 때문이다. 칭의 교리 영역에도 예외가 아니다. 이제부터 본 연재를 통해 차근차근 살펴보겠지만 이처럼 다양한 성경 해석법은 기존의 전통적 칭의 교리의 성격을 더 날카롭게 만들어주기도 하지만 교리의 뿌리를 뒤흔드는 중대한 도전을 주기도 하였다. 현재는 역설적이게도 칭의 교리 때문에(혹은 덕분에) 더욱 성경 신학 분야와 해석학 분야가 발전하고 있는 상황이다. 물론 그 역의 상황도 혼재하고 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 동시에 고무적인 일이기까지 하다. 성경과 교리는 불가분의 관계이며 그 상호적 관계는 서로가 서로를 날카롭게 분석, 평가할 때 비로소 시너지 효과로 발휘되어 참된 진리를 찾아가는 물꼬를 틀 수 있게 된다는 측면에서 그렇다.
2. 역사신학적 중요성
역사신학은 장구한 교회 역사 흐름 속에서 특정 성경적 가르침들을 어떻게 다루었는가를 살펴보고 현재의 거울로 삼는 학문이다. 그런 점에서 칭의 교리는 역사신학적으로도 중대하다. 칭의 교리를 중심에 놓고 교회 역사를 찬찬히 살피다보면 그 장구한 흐름 안에 온갖 종류의 교리적 희로애락(喜怒哀樂)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목도하게 된다. 칭의 교리에 대한 본인의 신념 때문에 기쁨으로 춤을 추기도 하고, 분노에 사로잡히기도 할 뿐 아니라, 슬픔과 고통과 비애에 잠 못 이루고, 심지어 자신의 목숨을 내어 바치기까지 했던 수없이 많은 교회의 인물들을 경험할 수 있는 특권은 칭의 교리를 연구하는 자들이 가질 수 있는 기쁨이다. 특히 칭의 교리 발전의 장구한 역사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어떤 방향성을 가진 채 칭의 교리를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청사진이 그려진다. “역사”야말로 현재의 거울이요 시대의 등불이기 때문이다.
차후에 심층적으로 살펴보겠지만 교회 역사 속에 나타난 수없이 많은 “불균형적” 칭의론은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균형을 잡을 수 있는 귀한 잣대를 제공해 줄 수 있다. 칭의 교리를 역사신학적으로 고찰한다는 말은 현대를 사는 우리들이 단순히 과거로 회귀하여 과거의 영광과 슬픔을 피상적으로 경험하는 데 그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과거를 거울로 삼아 다시금 건전한 방향성을 가지고 힘껏 “도약”할 수 있는 운동 능력을 기르는 것을 뜻한다. 이런 측면에서 칭의 교리는 역사신학을, 역사신학은 칭의 교리를 한층 더 발전시킬 수 있는 상호 발전의 사명이 서로에게 부과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3. 조직신학적 중요성
조직신학은 기본적으로 특정 신학 주제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요약 정리하여 주제별로 교리적 진술을 하는 학문이다. 조직신학은 모든 교리적 분야, 예를 들면 신론, 기독론, 인간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 등을 포괄적 조망 하에 다룬다. 비록 조직신학은 각론들로 구성되지만 각각의 각론들은 언제나 교리적으로 상호 통합하여 유기적으로 존재한다. 이러한 “통합적” 조직신학 성격을 칭의 교리 역시 그대로 닮아 있다.
칭의 교리는 기본적으로는 “구원론”(soteriology) 영역에 속한 교리이지만 단순히 그 영역이 구원론 안에서만 제한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칭의의 유효적 원인(efficient cause, 어떤 일이 일어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가장 효과적이고 근원적 원인)이 하나님이라면 넓게는 “신론”의 영역이며 좁게는 신론 중 “예정”(predestination)의 영역이다. 칭의의 질료적 원인(material cause, 어떤 일이 일어날 때 필요한 재료적 원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의(義, righteousness)라면 넓게는 “기독론”의 영역이고 좁게는 기독론 중 그리스도의 “사역”(works) 영역이다. 칭의의 도구적 원인(instrumental cause, 어떤 일이 일어날 때 필요한 수단적 원인)이 신자의 믿음(faith)이라면 넓게는 “구원론”의 영역이고 좁게는 구원론 중 “구원의 서정”(ordo salutis) 영역이다. 칭의 사건은 신론, 기독론, 구원론 등을 폭넓게 아우르는 조직신학의 영역이므로 칭의론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는 곧 조직신학 각론들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로 발전 될 수 있다. 최근에는 칭의 사건을 교회론 혹은 종말론적 틀 안에서 해석하는 경향이 짙은데 이 또한 칭의 교리 자체가 함의하고 있는 교리적 확장성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상황이라 볼 수 있겠다.
칭의론은 그 본질 상 조직신학의 각론들을 개별적으로 동시에 포괄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교리이므로 반드시 조직신학 전체를 투영하는 거시적 조망과 통합적 조망 하에 연구될 필요가 있다. 이는 단순히 조직신학 내에서의 각론들끼리의 통합적 측면뿐만 아니라 간(inter) 학문들 예를 들면 성경신학, 역사신학, 조직신학 그리고 다음에 살펴볼 실천신학까지를 아우르는 폭넓은 조망 하에 다룰 필요가 있다. 이런 측면에서 칭의 교리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는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인간, 교회 등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로 이어질 수 있는 필연성과 당위성을 지닌다.
4. 실천신학적 중요성
실천신학은 성경, 교리, 역사 등이 말하고 있는 바를 분석하여 개인, 사회, 교회, 국가의 각 영역들에 적용하는 학문이다. 교리는 “삶의 체계”가 되어야 한다. 삶과 동떨어진 교리는 결국 피상적인 외침이요 건조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칭의 교리가 신학적/교리적으로 중대하다면 그 중대성이 한낱 책 안에만 갇혀 있어서는 안 된다. 그 신학적 중대성이 개인의 삶과 신앙에 커다란 영향을 끼쳐야 한다. 칭의 교리는 신자의 삶의 토대요 근본이다. 하나님 나라는 의인만 들어간다(고전 15:50). 하지만 의인은 없으되 하나도 없다(롬 3:10). 그렇다면 어떻게 죄인은 의인이 될 수 있을까? 바로 그리스도의 의가 믿음으로 죄인에게 전가(imputation)됨으로써만 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칭의 사건의 핵심이다. 이러한 칭의 사건은 성도의 삶의 양태와 태도를 규정한다.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므로 죄인은 반드시 죽어 음부의 권세 아래 거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의의 공로에 힘입어 값없이 의인으로 칭함을 받아 더 이상 죽음의 권세 아래 있지 아니하고 영광스러운 주님의 보좌 앞에 설 수 있게 된 자가 바로 성도이다.
이러한 칭의 사건을 실존적으로 깨닫고 경험한 자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 자세는 “감격”과 “감사”와 “순종”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없다. 감격적인 칭의 사건의 의미가 각 개개인의 삶의 태도를 바꾸는데 유효적 원인으로 작용해야 한다. 바른 신학과 바른 교리의 소유는 개인의 잔잔하고도 무미건조한 삶의 양태 가운데 엄청난 반향과 충격을 가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이러한 실천적 축을 이루는 근본을 바로 칭의 교리가 감당할 수 있다. 칭의 교리가 성도 개개인을 세울 수 있다면 이는 곧 성도의 모임인 ‘교회’를 세우는 일과 진배 다름없다. 독일의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의 말처럼 칭의론이 바로 설 때 교회도 같이 서고, 칭의론이 무너질 때 교회도 같이 무너진다. 이처럼 칭의 교리는 실천신학적 토대(즉 성도 “개인”과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를 세워나감에 있어 근본구조(infrastructure)를 이루는 교리적 기저요 주춧돌의 역할을 감당한다.
앞으로 총 6회에 걸쳐 칭의 교리에 대해 다각도로 살펴보기 전 서론적 고찰로서 칭의 교리의 중요성을 성경신학적, 역사신학적, 조직신학적, 실천신학적 관점에서 살펴보았다. 혹자는 “또 칭의론이야!?”라면서 미간을 찌푸릴 수도 있겠다. 그 안에는 지긋지긋함과 식상함 혹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칭의 교리 자체에 대한 반항심까지 잔뜩 서려 있을 수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칭의 교리는 여전히 중요하며 여전히 살펴볼 가치가 충분한 교리이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2017년에 다시금 칭의 교리를 넌지시 되짚어 보며 성경과 역사와 신학이 칭의에 대해 정확히 무슨 말을 하는지에 대해 주의 깊게 경청 할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우리 모두 “칭의”라는 토대 위에 두 발 벌려 서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편집자 주: 필자 박재은 박사는 미국 칼빈 신학교에서 조직전공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현재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조직신학을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 『칭의, 균형 있게 이해하기』(부흥과개혁사), 『성화, 균형 있게 이해하기』(부흥과개혁사)가 있다.
사도운동은 대한예수교장로회 합신과 고신이 참여금지로 결의하고, 한국기독교장로회 산하 목회와신학연구소가 불건전한 신학이라고 교단 총회에 보고한 사상이다. 하지만 교단의 결의와 상관없이 많은 목회자와 성도가 이 사상에 영향을 받고 있다. 워낙 한국 교회에 깊숙하게 자리 잡아 이 운동에 영향을 받고 있음에도 신사도운동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하는 아이러니한 현상도 자주 목격한다.
신사도운동에 대한 오해도 많다. 신사도운동가들의 집회에 금가루나 입신 등의 극단적 신비주의 현상이 나타나서인지 ‘신비주의 = 신사도운동’으로 단순화하는 경향이 짙다. 그러나 신사도운동은 ‘은사 지속론이면 찬성, 은사 중지론이면 반대’라는 이분법적 문제가 아니다.
![]() ▲ 피터 와그너(출처: 피터 와그너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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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운동은 나름의 정리된 신학적 입장을 가지고 있다. 물론 전혀 새로운 신학을 주장하고 나선 건 아니다. 풀러신학교의 교회성장학자였던 피터 와그너를 신사도운동의 주창자라 부르는데, 그는 이미 존재했던 여러 신학 사상들을 조직화, 체계화, 극대화했다. 말도 많고 탈도 많고 오해도 많은 신사도운동. 이 운동은 무엇이고, 왜 논란이 될까?
사도와 선지자의 현존성
New Apostolic Reformation(신사도개혁운동). 이 운동의 정체성은 이름에서 부터 확실하게 드러난다. 문자 그대로 신(新)사도운동이다. 성경 시대의 사도와 선지자가 현시대에도 존재한다는 주장이 신사도운동의 핵심사상이다. 피터와그너는 “한 마디로 말해서 우리는 지금 제2 사도 시대에 살고 있다. 내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판단해보자면, 우리는 2001년 경부터 제2의 사도시대를 맞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1)고 주장한다.
와그너는 체 안, 신디 제이콥스, 로렌스 콩, 척 피어슨 등과 함께 사도의 모임인 국제사도연맹(The International Coalition of Apostles, ICA)을 창설했다. 피터 와그너는 사도뿐만 아니라 선지자직도 계승된다고 말한다. 그는 사도와 선지자의 사역을 엄격하게 분리한다. 선지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시를 선별적으로 사도에게 알리는 역할을 한다. 사도는 선지자로부터 예언의 말씀을 받아 분별해야 하는 짐을 지는데 이 모든 과정에서 선지자는 사도에게 복종해야 한다.
사도와 선지자는 오늘날에도 존재 하는가
오늘날에도 사도와 선지자는 존재할까? 결론부터 말하면 현시대에 사도와 선지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성경에서 사도는 헬라어로 ‘άπόστολος’(아포스톨로스)로서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다소 단순한 뜻이지만, 역사적으로 예수님의 제자 중 선별된 열두 사도나 바울 등 극히 일부에게만 사용된 특별한 직분이다. 사도의 핵심 사역은 교회를 세우는 일이었다. 이 사역은 현시대에 되풀이될 이유가 없다. 또한, 2001년경부터 제2의 사도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피터 와그너의 주장을 입증할만한 성경적 근거가 없다.
사도 시대 이후 자칭 사도 외에 그 누구도 사도 직분을 사용하지 않았다. 이승구 교수는 “일반적인 직통 계시파는 1세기 사도들의 독특한 지위를 인정하면서 예언 사역이 지속된다고 주장해 왔다”2)고 지적한다.. 하나님의 음성을 귀로 직접 듣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조차 사도의 독특성은 인정했다는 뜻이다.
존 스토트는 “그들(편집자 주: 사도)은 역사적 예수님, 특별히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한 자들(행 1:21~22; 고전 9:1; 15:8~9)이라는 점과 그리스도에 의해 개인적으로 임명되고 권위가 주어졌다는 점(막 3:14) 그리고 가르치는 사역을 위해서 성령의 특별한 영감을 받았다는 점(예를 들면, 요 14:25~26; 16:12~15)에서 독특하다”3)고 전한다. 스토트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사도들의 증거 안에서 완성되었으며, 성경의 정경이 완성된 지 오래이기 때문”4)에 더 이상 선지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밝힌다.
미국의 저명한 개혁주의 신학자 마이클 호튼은 “신약성경은 사도들의 비상한 사역과 목사와 장로의 일상적인 사역 사이에 분명한 선을 긋는다(딤전 6:20; 딤후 1:13~14). 사도들은 그리스도를 직접 목격한 사람들이었고, 바울 또한 자신이 사도직을 교회가 아닌 그리스도에게서 직접적으로 받은 사실을 바탕으로 자신의 사도직을 주장했지만(갈 1:11~23) … 사도들은 직접적으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었고 그들의 말씀 선포와 그들이 쓴 글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인 반면(딤후 3:16), 지금 우리는 성령의 조명을 받아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말을 통해, 목사와 교사의 입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다 … 하나님은 사도와 선지자를 주셨고(엡 4:11)사도 시대의 비상한 사역 속에 신유와 방언과 예언의 은사도 나타났지만 이들 편지에는 사도들의 계승자들이 사도들의 직분으로 안수 받았다는 어떤 가르침도 존재하지 않는다”5)고 전한다.
은사에 대해 신중 수용론적 관점을 가진 로버트 소시 역시 “현재의 교회 사역을 사도들을 계승한 것이라고 믿는 이들조차 최초의 성경적 사도들은 어떤 면에서 유일무이했다는 점에 동의한다”6)며 사도의 독특성은 보편적으로 인정된 견해라고 전한다.
사도와 선지자의 현존을 주장하면 계시에 대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신사도운동가들은 하나같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적인 계시를 받는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지금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같은 말을 그들의 집회에서 자주 들을 수 있는 이유다. 피터 와그너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하나님으로부터의 계시는 두 가지 방식으로 사도들에게 전달된다. 한 가지 방법은 사도 바울과 같은 방식인 직접적으로 계시를 받는 것이다.7)
이 같은 계시관은 성경의 완전성과 절대성을 해친다. 하나님은 현시대의 사람에게 직접 음성을 들려주시며 말씀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이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정경 66권)이 완성된 이후, 그에 준하는 다른 계시는 불필요하다. 성경보다, ‘들었다’에 높은 권위를 부여하는 위험을 초래해선 안 된다. 하나님은 무질서를 조장하시지 않는다. “그리스도가 왔고 그의 사역은 다 이루어졌고, 그의 말씀은 완성되었기 때문에 특별 계시를 새롭게 형성하는 요소들은 더 이상 붙여질 수 없었다”8)는 바빙크의 지적을 깊이 새겨야 한다.
임파테이션: 성령의 능력은 전이 되는가
신사도운동가들은 사도연맹을 만들고 안수를 통해 사도직을 수여한다. 안수로 성령의 능력을 전이시킬 수 있다는 일명 ‘impartation’(임파테이션)을 주장한다. 집회 도중 쓰러지고 바닥에 뒹구는 현상은 성령의 능력을 전이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근거 구절로 로마서 1장 11절을 제시한다.
로마서 1장 11절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임파테이션은 11절의 ‘나누어 주다’라는 뜻을 가진 영어 단어 ‘impart’에서 유래했다. 본문을 얼핏 보면 바울이 신령한 은사를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길 원하고 그것이 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은사’는 하나님의 주권으로 주어진다.
로마서 12장 6절(상)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고린도전서 12장 11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바울이 상호 모순되는 말을 한 것일까? 많은 사람이 ‘은사’라고 하면 신비한 능력을 떠올린다. 잘못된 선입관이다. ‘은사’는 헬라어로 ‘χ́αρισμα’(카리스마) 인데 이는 ‘χ́αρις’(카리스)에서 유래한 단어다. 카리스는 신약성경에서 100회 이상 사용된다. 많은 경우 은혜로 사용되지만, 감사(롬 6:17; 롬 7:25), 아름다움(벧전 2:19, 20), 칭송(행 2:47), 마음(행24:27)등 다양한 의미를 가진다. 한 단어가 여러 뜻으로 사용되면, 정확한 해석을 위해 다른 본문에서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예(용례)를 찾거나 문맥을 통해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바울은 자기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와 사랑을 로마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마음을 드러냈을 뿐 신비한 능력을 나누어 주겠다고 말하지 않았다. 바울이 이를 ‘신령한πνευματικος, 프뉴마티코스’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자신이 받은 은혜와 사랑이 ‘성령’으로부터 왔기 때문이다. 바울의 의도는 12절에서 확실하게 드러난다.
로마서 1장 12절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바울은 로마인들에게 자신이 가진 신비한 능력을 할당해 주길 원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길 원했고 이 과정이 일방통행이 되지 않길 소망했다. 존 스토트는 바울의 모습을 두고 “비록 사도이기는 하지만 자신에게 그러한 교제가 필요함을 인정하지 않을 만큼 교만하지 않다”9)라고 말한다.
일곱 산: 부로 이루는 하나님 나라
피터 와그너는 인간이 아담의 타락으로 사탄에게 빼앗긴 세상의 통치권을 다시 찾아와야 한다는 ‘통치신학 Dominion, 통치’을 주장한다. 신사도운동은 세상을 종교, 가정, 교육, 정부, 미디어, 예술과 연예, 비즈니스 등 일곱 영역으로 나누고 이를 ‘Seven mountain’(일곱 산)이라고 지칭한다.
일곱 산을 정복해 사회변혁을 일으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겠다고 말한다. 정복한 산 꼭대기에 사도가 위치한다. 일곱 산의 정복을 예수님의 재림과 연결시켜 하나님 나라 건설이 빨라질수록 예수님께서도 더 속히 오신다고 밝힌다.
신사도운동가들은 이 세상에 이룰 하나님 나라에 초점을 맞추는데, 사람의 힘으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할 수 있다는 오만함이 보인다. 저들에 의하면 예수님은 이 세계에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 재림하시는 분이다. 하지만 실상은 그 반대다.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일곱 산을 정복해서가 아닌 예수님의 재림으로 이뤄진다.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는 것(마 24:7), 진리가 미움을 당하는 것(요15:18)이 바로 말세의 징조요 예수님의 말씀이다. 그런데 어떻게 인간의 힘으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해 예수님의 재림을 앞당길 수 있을까.
더 심각한 문제는 신사도운동가들이 ‘돈’을 일곱 산 정복을 위한 수단으로 선택했다는 점이다. 신사도운동 집회에서 ‘부의 이동’, ‘가난의 영을 파쇄하라’, ‘번영의 영을 초청하라’는 등의 말을 쉽게 들을 수 있다. 피터 와그너는 폭력, 지식, 부가 다른 무엇보다 사회를 변혁시켜온 주체인데 특히 부의 영향력이 막강하다고 말한다. 와그너는 “인류 역사를 통틀어 다른 무엇보다도 세 가지가 사회를 변혁시켰다. 폭력, 지식, 그리고 부였다. 그리고 이들 중에서 부의 영향력이 가장 막강하다! 심지어 성경에도 ‘돈은 범사에 이용되느니라’고 기록되어 있다(전 10:19). 지루한 과정이 있었지만 마침내 나는 부를 영적인 질병처럼 경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위해 부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감탄하기 시작했다”10)고 밝힌다.
와그너는 부를 이용하라는 자신의 주장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돈은 범사에 이용되느니라’라는 전도서 말씀을 근거로 제시했다. 하지만 문맥을 무시한 해석을 했다. 전도서 10장 16~20절은 화 있는 나라 와 복 있는 나라의 특징에 대한 설명이다.
전도서 10장 16절 왕은 어리고 대신들은 아침부터 잔치하는 나라여 네게 화가 있도다
17절 왕은 귀족들의 아들이요 대신들은 취하지 아니하고 기력을 보하려고 정한 때에 먹는 나라여 네게 복이 있도다
18절 게으른즉 서까래가 내려앉고 손을 놓은즉 집이 새느니라
19절 잔치는 희락을 위하여 베푸는 것이요 포도주는 생명을 기쁘게 하는 것이나 돈은 범사에 이용되느니라
20절 심중에라도 왕을 저주하지 말며 침실에서라도 부자를 저주하지 말라 공중의 새가 그 소리를 전하고 날짐승이 그 일을 전파할 것임이니라
19절은 화있는 나라 사람의 특징이다. 화 있는 나라 사람은 쾌락을 위해 포도주를 마시고 돈으로 모든 일을 처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돈을 하나님과 견주어 비교하면서까지 경계하라고 당부하셨다(마 6:24). 물질이 주는 유혹이 너무나 커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고 하셨다(마 19:23). 부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이룰 수 있다면 예수님은 왜 그토록 돈의 위험성을 경고하셨을까? 하나님 나라는 돈으로 확장시켜나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특징은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다(롬 14:17). 하나님 나라는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헌신한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삶에 하나님의 신적 통치가 이루어지며 확장된다.
영적 도해: 지역을 장악하는 귀신
통치신학을 통해 신사도운동의 세계관을 알 수 있다. 신사도운동은 하나님과 사탄의 대결구도라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이 사상의 결과물이 영적 도해이고, 이는 지역 귀신론과 땅 밟기로 이어진다. 영적 도해란 이 세상을 하나님이 지배하는 영역과 사단이 지배하는 영역으로 나누어 놓은 소위 영적인 지도다. 지역을 지배하는 귀신이 있는데 그 땅에 들어가 기도와 찬송으로 지역의 귀신을 무찌르는 것이 땅 밟기다.
영적 도해와 지역 귀신론은 성경이 아닌 순전히 피터 와그너의 경험에서 도출된 사상이다. 와그너는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지역의 영들의 영역에서 주도권을 쥐기를 원한다는 음성을 선명하게 들었다며 이 말씀이 마귀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 초보자였던 사람에게 놀라운 임무였다”11)고 주장한다. 모든 신학적 명제는 성경을 기초로 만들어져야 한다. 지역 귀신론을 지지하는 단 한 구절의 성경말씀도 찾아 볼 수 없다. 김재성 교수는 “성경은 지역적인 귀신들의 개념을 지지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직접적으로 지역적인 귀신들과 정면대립하거나 그 어떤 방식으로든지 상호작용을 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없다. 예수님은 결코 어떤 지역에 가셔서 그 곳의 세상 권세를 장악하고 있다고 하는 귀신들을 결박하는 일을 중심사역으로 전개하신 적이 없다”12)고 지적한다.
열린 유신론: 미래를 보시지 않는 하나님
피터 와그너는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놀라실 뿐만 아니라 마음도 바꾸실 수 있다”며 자신을 열린 유신론자라고 밝힌다. 열린 유신론Open Theism이란 캐나다 출신의 신학자 클락 피노크가 주창한 것으로 개방 신론이라고도 불린다. 열린 유신론자들은 미래가 부분적으로 확정되어 있지 않고 ‘열려’있는 것은 하나님도 마찬가지라고 주장한다.13) 하나님은 미래를 스스로 알지 않기로 작정하고 피조물의 의지에 따라 자신이 어떻게 행동할지 결정한다는 뜻이다.
피터 와그너의 말처럼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 미래에 눈감고 계시며 피조물의 의지를 적극 지지하시는 분일까? 하나님은 때때로 놀라실 뿐 만 아니라 마음을 바꾸실 수도 있을까? R.C. 스프로울은 이렇게 반문한다.
내 기도에 하나님의 마음을 바꾸게 하는 것이 있는가?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고자할 때, 내 기도 이전에는 하나님조차 정보나 지식에서 부족한 어떤 것이 있는가? 내가 기도할 때 하나님의 마음을 변화시킬 만한 정보, 지시 혹은 충고를 하나님께 할 수 있는가? … 우리는 하나님의 자신의 경륜에도 없는 그런 지혜를 가지고 있지 못한다.14)
열린 유신론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초월성을 제한하는 사상이다. 열린 유신론은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잠 16:9)는 말씀에 정면으로 대치되며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 22:42)라는 예수님의 기도를 무의미하게 만든다.
각종 신비주의 현상과 종교의 영
신사도운동가들의 집회에서는 직통 계시, 입신, 치유, 집단 방언 등의 현상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신사도운동가들은 이런 현상이 교회 성장에 필수적인 요소라고 생각한다. 저들은 교회는 언제나 동일한 방식으로 성장하지 않았다며, 신사도운동이 오늘날 교회 성장의 새 가죽부대라고 주장한다. 와그너는 지난 2014년 1월 6~9일, 한국에서 열린 HIM 회복 콘퍼런스에서 신사도운동은 새 포도주를 담는 새 부대지만, 교단주의는 새 포도주를 담을 수 없는 옛 부대라고 비판했다.
신사도운동가들은 자신들의 사상에 반대하는 자들을 종교의 영에 사로잡혔다고 비판한다. 와그너가 말하는 종교의 영이란 “종교적인 계략들을 사용함으로써 변화를 막고 현재의 상태에 머물도록 임무를 부여받은 사탄의 대행자”15)다. 종교의 영이라는 말은 성경에 없다. 이 같은 주장은 “신사도운동가들은 종교의 영에 사로잡혀 있다”는 반대논리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성경의 지지를 받을 수 없는 영을 만들어 그 사상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싸잡아 비판하는 것은 배타주의요 교조주의일 뿐이다.
신사도운동 어디서 유래했나
서두에서도 밝혔지만 신사도운동은 피터 와그너의 창작물로 보기 어렵다. 신사도운동은 어딘가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와그너 역시 자신이 영향 받은 인물이나 단체, 사상들을 자주 언급한다. 와그너는 신사도 운동의 뿌리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신사도 개혁 운동의 뿌리는 1900년 아프리카 독립교회 운동이 처음으로 시작된 당시로 올라간다. 1975년경에 시작된 중국 가정교회 운동과 1980년경에 출현한 라틴 아메리카의 대중교회 운동도 다른 대륙에서 나타난 동일한 영적 현상의 일부분들이다. 1970년경에 나타난 미국의 독립적 은사주의 교회들도 현재의 신사도적 개혁 운동에 가장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선구자이다.16)
신사도운동에 영향을 준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윌리엄 브랜험(William Branham)이다. 행크 해네그래프에 따르면 윌리엄 브램험은 삼위일체를 거부하고, 종말의 대략적인 일자를 정하는 오류를 범했다.
브란함은 “1977년쯤에는 로마 가톨릭 통제 아래 모든 분파가 세계교회협의회에 속할 것이고 그러면 휴거가 일어나고 세계는 파괴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 브란함의 빗나간 예언은 브란함의 잘못된 교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브란함은 ‘뱀의 씨앗 교리’를 주장하며, 이브가 뱀과 관계를 맺어 가인을 잉태했다고 주장했다. … 브란함은 성경적 삼위일체 교리를 강경하게 거부했다. … 브란함은 “삼위일체론으로 세례받은 사람들은 오직 예수의 이름으로 다시 세례를 받아야한다”고 주장했다.17)
빈야드 운동의 창시자 존 윔버도 빼놓을 수 없다. 피터 와그너는 치유나 축사 사역은 존 윔버에게 막대한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한다. 이 밖에 피터 와그너는 영적 도해와 지역귀신론은 오스카 쿨만, 잭 헤이포드, 조용기 목사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다. 또한 조용기 목사와 빌 헤몬이 가난의 영을 파쇄하는 데 도움을 줬다고 밝혔다. 자신이 열린 유신론자가 된 결정적인 계기는 대표적 열린 유신론자들인 클라크 피녹, 존 샌더스, 그레그 보이드의 책을 접하면서고, 세상을 구성하는 일곱 산에 대한 패러다임은 랜스 월나우를 초청한 콘퍼런스에서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신사도운동은 기독교 역사 속에서 발흥과 쇠퇴를 반복해온 많은 운동과 사상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며 와그너가 체계화해 극대화한 하나의 무브먼트로 이해할 수 있다.
신사도운동? 신사도적 운동?
어떤 단체가 신사도운동을 하는 곳인지를 따져보려면 제일 먼저 사도직을 인정하고 통치신학, 열린 유신론, 영적 도해 등을 주장하는지 살펴야 한다. 사도직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신사도운동이라 보기 어렵다. 하지만 “우리는 사도직을 인정하지 않으니 신사도운동이 아니다”라고 발뺌하면서도 신사도운동이 가진 신학을 일부 차용하는 단체들이 있다. 사도를 인정하지 않아도 많은 부분 신사도운동과 유사점이 있다면 신사도적 운동이라고 표현하는 것을 제안한다.
신사도운동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자임을 천명하고, 성경 무오설을 지지한다. 하지만 1세기의 특수한 직분인 사도가 현시대에도 존재하고 하나님으로부터 특별계시를 받는다고 주장한다. 영적도해, 지역귀신론이 특별계시에서 파생되었으며, 극단적 신비주의 집회를 낳았다. 잘못된 성경 해석으로 하나님 나라를 부로 이루겠다는 주장까지 펼치며 반대자들은 종교의 영에 사로잡혔다고 비판한다. 이처럼 신사도운동은 여러모로 성도들의 올바른 신앙을 위협하는 불건전한 사상이다.
1) 피터 와그너, 『Dominion』(서종대 역, WLI KOREA, 2007), 23.
2) 이승구, 『거짓과 분별』(예책, 2014), 205.
3) 존 스토트, 『성령 세례와 충만』(김현회 역, IVP, 2014), 125.
4) 같은 책, 126.
5) 마이클 호튼, 『개혁주의 조직신학』(이용중 역, 부흥과개혁사, 2012), 881-882.
6) 리처드 개핀 외 3인, 『기적의 은사는 오늘날에도 있는가』(이용중 역, 부흥과개혁사, 2009), 132.
7) 피터 와그너, 『사도와 선지자』(임수산 역, 쉐키나, 2008), 55.
8) 헤르만 바빙크, 『개혁교의학1』(박태현 역, 부흥과개혁사, 2011), 470.
9) 존 스토트, 『로마서 강해』(정옥배 역, IVP, 1996), 126.
10) 피터 와그너, 『변화를 위한 지침서』(진현우 역, WLI KOREA, 2014), 362.
11) 같은 책 158.
12) 김재성, 『교회를 허무는 두 대적』(킹덤북스, 2013), 36.
13) 그레고리 A. 보이드, 폴 R. 에디, 『복음주의 신학 논쟁』(박찬호 역, CLC, 2014), 113.
14) R.C. 스프로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해설1』(이상웅, 김창영 역, 부흥과개혁사, 2011), 77.
15) 피터 와그너, 『종교의 영으로부터의 자유』(김도현 역, WLI KOREA, 2008), 20.
16) 피터 와그너, 『Dominion』(서종대 역, WLI 31), 25.
17) 행크 해네그래프, 『빈야드와 신사도의 가짜 부흥운동』(이선숙 역, 부흥과개혁사, 2009), 257-258.
조믿음 기자 jogogo@hanmail.net
손재익 목사의 십계명 바르게 이해하기(1)
사도신경, 주기도문, 그리고 십계명
교회를 다니면 가장 많이 하는 것이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주일에도 예배, 수요일에도 예배, 그 외 각종 모임에서 예배를 드립니다. 예배 시간에 빠지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사도신경과 주기도문 입니다. 주일 공예배는 물론 수요기도회, 그 외에 짧게 드리는 예배 중에도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은 빠지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예배를 사도신경으로 시작하고 주기도문으로 마칩니다. 이유가 뭘까요? 두 가지가 매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사도신경, 주기도문과 함께 중요하게 여겨졌던 것이 있습니다. 오늘날 소외되는 십계명 입니다. 사도신경, 주기도문, 십계명 이 세 가지는 원래 주일 공예배때 빠지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십계명을 빼지 않고 예배드리는 교회들이 많습니다. 이 세 가지가 중요하기 때문에 찬송가나 성경의 첫 페이지와 마지막 페이지에 실려 있습니다. 실제로 교회 역사 속에서 기독교인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교리였습니다. 사도신경, 십계명, 주기도문은 그리스도인들이 알아야 가장 기초적이면서도 가장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사도신경은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믿는가?”를 주기도문은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를, 십계명은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요약해 놓았습니다. 이 세 가지에 대한 명확한 이해는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생활에 유익이 됩니다.
▲손재익 목사
잊혀진 십계명
그런데 언젠가부터 십계명이 덜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습니다. 사도신경이나 주기도문은 잘 암송하는데, 십계명은 암송은커녕 몇 계명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가령 제6계명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으면 대답하기를 주저하는 그리스도인들이 태반입니다. 심지어 신앙생활을 수십 년 하신 분도 답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십계명은 교회에서도 잘 가르치고 배우지 않습니다. 5월 둘째 주일이면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설교는 많이 듣지만, 그 외에 계명을 다룬 설교를 듣기 어렵습니다. 그래서일까요? 한국교회가 요즘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 당합니다. 윤리의식이 세상보다 못하다고 비난당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요약해 놓은 십계명을 알지 모르기 때문 아닐까요?
앞으로 다룰 내용들
지금 이 글을 읽고 독자 중에도 십계명을 잘 모르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십계명 바르게 이해하기”라는 시리즈를 통해 십계명에 대해서 배워보겠습니다. 앞으로 이 시리즈를 통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다루려고 합니다. 먼저 십계명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알고 각 계명의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이 때 각 계명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도 알아보겠습니다. 그리고 ▲십계명은 율법이니까 복음 시대를 사는 우리들은 안 지켜도 되는 것 아닌가요? ▲살인, 간음, 도둑질 같은 큰 죄를 지은 적도 없고 지을 가능성도 없습니다. 이미 저는 잘 지키고 있습니다 ▲십계명을 지키면 복을 받나요? ▲십계명이 족쇄 같아요. 그냥 은혜로 살면 되지 않나요? 등 주변에서 자주 듣는 질문과 오해도 풀어보겠습니다.
위의 내용들을 통해 십계명을 바르게 이해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독자들 되길 바랍니다.
편집자 주: 필자 손재익 목사는 한길교회(http://cafe.daum.net/hgpch)를 담임하고 있다. 저서로 『십계명, 언약의 10가지 말씀』(디다스코)이 있다.
손재익 목사 bareunmedia@gmail.com
장상태 목사의 성경 오해 풀고 읽기(1)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장에 따르면, 성경의 원저자는 하나님이시며(WC.1.4),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주어진 것으로 신앙과 생활의 규범이다(WC.1.2). 또한 무오한 진리와 성경의 신적 권위에 대한 충분한 설득과 확신은 우리의 마음 속에서 말씀으로, 말씀과 함께 증거 하시는 성령의 내적사역에서 오는 것이다.(WC.1.5). 하나님은 성경이 기록될 당시에 언어적, 사회적, 문화적, 문학적 요소를 모두 사용하셔서 자신의 뜻을 계시하셨다. 이것은 성경 저자들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당시의 다양한 배경을 알아야 한다. 이것을 위해서 개혁주의 전통은 문법적, 역사적, 신학적 방법으로 성경을 해석했다.
![]() ▲장상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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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법적 이해는 성경이 기록될 당시의 언어와 문체, 문법 구조, 전후문맥, 서술 방법, 표현 방법 등에 대한 내용이며, 역사적 이해는 저자와 독자의 독특한 역사적, 문화적 상황에 대한 내용이다. 신학적 이해는 구원계시사와 언약의 성취, 하나님 나라 등과 같은 정통개혁교리에 근거한 내용이다. 이를 토대로 성경을 자세히 읽고, 연구할 때, 성경에 대한 오독과 오해를 줄이며, 성경 저자인 하나님의 뜻과 의도를 신앙과 생활규범을 위해서 분명하게 드러낼 수 있다.
본 성경연구는 개혁주의 해석 방법을 통한 성경연구로, 성경본문에 대한 오해를 풀고 본래의 의미를 드러내며, 인간의 타락과 죄의 영향,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 영광과 섭리 등을 통한 정통교리를 본문에서 찾아 바른 신앙으로 인도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어떤 복음성가에 “주의 말씀 의지하여 믿음으로 그물 던져 믿는 자에겐 능치 못함 없네”라는 가사가 있다. 이 가사에 따르면, 베드로가 마치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신앙적인 큰 믿음을 가지고 순종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포기하는 순종의 결단으로, 우리도 믿음을 가지면 능치 못한 일이 없다는 의미를 전달한다. 그러나 성경 본문을 살펴보면 몇 가지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이 나온다.
베드로가 정말 말씀에 대한 온전한 순종으로 결단해서 놀라운 역사를 경험했다면, 예수님께 감사할 수도 있다. 혹은, 백부장처럼 예수님의 칭찬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왜 예수님께 나와서 “무릎 아래” 엎드렸을까? 그리고 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라는 고백을 했을까? 자연스럽지 않은 연결이다. 베드로가 순종적인 믿음의 결단으로 “말씀에 의지”했다면 왜 두 번의 변명을 하며 가지 않으려고 했을까? 베드로가 처음 제자로 부름을 받을 때, 이렇게 완성도 높은 신앙을 가지고 있었을까?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기기 어렵다.
본문에서 과연 베드로가 진짜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서 인식하고, 그 말씀이 생명의 말씀인 줄 알고 “그물을 던진 것일까.” 합리적인 의구심을 가지고 본문의 뜻을 찾아가면, 본문의 본래 의도를 알 수 있다. 베드로라는 사람이 주인공이 아니라, 베드로를 부르신 예수 그리스도가 보이며, 어떻게 한 사람을 제자로 부르시며 이끌어 가시는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로 본문을 다시 읽을 수 있다.
먼저, 이 본문은 베드로가 얼마나 예수님과 말씀에 대해서 무관심했는지 암시하는 장면으로 시작하고 있다. 1절과 2절은 매우 극적인 대비를 보여준다. 1절에서 “무리”의 그룹과 2절에서 “어부들”의 두 그룹을 보여주고 있다. 영화를 찍는다면, 1절에서 “무리” 그룹이 말씀을 듣기 위해서 예수님을 에워싸고 말씀을 듣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2절에서 말씀을 듣지 않고 생업에 바쁜 “어부들”의 일상을 대비시키고 있다. 이 장면은, “왜 어부들은 저 무리 속에 있지 않을까?” 라는 의문을 들게 한다. 더욱이 예수님은 당시 소문이 퍼져서 알려지기 시작하던 초기였다. 게네사렛 호숫가의 어부들은 이 사실을 몰랐다고 볼 수 없다. 특히, 베드로는 장모의 열병을 치료받는 기적을 경험했고(눅4:38). 안드레의 소개로 예수님을 만나기도 했다(요1:42). 두 번이나 예수님을 만나서 말씀을 듣고 기적까지 체험을 했다면, 베드로가 무리 속에 들어가서,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은, 예수님을 랍비 정도로 인식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것은 본문 5절에서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호칭에서도 알 수 있다.
따라서,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베드로를 그냥 두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무리에게만 말씀을 전하고 끝난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베드로에게 다가가신다. 3절에서 예수님은 “한 배”에 오르신다. 이 배는 시몬의 배였다. 어부에게 배는 중요한 생계 수단이다. 예로부터 어부들은 배에 아무나 태우지 않는다. 배를 타고 고기를 잡으러 갔다가 사고로 돌아오지 못하거나 실종되는 사건이 어촌에서는 비일비재하다. 그렇기 때문에 배에서 고사를 지내거나, 신의 이름을 따서 배를 명명하는 경우들이 있다. 더욱이 예수님은 어부도 아니고 목수이시며, 베드로가 사는 동네 사람도 아니었다. 이런 분이 베드로의 배에 올라서 “가르치실 때” 베드로는 쳐다보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매우 신경이 쓰였을 것이다.
이때, 예수님이 매우 무리한 요구를 하신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 베드로는 이 말을 듣고, 바로 순종하지 않는다. “밤이 새도록” 수고했고, “잡은 것이 없지마는”이라고 변명을 한다. 그리고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겠다고 말한다. 몇 근거로 베드로가 믿음 없이, 마지못해서 대답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먼저, 베드로는 예수님을 향해서, “선생님”(에피스타타)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8절의 “주여”(퀴리에)와 대조적인 단어이다. 또한 “말씀에 의지하여”라고 할 때, 1절에서 나온 “하나님의 말씀”에서 “로고스”와 대조적인 “레마”라는 단어를 쓰고 있다. 더욱이, 5절은 정황상 베드로가 수많은 무리에 둘려 싸여 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1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던 무리들은, 예수님의 시야에 들어온(2절) 매우 가까이에 있는 배로 이동할 때, 함께 이동해서 주변에 함께 있었다.
이러한 이유들로 베드로는 많은 무리들에게 둘러싸인 채로, 어쩔 수 없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다가, 무리가 보는 가운데서 예수님의 요구를 받아들이게 된다. 이 상황은 베드로가 예수님의 요구를 피하기 매우 어렵게 만든다. 이때, 예수님이 베드로가 빠져 나갈 수 없는 요청을 하신다. 베드로는 “깊은 데로”라는 요구를 무방비 상태에서 받게 되는 것이다. 베드로는 바로 순종하지 않고 “밤이 맞도록 수고”하였다고 말하며, “잡은 것이 없지마는”이라고 두 가지 이유로 변명을 하지만, 모든 무리가 쳐다보고 있고, 안면이 있는 예수님의 요구에 어쩔 수 없이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베드로가 “말씀에 의지하여”라고 말한 것은 베드로의 인간적인 결단에 포인트가 있지 않다. 베드로의 신앙적 결단에 주목하면, 인간적인 결단이 마치 하나님의 역사와 기적을 불러 오는 것 같은 오류를 범한다. 반대로 생각해야 한다. 기적을 경험했고, 예수님을 예전에 만났고 말씀을 들었지만, 예수님께 나오지 않는 베드로를 찾아오신 예수님의 선택과 은혜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
이 본문은 예수님께서 어떻게 죄인인 인간을 선택하시고 찾아오셔서, 말씀하시고 제자로 삼아서, 참된 진리를 알게 하시는지 놀랍고 또 놀라운 그분의 부르심에 집중해야 한다. 비단 베드로뿐만 아니라, 오늘날 선택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베드로와 똑같은 과정을 통해서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베드로보다 더 완악한 모습으로 복음을 거절하다가 하나님의 예정된 선택으로 부름 받고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무한한 영광과 찬양을 올려 드려야 한다.
누가복음 5:1-11
1 무리가 몰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2 호숫가에 배 두 척이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3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4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5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6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7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9 이는 자기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으로 말미암아 놀라고
10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11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편집자 주: 필자 장상태 목사는 좋은우리교회를 담임하고, 튤립성경연구 섬김이, 디다스코 출판사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장상태 목사 jangsstt@naver.com
중국은 대국이다. 인구는 14억을 헤아리고 남한 면적의 100배에 달하는 영토를 보유하고 있다. 중국 교회도 매한가지이다. 기독교인의 숫자는 이미 1억 명을 넘어선 지 오래이다. 중국 교회에 이렇게 많은 교인이 밀려 든 것은 개혁 개방 정책이 추진된 1978년 이후부터 오늘에 이르는 단기간의 일이다. 그 이전에는 1천만 명 이내였다고 여겨진다.
매우 짧은 기간에 폭발적인 성장을 하게 된 중국 교회는 내실의 부족으로 갖가지 문제점이 노출되고 있는데, 가장 큰 골칫거리는 이단사이비 문제이다. 그도 그럴 것이 중국 전체 기독교인 중 대략 1/3 가량은 이단에 물들어있다고 봐야 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심각한 수준이 아닐 수 없다. 외국에서 전래된 이단도 많지만 최근에는 중국에서 자생한 이단들이 더 많아지고 있다. 중국에서 자생한 이단 사이비 종파들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을까?
1. 교주 신격화
이단의 유형은 크게 2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Cult와 Herecy 이다. 전자는 교주 혹은 지도자를 중심으로 운영되는 것이며 후자는 특정 교리를 중심으로 단체가 이끌어 가는 형태이다. 오늘날 중국의 이단들 중에는 Cult가 압도적으로 많다. 중국 이단은 교주 신격화 경향이 강한데, 옛 중국의 황제숭배에 비견될 만하다. 이는 중국 이단들이 이성보다 권위로 다스리는 형태가 강하기 때문이다.
신도들은 교주의 환심을 사기 위해 자기 재산을 모두 바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또한 한국의 JMS(정명석)처럼 교주에게 정조를 바치는 여성도 허다한 실정이다. 심지어는 교주의 명령을 받들어 사람을 해친다. 삼반복인이라는 이단 종파의 교주 서문고(徐文庫, 쉬원쿠)는 신도들에게 거둬들인 돈으로 갖은 사치 생활을 하였는데 고급 차량만 십여 대였다.
2. 체계화되는 교리
중국 이단들은 성경의 터무니없는 왜곡성향이 아직 강하다. 성경 교리를 가르치는데 대부분 아전인수격이다. 너무 황당해서 웃음이 나올법한 경우도 많다. 영영교의 교주 화설화(和雪華)는 자기 이름과 여호와의 이름이 유사하기에 자기가 하나님 이라고 주장하였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그의 말을 믿고 따랐다. 지식수준이 낮은 농촌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잘 통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중국 이단 사이비들도 현재는 농촌에서만 활동하지 않고 도회지로 밀려들어 오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교리도 점차 고도화하고 있는 추세이다.
중국에서 특별히 신학적 수준이 높은 이단사이비는 한국에 지방교회라고 알려진 이상수(위트니스 리)의 호함파(號喊派)이다. 한국에서도 골칫거리인 이들은 그럴싸한 논리로 중국교회를 미혹하고 있는데 그 규모는 전국적으로 1천만 명을 넘어선 지 오래이다. 이 호함파로부터 중국의 악명 높은 많은 이단들이 파생하였는데 그 중의 대표적인 단체가 한국에까지 들어와 ‘전능하신 하나님의 교회(전능신교)’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는 동방번개 파이다.
3. 윤리의식 결여와 반국가적 행태
많은 이단 종파들이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한국의 이단들, 특별히 신천지는 거짓말도 지혜요 합당한 방법이라고 하는데 정상적인 사람들은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비상식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중국 이단 사이비들에게 있어서 신천지는 심한 축에도 끼지 못한다. 중국 현지에서 가장 악질적인 사이비인 동방번개는 범죄집단 자체라고 봐도 된다. 납치, 살인, 상해, 집단강간 등 사용하지 않는 방법이 없다. 산동성의 맥도날드 매장에서 포교하다가 사람을 쳐 죽인 일화는 그들의 비윤리성을 잘 대변해준다.
뿐만 아니라 중국 이단 사이비들은 궁극적으로는 국가를 전복시키고 자기들이 권력을 쟁취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중국에서 이름을 날리는 이단 사이비 집단은 대부분 그런 목표를 가지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러므로 중국 정부 당국도 이단 사이비 문제에는 매우 민감하게 대응한다. 비기독교계 사이비 종파인 법륜공(法輪功)이 중국정부로부터 큰 박해를 받고 대륙에서는 이제 거의 와해 상태에 빠진 이유도 체제 도전적인 태도를 취했기 때문이었다.
4. 특별한 행동의 반복
중국 이단들은 무언가 특별한 자기들만의 행위를 반복하도록 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곡파(哭派)’라고도 불리는 ‘중생파’는 집회 시 울어야만 구원을 받은 것으로 여긴다. 그것도 3일을 연속으로 울어야 한다고 가르치는데, 사람이 울다가 죽는 일도 벌어진다. 호함파의 경우는 일반적으로 ‘오 주’를 반복하는데 더 극단적인 일파는 자기들끼리 모여 특정한 구호를 밤새도록 외치기도 한다. 냉수파는 모든 문제를 냉수로 해결 하려 한다. 동방번개의 경우는 천인합일(天人合一)이라는 미명 아래 집단 음란행위를 주기적으로 반복하기도 하는데 이는 조직의 결속을 높이기 위함이다.
송요한 선교사 bareunmedia@gmail.com
호주 여행지로 손꼽히는 도시인 멜버른(Melbourne). 공항에 도착하면 보통은 셔틀버스를 타고 서던크로스 역(Southern Cross Station)으로 직행한다. 특별히 다른 교통수단을 구하지 않은 방문객 대부분이 이 역을 거친다. 트레인과 연결된 꽤나 큰 이 역에 도착하고 나서야 다들 각자 목적지로 흩어진다. 필자가 여행 차 멜버른에 들렀던 올 2월 초, 서던크로스 역사 곳곳의 광고들이 뿔뿔이 제 길 가는 객들에게 ‘몰몬교에서 찾으라’고 권하고 있었다.
![]() ▲페더레이션 광장에 세워진 몰몬교 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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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버른 여행자가 꼭 들르는 곳이 페더레이션 광장(Federation Square)이다. 맞은편에 있는 플린더스 역(Flinders street station)은 도시 교통의 중심이고, 광장 가운데에 방문자센터(Melbourne visitor centre)가 있어서 이방인을 돕는다. 잠깐 들러 기념사진을 찍는데 방문자 센터 옆에 있던 ‘몰몬경(The book of Mormon)’ 부스가 자꾸 화면에 걸렸다. 부스 주변에는 몰몬교 신자로 보이는 몇몇이 눈에 띄었다.
![]() ▲ 서던크로스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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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만의 사정, ‘뮤지컬 몰몬경’과 ‘경전 몰몬경’
그때 멜버른에는 ‘몰몬경(The book of Mormon)’이라는 뮤지컬이 정기적으로 공연되고 있었다. 방문자센터에 팸플릿이 꽂혀 있었다. 2011년 첫 공연 이후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크게 성공한 이 공연은, 상당히 권위 있는 토니 어워드를 수상하기도 했다. 제목만 보고 몰몬교 홍보물인줄만 알았다. 그러나 뮤지컬 몰몬경은 몰몬교(혹은 종교)를 패러디한 풍자극이었다.
몰몬교에 자신들의 경전 이름을 내건 이런 종류의 공연이 껄끄러운 건 당연하다. 뮤지컬이 흥행하자 미국 몰몬교는 “이 공연은 저녁의 관객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제작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성서로서 몰몬경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 더 가까이 초청함으로써 영원히 그들의 삶을 바꿀 수 있다”는 공식적인 입장을 내놨다. 당시에는 몰몬교가 연극 광고 안내문의 광고 면을 사들여 “당신이 연극을 보았다면, 이제 몰몬경을 읽으라” 등의 광고를 실었다고 한다.
![]() ▲뮤지컬 몰몬경 공연 사진(출처: bookofmormonmusical.com.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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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버른 광장에 자랑스레 세워 놓은 몰몬경 모양의 부스와 한창 상영 중인 뮤지컬 몰몬경은 무슨 관계일까. 여행자로서 도시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기는 어렵다. 몰몬교가 유동인구가 집중되는 역과 광장에서 홍보에 힘쓰는 일이 그들의 경전을 패러디한 뮤지컬에 대한 대응일 수 있겠다고 짐작할 뿐이다. 다만, 이방인의 눈에 몰몬교의 멜버른은 논쟁의 현장이자 사투의 공간으로 보였다. 논쟁적일수록 관심사가 될 테고, 반복해서 노출될수록 경계심은 느슨해 질 거다.
이민자의 나라에서 몰몬교의 생존법
호주의 대도시에서 몰몬교는 자주 접하게 되는 종교다. 브리즈번(Brisbane)이라는 도시에 3개월 정도 체류한 적이 있다. 많은 이들의 만남의 장소인 퀸 스트리트(Queen street)에 가면 몰몬교 특유의 복식을 갖춘 신자들이 포교의 대상을 찾는다. 혼자 있다 눈을 마주치기라도 하면 한번은 말을 섞어야 한다. 도시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브리즈번 강의 밤 풍경에는 천사 모로나이가 저 멀리 몰몬교 성전 첨탑 꼭대기에서 황금빛을 낸다.
브리즈번 써니뱅크(Sunnybank)라는 지역에는 중국인들이 많이 거주한다. 몰몬교 신자들은 그곳 버스정류장 앞에서 포교 대상자를 찾는다. 대면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그들의 포교법이 얼마나 효과적이냐는 별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건 단 한명의 중국인이 몰몬교로 개종했을 때 나타날 수 있는 파급력이다. 호주는 다양한 인종과 국적을 지닌 사람들이 모여드는 자타공인 이민자의 국가다.
호주 몰몬교 신자가 접촉하는 포교 대상자는 전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다. 호주 최대의 도시 시드니에 오면 온 세계의 종교가 보인다. 교회, 성당, 모스크(이슬람), 사찰(불교), 만디르(힌두교). 유입되는 이민자만큼이나 그들의 종교는 경쟁적으로 들어왔다. 몰몬교도 이중 하나다. 신자들이 시드니 센트럴 역(Central station) 앞에서 그들만의 복음을 전하는 걸 본다. 이곳의 다른 종교처럼 몰몬교는, 삶의 방향을 찾는 호주인과 생존해야만 하는 이민자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그들의 방식으로 분투하고 있다.
이용규 객원기자 bareunmedia@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