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상태 목사의 성경 오해 풀고 읽기(2)
“밤새 씨름을 합니다. 사생결단의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나를 살려주시지 않으면 나는 당신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한 대형교회 목사님이 야곱의 씨름 기사(창 32:24)를 설명하며 위와 같이 설교했다. 야곱이 어떤 사람과 씨름을 했다. 이 씨름을 사생결단의 기도로 해석했다. 기도는 이렇게 붙들고 애원하듯이 해야 응답된다는 의미로 설교하셨다. 물론 기도는 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의 기도가 하나님을 움직이게 하는 유일한 원인인 것처럼 말한다면 오류가 있다. 안타깝게도 이 본문을 야곱의 간절한 기도로 해석하고 적용하는 경우가 많다.
과연 야곱은 사생결단의 기도를 했을까? 나무기둥 붙잡고 뿌리까지 뽑는 심정으로 매달렸을까? 이렇게 본다면 자연스럽게 야곱이 열심히 기도했으니까, 하나님이 도와주셨다 정도로 해석하게 된다. 잘못된 해석은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불러온다. 그 결과 하나님 중심의 신앙이 아닌 인간 중심의 신앙으로 귀결될 위험이 있다.
이 본문은 야곱의 인간적인 열심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지 않다. 야곱은 형 에서를 다시 만나기 전까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크지 않았다. 이 본문은 하나님께서 야곱의 불안과 불신을 깨우치며 온전히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인도하는 과정의 말씀이다. 야곱의 열심에 초점이 있지 않고, 야곱의 인간적인 고집을 꺾으시고 믿음의 길에 서게 하시는 하나님의 인도에 초점이 있다.
만약, 야곱이 이미 믿음을 가지고 열심히 기도한 것으로 본다면, 본문 안에서 해결되지 않는 많은 모순이 발견된다. 예를 들면, 열심히 기도했는데, 왜 환도뼈를 맞게 될까? 열심히 기도한 야곱은 왜 평생 다리를 절뚝거리는 장애인으로 살게 되는가? 야곱이 열심히 기도했다면, 왜 “어떤 사람”에게 축복해 달라고 요청하는가? 왜 그 “어떤 사람”은 즉시 축복해 주지 않고 바로 떠나려고 하는가? 많은 부분이 연결되지 않는다.
본문을 바르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야곱의 열심이라는 선입견을 버리고 성경 이야기를 사건의 순서에 따라 세밀하게 풀어 가야 한다. 창세기 32장은 야곱의 위기로 시작하고 있다. 이 위기 앞에서 얼마나 믿음이 없는지 강조하고 있다. 야곱은 일생일대의 위기를 자기 힘으로 이겨보려고 애처롭게 노력하고 있다. 야곱은 친형 에서가 자신을 만나기 위해서 부하 400명을 이끌고 온다는 소식을 듣는다. 환영하는 의미가 아니라는 사실을 야곱은 잘 알고 있었다.
야곱은 몹시 불안하고 초조했다. 이 마음을 7절에서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로 표현하고 있다. 11절에서 “그를 두려워함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이 나기 때문이니이다”라고 기도한다. 야곱은 몹시 두렵고 무서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하나님은 함께 하고 계심에 대한 사인을 보여 주셨다. 2절에서 “마하나님” 하나님의 군대를 보았다. 1절에서는 “하나님의 사자들”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성경에서 많은 경우 불안하고 두려워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사자들과 군대로 함께하심과 보호하심을 보여 주셨다. 그렇지만, 믿음이 없어 이런 사인에도 불구하고 믿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땅과 자손의 약속을 받았지만, 아내를 두 번이나 누이라고 속였고, 여종을 통해서 자손을 이어가려는 믿음 없는 모습이 반복적으로 나타났다. 광야 생활 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기둥과 구름기둥을 보며, 수많은 기적을 경험했지만 끝없는 원망과 불신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샀다. 많은 성경의 인물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즉각적인 믿음으로 순종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야곱도 그렇다. 외삼촌 라반의 집에 있는 동안 큰 재산을 얻고 두 아내와 여종을 얻었지만, 그 과정에서 인간적인 계획과 방법에 의존했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이런 성향은 외삼촌 집을 나오면서 나아지지 않았다. 야곱은 하나님의 군대 “마하나님”을 보고서도 여전히 현재 상황 앞에서 믿음을 가지지 못했다. 불안과 두려움으로 기도했고, 에서의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했다. 자기 재산을 나누어 형 에서에게 선물로 주려고 했다. 혹시 가족이 공격을 받게 될 것을 가정해서, 자신이 좋아하는 아내 순서대로 열을 세운다. 라헬과 요셉을 가장 뒤에 둔다. 결정적으로 야곱은 다시 돌아와 얍복강 나루터에 혼자 남았다.
모든 예물과 가족은 얍복강을 건너게 하고 자신은 다시 돌아와 나루터에 남은 사실은 나 혼자라도 살아남겠다는 이기적인 의도 외에도 한 가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얍복 나루터는 요단 동편 지역으로 “약속의 땅”을 벗어난 지역이다.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을 벗어나더라도, 자기 신변과 안위가 더욱 중요했다는 사실을 나루터에 머문 모습이 보여준다. 야곱은 위기를 이기적인 방법으로 모면하고 싶었다. 모두 빼앗기고 죽더라도 자기만은 살고 싶었다. 가족에 대한 책임감도 없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창세기 33장에 나오는 야곱의 변화에서 알 수 있다.
33장 3절에서 야곱은 가족의 대표로서 죽음을 각오한 모습으로 변화되어 나타난다. 야곱이 환도뼈를 맞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고 난 뒤에 일어난 변화이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난 뒤에 비로소 가족의 대표자로서 당당하게 형에서 앞에 서게 된다. 성경은 야곱에 대해서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야곱의 기도로 상황이 변화한 것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치심과 깨닫게 하심으로 야곱의 내면적인 변화를 말씀하고 있다.
이는 야곱의 씨름과 환도뼈의 의미,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통해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야곱이 얍복강에서 씨름했을 때, 씨름의 주체는 야곱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 야곱과 씨름을 시작했다. 싸움의 주체는 야곱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었다. 하나님께서 다른 형태로 나타나서 싸움을 걸거나 씨름하는 모습은 가끔 반복된다. 출애굽기 4장에서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을 본 후에 이집트로 가려고 할 때,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 그를 죽이려는 기사와 더불어 여호수아 5장에서도 비슷한 기사가 나온다. 중요한 신앙의 분기점에서 하나님이 나타나 믿음을 위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전형적인 패턴 중의 하나이다.
창세기 32장에서 야곱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신앙적인 결단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회피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것이 바로 환도뼈(카프예레크)를 치는 사건이다. 뼈(예레크)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아담이 하와를 보며, ‘내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창1:23)라고 했을 때와, 라반이 야곱을 처음 보았을 때, ‘내 골육’(뼈와 살, 창29:14) 즉, 가족, 나와 같은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특히 환도뼈는, 사람의 가장 중심이 되는 부분이다. 환도뼈(카프예레크)는 생식기를 의미하기도 한다. 출애굽기 1장 5절은 자녀들을 ‘허리에서 나온 자들(요츠에예레크)’이라고 한다. 따라서, 환도뼈를 친 것은 생명을 위협하는 것과도 같은 의미를 가진다.
야곱이 만약 열심히 기도했다면, 왜 이런 생명의 위협까지 받는 고통을 경험해야 했는가? 이것은 기도가 아니라, 야곱이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인간적인 고집을 부렸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이 고집이 꺾인 후에 야곱은 비로소 기도했다고 볼 수 있다. 호세아 12장 4절에 따르면 “천사와 힘을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야곱이 울면서 간절하게 간구한 모습을 겨루어 이긴 것과 구별하고 있다. 씨름한 이후에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한 말에 대해서 “울며 간구하였다”로 표현하고 있다.
이때, “어떤 사람”은 야곱에게 바로 기도해 주지 않는다. 무엇을 하는가? 27절에서 야곱에게 이름을 묻는다. 야곱은 자신의 이름을 말한다. 그의 이름 뜻은 속이는 자였다. 이름은 자신의 존재이며 인생이었다. 환도뼈를 맞고 극심한 통증을 느끼고 있을 때, 야곱은 자신이 누구인지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을 오래전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신뢰하지 않았고 자신의 의지로만 걸어왔다. 하나님은 이것을 깨닫게 하시고, 이제는 다른 인생을 살기 원하셨다. 28절에서 야곱의 이름을 다시는 부르지 않겠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의지로 이름을 바꾸신다. 이스라엘로 바뀌게 된다. 이스라엘의 해석에 관해서는 많은 이견들이 있다. 김정우 교수는 이 단어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한다. “이 단어의 어근 ‘샤랴’(싸우다, 고치신다, 다스리다, 등)을 ‘다스리다’(Noth)로 보고 동사를 기원형으로 생각한다면, ‘하나님이여 다스리십시오(Hamilton)’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야곱은 이제 속이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를 사모하는 자가 된다는 뜻이 된다.” 김정우 교수의 해설이 타당하다고 본다면, 이제 야곱은 이기적이고 자신만 아는 삶의 태도에서 하나님이 삶의 주도권을 가지고 통치하며 살기를 바라는 인생으로 변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야곱이 어떤 사람과 씨름한 이 본문을 “사생결단의 기도”로 보기는 어렵다. 이렇게 보면, 이어서 나오는 본문의 의미를 이해하기 어렵게 될 뿐만 아니라, 야곱의 신앙과 하나님의 인도와 섭리를 오해하게 된다. 야곱의 씨름은 반대로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은 얍복강을 건너지 않고 남아서 혼자 힘으로 이 상황을 모면하고 벗어나려던 야곱을 꺾으셨다. 하나님께서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믿음에서 멀어져가는 야곱을 다시 강권적으로 붙잡으셔서 구속사 가운데로 인도하신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이 말씀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큰 은혜를 준다. 선택한 자녀에 대한 불가항력적인 은혜이다. 우리가 아무리 피하려고 해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과 자녀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신다. 선택한 백성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때까지 권능과 능력 가운데 보호하시며 하나님 자녀로서 합당한 성품을 갖추게 하신다.
“요한복음 10:28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창세기 32:24-30
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25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26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27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29 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30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편집자 주: 필자 장상태 목사는 좋은우리교회를 담임하고, 튤립성경연구 섬김이, 디다스코 출판사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장상태 목사 jangsstt@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