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은 박사의 칭의 바르게 이해하기(7)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을 논의하는 방법들 중에 “부정의 방법”(via negativa)이 있다. 부정의 방법이란 하나님은 “~이 아니다”라는 대전제를 가지고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을 발견해나가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유한하지 않다”라는 전제를 통해 도출되는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은 “그러므로 하나님은 무한하다”라는 결론이다. 또한 “하나님은 물질적이지 않다”라는 전제를 통해 도출되는 결론은 “그러므로 하나님은 영이시다”이다.
이러한 부정의 방법을 활용해 “칭의”와 “믿음”과의 바른 관계를 규정해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칭의와 믿음 사이의 바르지 못한 관계를 “부정함으로써” 둘 사이의 바른 관계를 모색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칭의와 믿음 사이의 바른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필요한 핵심적 작업은 칭의를 일으키는 믿음이 과연 “어떤 믿음”이냐를 결정하는 것이다. 부정의 방법을 통해 칭의를 일으키는 믿음과 상관없는 믿음들을 제거해 나가는 방식으로 논의를 진행하도록 하겠다.
부정 #1: 칭의를 일으키는 믿음은 인간 내부의 능력으로부터 발현된 것이 아니다
인간 자체가 지닌 능력과 실력으로는 믿음을 획득하거나 선취하거나 고양할 수 없다. 성경은 인간 자체의 악함과 타락상 그리고 죄로 인한 부패와 오염을 지속적으로 증거하고 있다(칭의와 죄 사이의 관계성에 대한 논의는 6회: “죄인인가 의인인가: 과거, 현재, 미래의 죄는 모두 사해졌는가”를 보라). 다윗은 다음과 같이 고백 한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 예레미야 선지자도 인간의 마음 속 깊숙이 존재하는 부패함에 대해 다음과 같이 토로 한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렘 17:9). 그리스도의 은혜를 깊이 깨달은 사람일수록 자신의 타락상을 겸허히 고백한다. 다음과 같은 바울의 고백이 그렇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 그리스도의 주되심과 메시아 되심을 경험했던 베드로가 외쳤던 한마디도 바로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였다(눅 5:8).
인간의 “전적 타락”을 외치는 것을 인간이 가진 고매한 인간성 자체를 말살하는 시도라거나 혹은 인간 존재 자체를 폄하하는 시도 혹은 인간의 위치를 지나치게 격하시키는 시도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류이다. 사실 인간의 전적 타락상을 소리 높여 외치는 이유는 인간을 하찮은 미물로 보고 인간의 존재성 자체를 약화시키거나 제거하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칭의의 기원을 타락한 인간 기원이 아닌 “신적 기원”에 두고 칭의 전체를 이끌어 가는 궁극적 주체를 “하나님”께 두기 위함이다. 바로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바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칭함을 받지만 그 믿음조차도 인간 내부로부터 난 것이 아니라는 바울의 일갈은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드러내고 있다. 칭의를 일으키는 믿음은 인간 내부로부터가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선물이다. 칭의와 믿음 사이의 바른 관계성 설정은 창조주는 누구이며 피조물은 누구인지를, 구원자는 누구이며 구원 받는 대상은 누구인지를, 의롭다 여기시는 분은 누구이며 의롭다 여김을 당하는 자는 누구인지를 정확히 규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부정 #2: 칭의를 일으키는 믿음은 인간의 행위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믿음과 관련되어 논의할 수 있는 인간의 행위는 (1) 믿음 그 자체 혹은 믿는 행위 그 자체와 (2) 선행과 관련된 인간의 율법적 행위 등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첫째, 칭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지만(롬 3:28) 믿음 그 자체가 칭의에 있어 “작용인” 혹은 “유효적 원인”(efficient cause)이 될 수 없다(이에 대해서는 칭의의 6중 원인을 고찰한 5회: “칭의에 있어서 인간의 역할”을 살펴보라). 믿음은 도구적 혹은 수단적 원인으로서 칭의의 영역 내에서 작용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믿음 그 자체에 신령한 능력을 부여해 칭의를 가능케 만드는 결정적 작용인으로 믿음을 드높이는 것도 인간의 믿음 자체를 “우상화”시키는 오류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믿음 자체”가 칭의의 작용인이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믿는 행위 그 자체”도 칭의의 결정적인 작용인이 될 수 없다. 흔히 생각하기로는 우리 자신이 능동적으로, 주체적으로 믿는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엄밀히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힘입어 그리스도의 인격과(즉 그 분이 누구신지와) 그리스도의 사역이(즉 그 분이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가) 수동적으로 “믿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수동적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게 된다. 즉 이신칭의의 원리는 “우리는 믿음을 통해 의롭다 칭함을 받는다”(we are justified through faith)를 말하고 있지 “우리는 믿음을 통해 우리 자신을 칭의 한다”(we justify ourselves through faith)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논리를 설명하기 위해 고안된 구분법이 바로 능동적 칭의(active justification)와 수동적 칭의(passive justification) 구분법이다.1) 능동적 칭의란 하나님께서 능동적으로 칭의의 주체자가 되셔서 하나님의 법정에서 죄인인 우리를 의롭다고 판결하신 것을 뜻한다. 수동적 칭의란 능동적 칭의를 근거로 삼아 인간의 의식의 법정에서 의롭다고 판결된 하나님의 능동적인 판결이 믿음을 통해 인간에게 적용되는 것을 뜻한다.2) 죄인의 실제적 칭의는 수동적 칭의 국면에서 벌어지기 때문에 인간의 믿음 혹은 인간의 믿는 행위 그 자체가 칭의의 능동적, 주체적 요인으로 작용할 수 없다. 인간의 믿음 혹은 인간의 믿는 행위 그 이전에 이미 하나님의 능동적 칭의 판결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믿음 “덕분에” 혹은 믿는 행위 “때문에” 칭의 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생각은 오히려 아르미니우스주의적 칭의 이해에 가깝다(이에 대해서는 3회: “균형 잃은 칭의론 #2: 인간의 역할 강조에 집중한 칭의론들”을 살펴보라).
둘째, 칭의를 불러일으키는 믿음은 인간의 율법적 행위로부터 발현되지 않는다. 이에 대해서는 갈라디아서 2장 16절이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칭의는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됨으로써만 가능한데 이러한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빌 3:9)이다. 바울은 사도행전에서도 다음과 같이 선포하였다: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즉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행 13:39).
그러므로 순종의 행위와 믿음 사이의 우선순위를 역전시킨 셰퍼디즘(Shepherdism) 류, 구약 토라를 지킴으로써 구원에 이르려고 했던 유대주의(Judaism) 류, 성령의 동행하심과 더불어 살아온 삶의 궤적에 준하여 미래 칭의를 확정적으로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소위 유보적(reservable) 칭의론 류,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것이 또 다른 율법 지킴으로 변질되는 신율법주의(neonomianism) 류 등은 칭의를 불러일으키는 믿음을 “인간의 행위에 근거”하려고 부단히 노력했던 불균형적 칭의론들이다. 칭의를 가능케 만드는 믿음은 인간의 행위로부터 발현될 수 없다. 인간의 행위로부터 발현된 믿음은 철저히 자기 의에 근거한 믿음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의가 설 공간 자체를 허락하지 않는다. 결국 자기 의에 근거한 믿음으로 칭의의 탑을 쌓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러한 사상누각적 칭의는 필망(必亡)의 전철을 밟을 수밖에 없다.
결론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만약 칭의를 불러일으키는 믿음이 인간 내부의 능력에서부터 발현되는 것이 아니라면 또한 인간의 행위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면 과연 칭의를 불러일으키는 믿음은 무엇이며 어디로부터 오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빛 아래서 하는 것도 의미 있을 수 있겠다. 왜냐하면 칭의를 다루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1장 1-2항은 이 질문에 대한 옳은 답을 내려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총 7회에 걸쳐 살펴 본 “칭의 바르게 이해하기” 연재를 마치는 이 시점에서 칭의 교리 전체를 아우르는 총정리를 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효력 있게 부르신 자들을 또한 값없이 의롭다 하시되, 그들 속에 의를 부어넣으심으로가 아니고, 그들의 죄를 사하시며 그들 자신을 의롭게 여기시고 받아들이심으로이며, 그들 안에 이루어진 혹은 그들에 의해 행해진 어떤 것 때문이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 때문이며, 믿음 자체 즉 믿는 행위나, 다른 어떤 복음적 순종을 그들의 의로 그들에게 전가시킴으로써가 아니고 그들이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받아들이고 의지할 때, 그의 순종과 만족을 그들에게 전가시킴으로써 인데, 그 믿음도 그들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영접하며 의지하는 신앙은 의롭다 하심의 유일한 수단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1장 1항과 2항(전반부)은 칭의와 믿음과의 관계를 “선물” 관계로 보고 있다. 이것이 바로 에베소서 2장 8절이 말하는 바이기도 하다. 선물은 주는 “수여자”와 받는 “수혜자” 사이에서 오고가는 복된 것이다. 선물의 수여–수혜 관계 속에서의 주체는 늘 수여자에게 있다. 믿음이라는 선물 또한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여김을 받는다(롬 4:5). 그러나 이 믿음이라는 선물의 수여자가 누구이며 또 그 선물을 받는 수혜자는 누구인지에 대해 정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 믿음은 우리 내부로부터 자급자족하여 발생된 자기 재화(財貨)가 아니라 수여자인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요 감격적인 선물이다. 이것이 바로 칭의와 믿음 사이의 올바른 관계 설정이다. 이는 곧 칭의 사건 전체를 아우르는 올바른 관계 설정이기도하다.
1) 이에 대한 구체적 논의는 박재은, 『칭의, 균형 있게 이해하기: 하나님의 주권 대 인간의 역할, 그 사이에서 바라본 칭의』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6), 105-145를 참고하라.
2) 박재은, 『칭의, 균형 있게 이해하기』, 106-111.
* 연재를 마치며: 그간 부족한 글을 읽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칭의의 바른 복음이 이 땅 가운데 편만해지도록 함께 뛰길 바랍니다!
편집자 주: 필자 박재은 박사는 미국 칼빈 신학교에서 조직전공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현재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조직신학을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 『칭의, 균형 있게 이해하기』(부흥과개혁사), 『성화, 균형 있게 이해하기』(부흥과개혁사)가 있다.
박재은 박사 jepark.theopneustos@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