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작하면서
기독교는 초월적 계시에 따른 창조와 종말의 교리를 가진 종교이다. 즉 기독교는 성경 계시 속에 창조론과 종말론을 가지고 있다. 이 시작과 마지막에 대한 기독교 계시가 인간 중심의 세상 철학이나 다른 종교들과 갈등과 긴장과 충돌을 야기하기도 한다. 이 서로 간 갈라진 견해의 틈새를 메울 수 있는 도구가 있을까? 대중들을 모두 만족하고 설득할 수 있는 도구는 당연히 없다. 이것이 또한 많은 세계관 사이의 공공연한 논쟁을 만들어내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심지어 창조론과 종말론은 기독교 신학 안에서도 일치되지 않는 균열의 틈새를 가지고 있다. 성경 계시 안의 창조와 종말이 하나님의 계시임은 분명하나 모든 인류와 시대를 초월하여 모두를 만족할만한 창조와 종말의 구체적 양상에 대해서는 침묵하기 때문이다. 이 여백과 틈새를 어떻게 불러야 할까?
성경의 이 같은 성격에 대해 신학은 아디아포라(adiaphora, 중요하지 않은, 구원과 관련 없는,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은 등의 의미)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유대 학자들은 침쭘(Tzimtzum)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침쭘(Tzimtzum)은 히브리어로 ‘축소’라는 개념이다. 창조주 하나님은 마치 스스로 하나님의 부재, 하나님의 자체 모순처럼 여겨지는 일을 한다. 창조주는 때로 피조물에게 자유의지를 주고 자신은 조용히 물러나 있다. 이것이 바로 침쭘이다. 인간의 자유의지도 침쭘으로 설명된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주시고 자신을 축소하고 자기를 제한(self-limitation) 한다. 물론 하나님은 마냥 물러나 있는 분은 아니다. 적당한 때에 창조주는 분명히 개입하여 흐름을 바로잡는다.
베리칩을 놓고 벌어지고 있는 신학적 논란도 바로 이같이 서로 다른 신학적 입장을 반영한다. 그렇다면 신학은 불필요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스탠리 그랜츠(Stanley J. Grenz)와 로저 올슨(Roger Olson)은 신학의 필요성을 역설한 자신들의 책에서 왜 사람들은 모두 신학자일 수밖에 없는가를 논증한다. 그랜츠에 의하면 무신론자들도 신이 없다는 자신들의 신앙의 생각을 가진 신학을 가진 자들이다. 일반 대중들도 전문적인 신학적 생각을 가지지는 않았으나 사람은 다양한 신학적 생각을 가지게 마련이다. 그런데 신앙의 학문인 신학은 세계관적 틀을 가지므로 다양한 신학적 생각과 수준들에 대해 당연히 가치 평가가 뒤따르게 된다. 즉 신학은 계시 종교로서 신앙의 유일한 기준인 성경 해석에 따른 가치 평가에 따라 좋은 신학, 건전한 신학, 미성숙한 신학, 비성경적 신학, 나쁜 신학 등의 평가가 가능해진다. 소위 종말론의 한 부분으로서의 베리칩 신학에 대해서도 그것이 바른 신학인지 미숙한 신학인지 비성경적 신학인지 그 건전성을 반드시 검증할 필요가 생기는 것이다.
2.베리칩 신학은 어떤 신학적 배경이 있는가?
1) 긴박한 종말론으로서의 세대주의의 영향
해 아래 새것은 없다. 그렇다면 베리칩 신학은 어디로부터 파생된 것일까? 종말론으로서의 베리칩 신학은 시한부 종말론적 경향을 지닌다는 점에서 세대주의 신학과 밀접한 연관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세대주의는 주로 인류 역사를 도식적 세대 구분의 틀 속에 넣는다는 특징을 가진다. 현대 세대주의 신학을 체계화 한 원조라 할 수 있는 다비(John Nelson Darby, 1800-1882)는 성경 전체를 (1) 홍수 이전까지의 족장 세대 (2) 노아 세대 (3) 아브라함 세대 (4) 이스라엘 세대 (5) 이방인 세대 (6) 성령세대 (7) 천년왕국세대 등의 7 세대로 구분하고 있다. 또한 변호사요 성경학자였던 회중교회주의자 스코필드(C. I. Scofield, 1843-1921)는 The King James Version 연구의 스코필드 관주 성경(1909)을 출판하면서 세대를 (1) 무죄시대 (2) 양심시대 (3) 인간통치시대 (4) 약속시대 (5) 율법시대 (6) 은혜시대(교회시대) (7) 왕국시대로 구분하였으며 영국 회중 교회 형제단의 영향을 받고 평신도 집회소를 중심으로 활동한 워치만 니(Watchman Nee, 1903-1972)도 세대주의를 수용하여, 역사를 무죄 시대, 양심 시대, 인간 통치 시대, 언약 시대, 율법 시대, 은혜 시대, 막간 시대, 왕국 시대로 구분하고 있다.
세대주의를 주장하는 각 개인마다 조금씩 세대 구분 방식은 다르기는 하나 대체적으로 역사를 일곱에서 여덟 세대로 구분한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문제는 세대주의의 경우 각 세대뿐 아니라 마지막에 임할 (천년)왕국시대를 문자적으로 이해함에 따라 필연적으로 지나온 인류 역사를 여섯 세대(6천 년)으로 규정하게 되어 마지막에 임할 천년왕국시대를 계산할 경우 지구는 긴박한 종말을 맞을 수밖에 없다는 시한부 종말론에 자연스럽게 이르게 된다. 만일 세대주의에 따른다면 혹시 휴거와 종말의 시기가 이미 지나쳐버린 것은 아닌가 우려(?)될 정도로 지구는 모든 6천 년이 이미 지나가 버렸으니 필연적으로 시급한 종말이 우리 세대에 임해야 하는 것이다. 적그리스도가베리칩 곧 666이라는 소동은 바로 이 같은 세대주의의 세대 구분 신학과 아주 잘 들어맞는다. 기독교는 종말과 재림을 믿는 종교이다. 하지만 긴박한 종말론이나 시한부 종말론은 항상 큰 부작용을 불러왔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2) 세대주의의 또 다른 특징
(1) 이스라엘과 교회에 대한 엄격한 구분
세대주의는 이스라엘 민족이 받은 지상 왕국에 대한 약속들은 미래 천년왕국에서 문자적으로 성취되어야 한다고 본다. 온누리교회가 어린양을 잡아 구약의 피 제사를 재현하거나 이스라엘 선교에 열을 올리는 것은 세대주의 경향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경우라 할 수 있다(그리스도의 속죄 제사 이후 피 제사는 당연히 무의미하다– 기초 신학 저서로서 총신대 출판부에서 나온 서철원 박사의 저서 『神學序論』을 참조할 것).
(2) 해석의 기본 원칙으로서의 문자적 해석
일반적으로 세대주의자들은 성경 해석에 있어 엄밀한 문자적 해석을 철저하게 적용하는데, 특히 이스라엘과 교회의 해석에 있어 더욱 그러한 경향이 있다. 그리스도의 천년 통치기간 동안 이스라엘과 관련된 땅, 국가 보좌, 성전 회복 등의 약속들은 문자적으로 무조건 이루어진다고 본다. 그렇다면 성도들은 훗날 정방격자 모양의 보석성인 새 예루살렘에서 살게 될 것이다. 세대주의자들도 정말 그런 문자적 보석 정육면체 안에 들어가 살고 싶을까? 정말 이상하다. 즉 세대주의자들은 문자적인 것은 문자적, 상징적인 것은 상징적, 비유적인 것은 비유적, 모형적인 것은 모형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몽땅 다 문자적으로 해석하려든다(물론 클라런스 배스같은 온건한 세대주의자가 있다. 그런 사람들은 정통 세대주의자들로부터 복음적 신앙을 떠난 변질자라고 욕을 먹음).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라는 성경의 경고(벧후 1:20)는 성경이 문자적 이해에 집착하는 책이 아닌 해석을 필요로 하는 책임을 말해준다. 문자적 해석에 매달리는베리칩 신학은 세대주의의 전형을 따르고 있다.
(3) 독특한 교회론과 왕국 복음
교회는 하나님의 원래 구원 계획의 일부가 아니고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왕국 제안을 거부함으로써 생겨났다는 제한된 교회관(교회론의 대혼란)을 세대주의는 가지고 있다. 문자적 해석에 따라 영적 이스라엘은 있을 수 없고, 따라서 영적 왕국이 아닌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의 문자적인 유대적 왕국이 온다는 왕국 개념이다. 정통 교회론이 밀려난 자리에는 필연적으로 등장하게 된 문자적 유대 왕국 교회론이라 할 수 있다. 이럴 경우 요한계시록은 교회가 아닌 유대인들을 위해 주신 복음으로 전락해 버리게 된다, 또한 유대적 왕국 개념에 따른 은혜의 복음 이외 왕국 복음이라는 낯선 복음을 제시한다. 하지만 성경은 갈라디아서 1:6,7에서 분명하게 오직 단 하나, 즉 은혜의 복음만을 말하고 있다. 보편적 은혜의 복음을 유대 왕국 복음이나 베리칩 복음으로 대치하려는 것은 엄청난 복음의 변질이다.
세대를 구분하는 것이나 구분하여 가르치는 것이 큰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고 세대 구분이 성경 이해에 도움이 되는 측면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세대주의의 문제는 성경을 문자적으로 도식화해서 해석함으로써 여러 가지 부작용을 양산하는 데 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절대화할 때, 성경이 단순한 책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되며 성경 내용을 도식화하는 과정에서 성경이 마치 판타지 만화 같은 책으로 오해하게 만드는 위험성이 있다. 즉 근본적으로 기본적 성경해석학에 대한 오해로 말미암아 미숙한 성경 해석은 큰 문제를 가져올 수 있다. 많은 이단과 사이비들이 세대주의 종말론을 따르다 이단이 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라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베리칩 신학은 세대주의 종말론과 그 궤를 같이 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3.베리칩 신학은 과연 좋은 신학인가?
베리칩 신학은 과연 성경적으로 바르고 좋은 신학일 수 있을까? 세대주의 신학에 편승하여 21세기에 불쑥 나타난 베리칩 신학은 여러 가지 우려스러운 부분들이 있다고 볼 수밖에 없는 데 여기 성도들의 분별을 위해 그 내용들을 정리해보려고 한다. 체계화된 베리칩 신학을 전개하는 주요 교단은 국내외적으로 전무하다. 베리칩 사상을 전하는 측은 주로 시한부 종말론 전도지와 유튜브 동영상을 통해 그 사상을 전파하고 있어 그 핵심 세력을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다만 목회자로는 이상남 목사(LA세계등대교회 담임)가 있고 이 방면의 가장 최근 저서로 장 죠셉 목사가 쓴 『베리칩에 숨겨진 사단의 전략』(크리스천리더, 2012. 10)이라는 책이 있으므로 이것을 참고하였다.
1) 베리칩 신학은 소위 시한부 종말론의 재탕이다
『베리칩에 숨겨진 사단의 전략』의 저자 장 죠셉 목사는 본명이 장만호이다. 이 사람은 1992년 10월 28일 공중 휴거가 있다고 예언한 다미선교회의 해외 선교 담당자였다. 그는 10월 28일 휴거 당일, 다미선교회 본부에서 있었던 휴거 전(?) 마지막 예배를 인도했던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다미선교회 이장림 씨는 컴퓨터, 신용카드, 바코드 등을 666과 연관하여 시한부 종말론을 전파하던 대표적 리더 중 한 사람이었다. 베리칩 신학은 이들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자신들의 신념을 여전히 버리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즉 베리칩을 가지고 과거와 동일한 방식으로 포장만 달리하여 세대주의 시한부 종말론을 리바이벌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장 죠셉 목사의 책에는 과거 시한부 종말론자들의 책에 자주 등장하던 세계 단일 정부 음모, 신세계 질서 음모, 열뿔 국가 음모, 큰 성 바벨론의 삼각통치 음모, 빌더버그 음모, 프리메이슨 음모, 국제형사재판소(ICC) 음모 등이 파노라마처럼 리바이벌되고 있다. 모두 옛 시한부 종말론의 재탕이다.
2) 베리칩 신학 주동자 장 죠셉 목사의 생화학적 이해 부족
장 죠셉(장만호) 목사의 책 가운데 아주 간단한 몇 구절만 뽑아보자. 『베리칩에 숨겨진 사단의 전략』 제4장 「인간 유전자와 베리칩」의 도입부(101쪽)에 보면 “인간은 디옥시리보핵산으로 되어있다. DNA는 한 개의 단백질이 수 천 개씩 합쳐서 세포의 조직과 기관을 이루어서 마침내 인간이란 몸 전체의 조직을 이룬다고 한다. 사람의 몸은 30억 개의 세포로 이루어져 있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전문가가 아니라 기초 생화학만 배운 사람이더라도 이 구절들이 얼마나 황당한 구절들인지 금 새 알 수 있다. 장 목사는 생화학의 기초를 전혀 모르는 사람인 것이다. 생화학의 기초도 모르는 사람이 “인간 유전자와 베리칩”을 논한다는 것은 문제이다. 이런 저서에 기독 지성인들이 미혹 당한다는 것이 오히려 불가사의할 정도이다.
3) 베리칩 신학자들의 시한부 종말론자들의 실수 답습
미주에서 목회 중인 목사 가운데 베리칩을 666으로 보는 대표적 인물인 이상남 목사(LA세계등대교회)는 “2010년 3월 30일에 오바마 헬스케어 법안이 통과되었고, 36개월 내 곧 2013년 3월 31일 이전에 베리칩 이식이 공식 시행되고, 2014년 1월 1일부터는 베리칩을 받지 않으면 벌금형을 받게 되며, 2017년 1월 1일부터 강행될 경우 거부하면 처벌받고 범법자가 된다.”고 설교하였으나 그 예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장 죠셉 목사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 같은 유치하고 황당한 예언은 이미 컴퓨터, 바코드, 신용카드 등을 666이라 외쳤던 자들의 엉터리 예언을 답습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유튜브 동영상을 선호하는 것으로 보아 시한부 종말론자 자신들이 “666”이라 받으면 지옥 간다고 그렇게 대중들에게 겁을 주던 컴퓨터와 신용카드와 바코드 등을 이들은 아주 자유롭게 기꺼이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4) “666”이 무엇이든 성도의 이마에는 이미 도장(인)이 있다(계 7:3; 9:4)
도장은 변경되거나 취소될 수 없다. 하물며 하나님이 인 치신 도장은 영구적이다. 짐승의 표(계 13:15)를 받기 전에 이미 성도의 이마(계 7:3; 9:4)에는 도장이 있음을 잊지 말라. 하나님의 표와 짐승의 표가 동시에 이마에 찍힐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짐승의 표” 소동이나베리칩 소동과 같은 두려움과 공포 조성이 아니라, 오직 여호와를 아는 것과 여호와께서 두려움과 공포심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자비를 베풀며 옳고 공평한 일을 베푸시는 분이심을 알고 자랑하는 것이라 했다(렘 9:24). 성도는 쓸데없는 베리칩 소동에 떨지 말고 오직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의와 진리와 평강 가운데서 진실한 믿음과 순종으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요한계시록은 직역을 하면 잘 풀리지 않는 많은 상징이 있는 책이다. 벌콥(L. Berkhof)의 말대로 요한계시록은 결코 사도행전 식으로 해석하는 책이 아니다. 성경해석학의 기본이 필요하다. 계시록 13장도 그 상징의 내용을 잘 해석해야 한다. 하나님이 성도의 이마에 정말로 실물 도장을 찍는 것이 아닌 상징인 것처럼 베리칩이 “666”인가하는 문제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5) 성도는 반드시 이긴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불안과 공포심을 준다(요 10:10). 하지만 성령의 은혜는 그리스도 믿음 안에서 주시는 영원한 구원과 참 평강이요 선한 목자이신 주님은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하게 주신다. 어린 양은 약한 분이 아니다. 만주이 주요 만왕의 왕이므로 저희를 당연히 이긴다(계 17:14).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고 진실한 자들은 절대 지지 않는다(계 17:14). 666표가 계시록의 핵심이 아니요 이것이 계시록의 핵심 구절이다. 부활 승천하신 주님은 마귀와의 싸움에서 밀려 베리칩을 받으면 성도의 구원을 마귀에게 속절없이 빼앗겨 버리는 그런 나약한 분이 아니다. 만유보다 크신 창조주이다(요 10:28-29). “베리칩“을 가지고 구원이 상실될 수도 있다고 겁을 주거나 신앙적 불안감을 불러일으키는 긴박한 세대주의적 시한부 종말론으로 사람들을 두려움과 공포에 떨게 하여 인위적 열심을 이끌어내려는 것은 오히려 성경이 말씀하는 복 된 소식이 전혀 아니다(딤후 1:7). 오히려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벧후 3:16) 많은 자들이 “베리칩에 집착하여 베리칩 공포와 불안“에 떨다가 베리칩이 아닌 정말 짐승의 수(”666“)이 나타날 때는 그만 사단에게 속아버리는 참사가 벌어지지 않을 까 걱정이 되기도 한다.
6) ‘베리칩과 666’ 관련 2013년 예장합동교단 총회 신학부의 공식입장-666과 베리칩을 연관 지어 활동하는 개인과 단체는 배격한다.
예장 합동 교단 신학부는 2013년 예장 합동 교단 총회 보고서를 통해 ‘베리칩과 666’ 관련하여 베리칩을 요한계시록 13장의 “짐승의 표”로 간주하고, 그것을 받는 자는 구원에서 끊어진다는 주장은 해당 본문에 대한 오해와 광신 이데올로기, 그리고 주관적인 상상력에 지배를 받은 억지스러운 해석의 결과라고 결론을 내리고 그 입장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소제목은 읽기 수월하도록 필자가 삽입하였음).
(1) 짐승의 표가 베리칩 이라는 주장은 허황된 주장이다.
“그들의 주장의 핵심을 살펴보면 짐승의 표와 베리칩 사이의 몇 가지 피상적인 유사성에 근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컨대 짐승의 표를 오른손이나 이마에 받는 것(계 3:16)과 베리칩을 오른쪽 어깨관절이나 손등에 이식한다는 점,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만 매매활동을 보장하는 것과 베리칩이 결재수단으로 사용된다는 점, 그리고 짐승의 표 666을 게마트리아를 통해 숫자풀이 하면 컴퓨터를 가리킨다는 점 등이 소위 베리칩 선지자들이 내세우는 주요한 유사성이다. 그러나 이런 유사성은 해당 성경 본문의 정당한 해석에 따르면 전혀 근거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한 마디로 말하면 짐승의 표가 베리칩 이라는 주장은 참으로 터무니없는 허황된 주장이다.”
(2) “베리칩” 소동은 근본적으로 계시의 보편적 성격에 대한 오해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성경은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한 적실성을 갖는다는 계시의 보편적 성격에 입각해서 짐승의 표를 이해해야 한다. 특별히 배교와 같은 종교적인 이슈가 개입하는 계시록의 상징적인 언어를 해석할 때는 더더욱 그러하다. 이런 점에서 짐승의 표를 21세기의 과학문명의 산물인 베리칩으로만 한정하는 것은 명백한 잘못이다. 짐승의 표는 요한의 계시록의 수신자인 1세기 교회의 신자들에게 던지는 경고였다는 점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황제숭배를 강요당하는 현실에서 그것을 거부하는 고대의 참 신자들이 박해를 받던 역사적 상황에서 짐승의 표를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찾아야 한다.”
(3) 역사적 콘텍스트 안에서 본다면 짐승의 표는 일차적으로 로마 황제와 관련된 외적 표였다
“역사적인 콘텍스트 안에서 본다면 짐승의 표는 분명히 절대적인 권력자였던 로마 황제에 대한 충성과 숭배를 뜻하는 외적인 표였다. 실제로 표라는 말은 당시 로마 황제의 이름을 명시한 공식 문서에 찍는 인장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본다면 짐승의 표란 하나님의 지위와 영광을 찬탈하고자 하는 사악한 시도에 동조하는 행위를 드러내는 외적인 증표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짐승의 표가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는 우상숭배의 외적인 표였다는 점에서 그것은 보편적으로 각각의 시대마다 활동하는 거짓 선지자와 적그리스도에 대한 복종이나 배교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짐승의 표는 단지 과거 기독교 박해시대에 등장했던 독재적 인물과 연계하여서만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우리 시대의 기술문명의 이기(利器)와 동일시하는 것은 더더욱 터무니없는 시도이다. 그것은 지상교회가 영광에 들어가기 전까지 직면하게 될 항구적이고 보편적인 신앙의 위협이나 배교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4) 일반은총의 원리와 구원의 특별은총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이 시대에 출현하는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이 현대의 과학기술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들을 믿음에서 멀어지도록 유혹하고 우상숭배로 이끌어 들이는 수단으로 삼을 수는 있다. 그러나 신학적인 의미와 동떨어진 어떤 새로운 기술 자체를 요한계시록의 짐승의 표와 동일시하는 것은 완전히 빗나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짐승의 표를 가시적이고 물질적 원리의 범주에 속하는 것과 동일시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말이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믿음에는 물질적이고 형식적인 원리가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믿음은 오직 성령의 부르심과 중생으로 말미암는 것이며 개인의 자유로운 의지와 양심에 지배를 받기 때문에 결코 가시적이고 물질적인 원리와 동일시될 수 없다.”
“베리칩을 비롯해서 바코드, 컴퓨터, 혹은 신용카드 등은 모두 일반 은총의 영역에 속한다.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딤전 4:4~5). 기술문명에 속한 그것들 자체는 선한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도 아니며 믿음의 도에 어긋나는 것도 아니다. 만일에 현대적 기술문명의 혜택을 입는 것을 배교 내지는 배교로 이어지는 전단계로 단정한다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은 내용을 성경에 더하는 것이다.“
“교회는 베리칩과 같은 새로운 과학기술에 대한 두려움을 가질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아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성찰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우리를 구원에서 떨어지게 하는 유혹과 시험의 본질은 물질적 원리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배하는 정신적이며 영적인 원리이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 6:12).
“과거에도 그랬듯이 ‘짐승’으로 일컫는 정치적 군사적 독재자가 또 다시 일어나게 되면 세상은 두 그룹으로 나뉘게 될 것이다. 짐승에 복종하는 자들과 그것에 머리를 숙이고 복종하기를 거부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고자 하는 참된 신자들로 나누어지게 될 것이다. 그 때 하나님 외에 다른 지상의 권력자와 거짓 선지자들에게 머리를 숙이고 그들을 숭배한다면 그들은 짐승의 표를 받는 자들이다. 짐승의 표의 본질은 배교적 복종이다.”
“그러므로 본 교단은 요한계시록 13장에 등장하는 666과 베리칩을 동일한 것으로 연관 짓는 것은 분명히 비성경적임을 확인한다. 따라서 666과 베리칩을 연관 지어 활동하는 개인이나 단체는 배격하기로 한다.”
4. 나가면서
요즘 일부 열정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열심을 지닌 것은 좋으나 좌우 분간을 하지 못하고 신비주의적이고 극단적이고 긴급한 시한부 종말론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불안감을 조성하고 신자들의 열심을 이끌어내는 경우가 한국 교회 안에 다시 머리를 들고 있다. 이것은 신앙을 열심으로 착각하게 만들 위험성이 있으며 하나님께 열심을 다한다는 착각 속에서 실은 마귀에게 이용당해 버리는 누(累)를 범할 수 있음을 늘 경계해야 한다. 마귀가 그리스도인들을 지옥으로 데려가는 것도 아니고 괜히 겁을 먹고 두려워할 존재는 아니다. 하지만 모세의 시체에 대해 논쟁했을 때 천사장 미가엘도 마귀를 감히 훼방하는 판결을 쓰지 못하고 주께서 마귀를 꾸짖으시기를 바란다고 했을 정도로 마귀는 그리 간단히 상대할 존재도 아니다(유 9절).
갑자기 최근 한국교회에 여러 가지 형태의 이상한 신비주의 바람이 불고 있는 것은 참으로 우려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늘 바른 하나님 말씀의 분별이 우선되지 않으면 우왕좌왕하기 마련이다. 바르게 깨닫고 열심을 다해야지 분별을 못하고 열심을 내다가는 사단에게 이용당하는 도구가 되기 십상이다. 작금의 일부 한국 교회에 이런 불안을 동반한 신비주의가 만연된 것은 분명 정상이 아니다. 일차적으로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한 기독 지도자들의 책임이 크다. 베리칩 소동은 바로 이 같은 혼돈 속에서 등장하여 미혹의 마약처럼 번지고 있다. 제자 베드로도 ‘사단‘이라고 예수님께 꾸짖음 받은 것처럼 깨어 기도하고 사단의 꾀에 속지 말아야 한다(막 8:33).
편집자 주: 필자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는 김천대와 평택대 신대원 겸임교수로 사역하고 있다.
조덕영 박사 bareunmedia@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