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본 연재는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멸망부터 A.D. 70년 예루살렘 함락에 이르기까지 주요 왕조의 발흥과 쇠퇴를 중심으로 진행할 예정입니다.
제대로 된 시장 하나 없을 정도로 가난한 나라였던 페르시아는 메디아와 바벨론까지 흡수하며 황금의 제국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페르시아는 바벨론에 의해 끌려온 포로들을 돌려보내는 지방화 정책을 펼쳤다. 속국을 혼혈족으로 만든 앗수르와, 포로를 나라별로 구별해 강력한 중앙 집중화를 이룬 바벨론과는 분명 다른 정책이었다. 유대인 역시 세 차례에 걸쳐 본토로 귀환하게 된다. 물론 귀국을 희망하지 않는 자들은 계속해서 페르시아에 머물 수 있었다.
초대왕 키루스 2세(고레스)이후 왕이 된 캄비세스 2세는 이집트를 정복했다. 캄비세스 2세는 아들이 없는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새로운 왕으로 다레이오스 1세가 오르게 된다. 다레이오스 1세의 아들이 에스더의 남편 크세르크세스(편집자 주: 영화 300에 나오는 페르시아의 왕으로 성경에는 ‘아하수에로’로 기록)이다. 페르시아는 크세르크세스 치하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했다고 알려진다.
실패한 페르시아의 그리스 침공
다레이오스 1세와 크세르크세스는 각각 두 차례와 한 차례 도합 세 차례에 걸쳐 그리스 점령을 시도하지만 실패한다. 먼저 1차 침공. B.C. 492년, 다레이오스 1세는 마르도니오스를 사령관으로 삼아 육군과 해군을 지휘하여 그리스를 침공하게 했다. 그런데 변수를 만났다. 아토스 곶에서 폭풍을 만나 함대가 풍비박산 나버렸다.
헤로도토스는 “(함대는) 아토스 곶을 우회하려 했다. 그러나 그들이 우회하는 동안 도저히 손쓸 수 없는 맹렬한 북풍이 덮쳐 그들을 거칠게 다루며 수많은 함선들을 아토스에 내동댕이쳤다. 300척의 함선이 파괴되고, 2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죽었다고 한다”1)라고 기록했다. 와중에 육군은 브뤼고이족 이라는 트라게 부족에게 야습을 당해 많은 사람이 전사하고 말았다. 결국 페르시아는 제대로 된 전투 한 번 하지 못한 채 병력을 철수시켜야 했다.
2년 뒤 다레이오스 1세는 다시 한번 전열을 정비하고 그리스 정복에 나섰다. 아테네를 목전에 둔 마라톤 광야에 다다를 때까지 페르시아는 거침이 없이 방해요소들을 처단했다. 치열했던 마라톤 광야에서의 전투는 아테네의 승리로 돌아갔다. 전투의 정면대결에서는 페르시아가 우세했지만, 양측 날개에서는 아테네가 완승했다는 것이 헤로도토스의 기록이다.2)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마라톤 전투에서 페르시아 측은 약 6,400명이 전사하고, 아테나이(아테네) 측은 192명만이 전사”3)했다. 페르시아인들은 서둘러 배로 돌아와 아테네 군대보다 빠르게 아테네로 진격할 계획을 세웠지만, 이마저도 아테네 군사들이 먼저 행동해 계획을 철회 할 수밖에 없었다. 페르시아는 2차 원정에서도 패했다.
▲살라미스 해전
|
다레이오스 1세의 1, 2차 원정이 실패하고 뒤이어 왕위에 오른 크세르크세스는 2차 원정이 있은 지 10년 후인 B.C. 480년, 3차 원정길에 오른다. 16만 명의 군사와 1,200여 척에 이르는 함대. 그야말로 대군 이었다. 육지에서 페르시아의 압승이 이어졌다. 그런데 육지에서와 달리 해전에서 반전이 일어났다.
아테네는 지도자로 급부상한 테미스토클레스의 지휘 하에 페르시아의 2차 침공 이후 강력한 해군을 양성한 상태였다. 테미스토클레스는 페르시아의 해군을 살라미스 섬 인근의 좁은 해협으로 유인해 대승을 거뒀다. 이것이 소위 세계 4대(혹은 3대) 해전 중 하나로 불리는 살라미스 해전이고, 아테네는 이 해전의 승리로 지중해의 강자로 군림하게 된다. 해전에서 완패한 페르시아는 승승장구하던 지상전에서도 잇따라 패배해 그대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페르시아의 세 번에 거친 그리스 침공은 큰 상처만 남기고 마무리 되었다.
페르시아의 그리스 침공기 때의 유대인
페르시아의 초대 왕 키루스 2세 때인 B.C. 537년, 스룹바벨과 예수아를 중심으로 한 1차 포로 귀환이 이루어진다. 이들은 성전 건축을 시작했다. 키루스 2세에 이어 왕에 오른 캄비세서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후 페르시아와 그리스의 전쟁이 한창이었던 다레이오스 1세 때 학개, 스가랴 등이 대적자들의 방해로 잠시 중단되었던 성전재건 사업을 완수하게 된다. 에스더의 남편이었던 크세르크세스를 뒤이어 왕위에 오른 아닥사스다 1세 때인 B.C. 458년, 에스라를 중심으로 2차 포로귀환이, B.C. 444년, 느헤미야를 중심으로 3차 포로귀환이 이루어진다.
1) 헤로도토스, 『역사』(숲, 2009), 572.
2) 같은 책, 612.
3) 같은 책, 613.
조믿음 기자 bareunmedia@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