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드라마 한편이 한국사회 및 교육계에 강력한 파장을 미치고 있다. 드라마 sky 캐슬 이야기다. 네댓 가정이 어울려 사는 한 작은 주거타운을 배경으로 일어나는 교육 관련 현실을 보여주는 드라마다. 특별히 한국사회와 교육과열의 한 단면을 여과 없이 브라운관을 통하여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런 환경에 속한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시청자든 간에 관심을 집중하게 되는 힘을 지닌 드라마다. 특별히 대학입시라는 관문을 어떻게 통과할 것인지가 관건이어서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모든 학생은 이모저모로 이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초등학생에서부터 고등학교 3학년에 이르기까지 등록금이 싼 국내 최고의 대학이나 미국의 유력한 명문대학에 들어가는 일이 초미의 관심사로 모아진다. 단순히 대학에서 끝나지 않고, 그 대학의 최고의 과까지 겨냥한다는 점에서 흥미롭기까지 하다.
이런 면에서 SKY는 하늘이라는 일반명사의 의미를 넘어서 한국사회에서 입시를 통한 신분 상승을 꾀하는 것과 관련된 특정 대학을 의미하는 차원을 갖는다고도 볼 수 있다. 예로부터 한국사회는 교육을 통해서 신분 바꾸기가 가능한 구조를 견지했었다. 소위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는 구조를 견지했던 것이다. 나면서부터 기울어진 환경에 처했던 개인이 자신의 소양을 잘 발현해서 자신을 사회 속에 덕스럽게 실현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야 자연스러운 일이고 나무랄 일이 아니다. 이런 출구가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건강한 사회의 한 조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정황 가운데 대리시험이라든지 하는 불편한 일이 끼어들지 않은 바는 아니었으나, 옥에 티 같은 것이었을 뿐, 큰 흐름을 바꿀 수 있을 만큼은 아니었다.
오늘날에도 교육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적절히 노정하고자 하는 꿈을 꾸는 일은 가능하고, 또한 그런 가능성이 닫히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과거와는 조금 다른 분위기도 연출된다. 교육이라는 순수한 도구가 돈의 힘과 결합되면서 경쟁구조가 불균형해진 탓이다. 미취학아동에서부터 시작하여 초중고를 거치면서 입시의 관문을 보다 좋은 조건에서 통과하기 위하여 소위 선행학습이라는 것을 취하기 때문이다. 학교라는 공적인 기관을 중심으로 자신의 소양을 자연스럽게 끌어내는 구조는 뒷전으로 내몰리고, 사사로운 학습을 통하여 기회를 선점하려는 시도가 횡횡하기 때문이다. 재력을 가진 부모나 혹은 재력은 없으나 직업전선에 뛰어들어 돈을 만들어서 자녀를 사교육시장에서 키워보고자 하는 부모가 나타나고, 그 재력을 바탕으로 입시를 위한 특별한 사교육을 시행하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는 돈이 교육을 좌지우지하거나 입시관문통과를 결정하는 구조로 전환되어버린 것이다. sky 캐슬에 사는 부모는 자신의 재력을 바탕으로 자녀에게 고액의 입시코디를 붙이고 원하는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수준의 교육을 제공한다. 입시코디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표달성을 이루기 위하여 불법하고 부도덕한 일까지 하려고 한다. 최근 어느 분과 식사를 하면서 그것이 단순히 드라마에서 극화된 이야기가 아님을 들을 수 있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고액을 받는 강사가 주요 과목마다 한명씩 붙여지고, 조기 선행학습을 실행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교육 과정에서 기회를 선점하고, 그 결과 한국사회에서 유력한 자리를 차지하고 살아가는 유능한 인간을 만들어내고, 명예와 부와 권력을 세습하기 위함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하늘을 의미하는 SKY는 욕망을 담은 은유이기도 하다.
이런 정황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드라마에서 보여지는 초점은 사실 학생에게만 있지 않다, 그런 왜곡된 교육환경을 만들어가는 부모에게도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드라마상의 부모는 자신이 형성한 기득권을 대를 이어서 승계하고픈 욕망을 갖고 있거나 혹은 자신이 쌓아온 커리어가 자식을 통해서 훼손되거나 불명예스러워지는 것에 대하여 치열하리만치 불편해한다. 결과적으로 자식은 자신의 커리어를 관리하는 대상이거나 혹은 자신의 욕망을 대리해서 충족시키는 도구로 환원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런 부모의 지나친 욕망에 희생되는 자녀가 발생하는 것이다. 가짜명문대학생노릇을 하게 되고, 자신이 하고픈 전공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선택하게 되고, 이러는 과정에 자녀의 마음에는 분노가 축적되게 되고, 삶의 의욕을 상실하게 되고, 기쁨을 빼앗기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모름지기 교육을 통하여 진리를 탐구하고, 그 진리를 인해서 기뻐하며 깨달은바 그 진리에 근거하여 자신과 사회에 빛을 비추려는 방향을 보아야 할 터인데 현실의 교육계는 그런 교육의 본래적인 지위와 역할이 사라진 형국이 되고 말았다. 교육을 대학 본연의 자율에 맡기지 않고 중앙에서 통제하는 방식으로 이끌어가는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인간의 본성을 성찰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의미와 유익을 깨우치며 한걸음 더 나아가서 전문적인 소양인으로서 공헌하도록 대학교육을 이끌어내지 못하고, 오히려 취직을 위한 학원으로 전락시키고 있지는 않은가 싶기도 하다. 대학을 운영하는 주체도, 대학을 평가하는 주체도 대학의 근원적인 존재 이유에 대한 보다 깊은 성찰이 필요한 시점에 서 있지 않은가 싶은 것이다. 인문사회과학적인 토대를 잘 살리지 못하는 대학교육은 굳이 대학에서 이루어질 필요가 없지 않을까 싶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교육은 은사 계발을 기초로 해서 구성될 필요가 있다. 네덜란드에서 경험한 바가 참 인상적이었다. 유치원부터 초등학교 때까지 학교는 학생에게 교과서를 집으로 가져가지 못하게 한다. 교육은 전적으로 학교가 책임지는 것이다. 구구단을 일주일 만에 달달달 외우는 것은 그 나라의 교육 체계에서는 무의미한 일이다. 활용을 경험하도록 배려하면서 천천히 익힌다. 학습과정에 놀이문화도 활발하다. 12명 미만으로 구성된 이런 학생들의 학습발달을 두 명의 교사가 근접해서 지도하고 관찰한다. 매학기가 끝날 때마다 학부모를 초치하여 학생의 학습과 생활에 대한 매우 세세한 대화를 나눈다. 그런 자연스러운 교육과정을 통하여 교사는 이 학생이 university로 방향을 잡을지, college로 방향을 잡을지, 기술고등학교로 방향을 잡을지를 결정하는 주체로 기능한다.
국가는 15, 35, 50% 정도로 학생을 자연스럽게 배분한다. 국가구조에 적합한 규모로 학생을 양육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런 과정을 통과하여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갈 때, 보수체계가 균질하도록 국가가 사회를 관리한다. 쉽게 말하여, 그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어떤 직업을 갖고 어떤 일을 하면서 살아가든지 누리는 삶의 질이 균질하도록 관리하는 것이다. 대학교육을 마칠 때까지 비용을 개인이 부담하지 않기 때문에, 그 과정을 마친 사람이 많이 벌면 세금을 많이 받고, 적게 벌면 적게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많은 혜택을 받는 사람의 수입을 나누어서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삶의 질을 보전하는데 사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백성은 실제로 그 나라에서 공평한 대우를 받으며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사람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공부가 은사가 아닌 학생이 부득불 공부를 해야 하는 부자연스러운 교육과열현상이 일어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 안에 아무런 욕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삶의 조건이 개선된다고 해서 욕망 그 자체로부터 자유로운 존재가 되지는 않는다. 복지 그 이후의 삶과 관련한 무수히 많은 문제가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한국사회는 복지사회로 가는 과도기적인 사회이다. 사실은 교육문제는 고용시장을 개선하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는다. 고용시장이 균질화되어야, 그래서 누구도 인간다운 삶의 길에서 배제되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어야, 소양에 집중하는 교육환경이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다. 한국사회는 무한경쟁의 자본주의사회로부터 타인을 존중하는 자본주의사회로 전환하는 과정을 겪고 있다. 원리적으로 드라마가 보여주는 sky 캐슬은 해체되어야 한다. 그런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성읍이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사회에로의 전향적인 발걸음을 내딛을 필요가 있다.
사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누구나의 마음에 하늘에 오르려는 욕망이 도사리고 있지 않나 싶다. 과거 모세가 시로 남겼듯이 인생이 70이요, 강건하면 80인데, 활시위를 떠난 활처럼 신속하게 흐르는 그 시간을 관통하며 살아온 삶을 회고해보면 “수고”와 “슬픔”뿐이다. 역설이 배어든 표현이다. 수고하였으되 슬픈 현실이니 말이다. 무엇을 위하여 수고할까? 한국사회의 부모나 자녀는 왜 그런 무모할 만큼을 수고를 하는 것일까? 교육의 관문을 통과하여 sky 캐슬에 들어가서 얻는 전리품이 무엇일까? 재물과 명예와 권력이 아닐까.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아닐까. 이것을 얻기 위해 인간은 그토록 수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문제는 그런 수고와 함께 그것을 손에 넣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손에 넣은 과정에 몸이 축나고 정신이 병들고, 그렇게 시간의 흐름과 함께 소멸되어 가는 것이 아닐까. 원하던 것을 손에 넣고 그것을 통해서 자신을 포장하고 세탁하더라도 결코 만족함이 없는, 그래서 슬픈 삶을 직면하지는 않는 것일까.
인간을 실제로 지킬 수 없는 바로 이러한 허무한 가치에 굴종하도록 인간을 꾀어내는 존재를 성경은 마귀라고 칭한다. 그리고 그 마귀는 공중, 곧 SKY의 권세를 잡은 자로 묘사된다. 마귀는 인간이 살아가는 이 세상 즉 공중의 권세를 잡은 자로서 끊임없이 인간을 미혹하는 일을 감행한다. 70이요, 강건하면 80인 인생살이를 그 실존의 끝자락에 도달하면 그렇게 무력할 수밖에 없는 재물과 명예와 권력을 취하는 일로 다 허송세월하게 만드는 존재이다. 70-80의 삶을 살아낸 후 삶을 정리할 때,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추구하던 욕망 그 자체를 제외하고는 평가할 만한 것이 전혀 없는 그런 벌거벗은 실존으로 인간이 자신을 직면하도록 만드는 존재, 그가 바로 마귀인 것이다. 이것이 성경이 보여주는 세상(SKY)의 민낯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소중한 존재인 인간으로 하여금, 땅만 바라보고, 이 세상에 속한 것만 바라보고, 하나님의 처소인 하늘(HEAVEN)을 향한 문을 닫아걸고 살아가도록 부추기는 존재가 바로 마귀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소위 “고지론”이라는 것을 손에 쥐고 그리스도인 청소년들에게 외친다. “여러분 정체, 경제, 사회, 문화, 교육의 전 영역에 뚫고 들어가 고지를 점령하십시오. 모든 영역의 고지를 선점하여, 그곳에서 하나님의 선의를 떨치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구호와 함께 이 지점을 선점하기 위하여, 주일에 예배하는 일도, 일상에서 기도하는 일도,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돌아보는 일도 죄다 뒷전으로 밀어놓고, 오로지 공부에만 전념하도록 한다. 그 고지를 위하여 과정을 무시하는 사람이 되도록 조장하는 것이다. 고지를 점령한 후에 그 부족한 면면을 채워 넣으면 되지 않느냐고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는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어쩌면 이런 삶의 태도야말로 세상적이요, 정욕적이며, 마귀적인 것이라고 야고보가 읊었던 그 삶이 아닐까.
오늘의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나 교회는 지금껏 추구해온 “고지론”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직면할 필요가 있다. 기독교후기사회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나 교회는 그런 방식으로는 이 세상을 설득할 자격을 이미 상실해버렸다. 오히려 하나님이 자신에게 준 은사를 살려서 사회의 모든 영역뿐 아니라 모든 사회적 계층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그 어느 곳에서나 재물을 넘어서는 삶, 명예를 뚫고 나오는 삶, 권력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삶을 살아내야 한다. 재물보다 귀한 삶의 세계, 명예보다 더 소중한 가치를 보게 하는 삶, 권력이 불필요하여 섬기지 않고서는 권력을 유지할 수 없는 삶의 구조를 만들어가는 일에 마음을 쏟고, 실제로 그런 삶을 살아가는 일이 필요한 시점에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서 있지 않은가 싶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 가정과 교회가 자녀를 위하여 기도하되, 어떤 자녀가 되기를 기도할지 깊이 묵상해야 하는 시점에 서 있지 않은가 싶은 것이다.
유태화 교수(백석대학교 신학대학원) bareunmedia@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