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은 박사의 칭의 바르게 이해하기(5)
들어가는 말
칭의는 의로운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통해 죄인들을 의롭다 여겨주시는 사건이므로 그 속에는 하나님의 구원론적 절대주권이 면면히 흐르고 있다. 칭의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절대주권이 강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일각에서는 칭의를 받는 당사자(인간)를 로봇처럼 치부하여 칭의를 받음에 있어 지극히 “수동적인” 혹은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는 “무의미한” 존재로 인간의 역할 및 책임을 약화시키거나 혹은 제거하려는 시도가 종종 있어왔다.
▲ 박재은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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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반율법주의(antinomianism)가 이러한 오류의 선봉장에 서 있다(이 점에 대해서는 2회 “균형 잃은 칭의론 #1: 하나님 주권 강조에 집중한 칭의론들”을 참고하라). 하지만 칭의의 영역에서 인간의 영역을 제거하려는 시도는 반드시 역으로 다시 제거되어야 마땅하다. 왜냐하면 칭의의 영역에서 인간이 해야 할 역할이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칭의에 있어서 인간의 역할은 무엇인가? 이를 소위 칭의의 6중 원인의 틀 가운데서 고찰하도록 하겠다.
칭의의 6중 원인
원인론(原因論, the philosophy of causation)은 고대철학에서부터 꾸준히 논의되어온 학문 체계이다. 모든 가시적/비가시적 존재들의 현상과 양태에는 반드시 그러한 존재적 현상과 양태를 가능하게 만드는 “원인”이 있다는 논리이다. 즉 원인 없이는 결과도 없고, 결과가 있다면 반드시 원인이 존재하기 마련이며, 원인과 결과는 밀접하고 필연적인 인과관계를 서로에게 부과하고 있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BC 384-322)가 전개한 4중 인과론(fourfold causality)의 공리적 측면은 신학을 구성함에 있어 철학적 기저를 펼치는데 영향을 끼쳤다.1) 4중 인과론이란 원인들을 작용인(作用因, efficient cause), 형상인(形相因, formal cause), 질료인(質料因, material cause), 목적인(目的因, final cause) 등으로 나누어 고찰하는 원인론 체계를 말한다. 신학에서는 여기에 두 가지 정도의 중요한 원인들을 더해 총 6중 원인 가운데서 모든 신학적 주제를 설명하곤 했다(물론 이 외에도 다양한 원인들을 사용하지만 대체적으로 6중 원인 정도로 압축해 볼 수 있다). 4중 원인 외에 추가되는 원인들로는 도구적 원인(道具的, instrumental cause)과 공로적 원인(功勞的, meritorious cause)을 들 수 있다.
혹자는 딱딱한 철학 체계를 사용하여 거룩한 신학 주제를 설명하려고 하는 시도 자체에 대한 묘한 반감 및 의아함을 가질 수도 있겠다. 그러나 정통 개혁신학에서는 단 한 번도 철학이 신학을 존재론적으로 추월해 앞지른 적이 없었다. 철학은 늘 신학을 섬기기 위해(to serve) 존재했다. 늘 성경과 전통이라는 촘촘한 필터링을 거쳐 그 건전성이 증명될 때 비로소 신학을 잘 섬기기 위한 도구로 절충적으로 사용 되었다는 사실을 염두 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6중 원인의 틀 가운데서 칭의를 바라볼 때 인간의 역할은 무엇인가? 6중 원인들 중 인간의 역할 및 책임으로 돌릴 수 없는 것들을 하나씩 제거해나가는 방법으로 논의를 진행하도록 하겠다.
칭의의 유효적 원인(혹은 작용인)
유효적 원인이란 어떤 특정한 결과를 낳기 위해 가장 필수적이고 가장 효과적인 필수불가결한 원인으로서, 모든 현상의 궁극적인 1차 원인을 뜻한다. 칭의 사건의 법적 판결은 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하시기 때문에 칭의의 유효적 원인은 하나님이다(이에 대해서는 4회: “법적 선언으로서의 칭의”를 보라). 그러므로 칭의의 유효적 원인을 절대로 인간에게 돌릴 수 없다. 현대의 인간중심적 칭의론들은(그것이 펠라기우스주의적이든 세미 펠라기우스주의적이든 상관없이) 칭의의 유효적 원인을 왜곡시켜, 칭의의 유효적 원인과 인간의 역할을 서로 치환하는 결정적 오류를 범했다.
칭의의 형상적 원인
형상적 원인이란 한 사물이나 실체가 존재하기 위해 필요한 본질을 의미한다. 이를 칭의 사건에 적용시켜보면, 칭의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칭의의 “본질”이 필요한데 이 본질을 “복음”(Gospel)으로 이해한다. 이는 존 칼빈(John Calvin, 1509-1564)의 생각이기도 한데 칼빈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구원의 형상적 원인은 “복음의 선포인데 이를 통해 하나님의 선하심이 우리에게 흘러넘치는 것”이다.2) 칭의의 형상적 원인은 복음이기 때문에 칭의의 형상적 원인 역시 인간에게 돌릴 수 없다.
칭의의 질료적 원인
질료적 원인이란 목적하는 형상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재료를 뜻한다. 이를 칭의 사건에 적용해 보면 칭의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칭의의 “재료”가 필요한데 이 재료를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의”(義, righteousness)로 본다. 칼빈은 다음과 설명한다. “확실히 그리스도는 그의 순종과 함께 [칭의의] 질료적 [원인]이다. 순종함으로써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의를 획득하셨다.”3) 칭의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가 죄인에게 전가됨으로써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칭의의 질료는 그리스도와 그의 의뿐이다. 그러므로 칭의의 질료적 원인도 인간에게 돌릴 수 없다.
칭의의 공로적 원인
공로적 원인이란, 목적하는 형상을 이룬 공로가 어디로부터 혹은 누구로부터 비롯되었는가를 파악해 그 대상에게 공로를 돌리는 것을 뜻한다. 칭의의 공로적 원인은 오로지 그리스도에게만 돌려야 한다. 그리스도의 당하신 순종(“수동적 순종”이라고도 하는데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의미한다)의 공로에 힘입어야만 죄인은 의롭다 칭함을 받기 때문에 칭의의 공로는 오로지 그리스도에게 있다. 칼빈은 다음과 같이 항변한다. “우리 구원의 모든 부분 부분들이 우리 밖에[extra nos] 위치하고 있음을 우리가 봄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여전히 행위들을 신뢰하고 자랑하고 있는가?”4) 그러므로 칭의의 공로적 원인을 인간에게 돌려서는 안 된다. 이 점은 여타 현대 인간중심주의적 칭의론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참된 진리이다.
칭의의 목적 원인
목적 원인이란 사물이나 운동이 일어나는 궁극적인 목적을 뜻한다. 칭의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다. 칭의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 스스로가 영광을 받으신다. 칼빈은 여러 곳에 걸쳐 칭의의 목적 원인을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대한 영광”5) 혹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찬양하는 것”6) 혹은 “하나님의 공의를 드러내는 것”7)으로 일관되게 설명하였다. 칭의의 목적 원인 또한 인간에게 돌릴 수 없다.
칭의의 도구적 원인
도구적 원인이란 사물이나 운동이 가진 궁극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도구(instrument)를 말한다. 지금까지 살펴 본 것처럼 만약 칭의 사건의 유효적 원인이 하나님이라면, 형상적 원인이 복음이라면, 질료적 원인은 그리스도의 의며, 공로적 원인은 그리스도 자신에게 있다면, 목적 원인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라면, 사실 칭의 사건에서 인간이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칭의 사건의 원인을 분석할 때 이와 더불어 하나 더 중요한 원인을 추가하는데 바로 칭의의 “도구적 원인”이다.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그룹들(예를 들면 반율법주의나 하이퍼 칼빈주의 등)은 칭의의 도구적 원인 자체를 거부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칭의의 도구적 원인을 늘 “인간”에게 돌려왔기 때문이다. 특히 칭의의 도구적 원인은 인간의 “믿음”으로 구체적으로 적시되어왔다(믿음과 칭의의 관계는 매우 중요한 주제이다. 이에 대해서는 마지막 회인 7회에 “믿음과 칭의의 관계”라는 제목으로 더 구체적으로 다루면서 본 연재를 마무리 지을 것이다). 칭의의 영역 가운데서 인간의 믿음의 역할을 이야기할 때는 반드시 “도구적 원인”이라는 틀 가운데서 논의해야만 한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인간의 믿음을 칭의의 유효적, 형상적, 질료적, 공로적, 목적 원인으로 돌리는 심각한 오류를 범하지 않을 수 있게 된다. 칼빈은 믿음을 “단지 의를 받는 수단”으로 묘사했다.8) 그러므로 “이신칭의”(믿음으로써 의롭다 칭함을 받는다)란 용어 안에 포함되어 있는 “믿음으로써”라는 뜻은 인간의 믿음이 칭의의 유효적, 형상적, 질료적, 공로적, 목적 원인으로 작용한다는 뜻이 아니라 “도구적 원인”으로서 작용한다는 뜻이다.
바로 여기까지가 칭의에 있어서 인간의 역할이다. 칼빈은 믿음을 “그릇”에 비유했다.9) 칼빈은 우리 안의 그릇을 비우고 입을 벌려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지 못한다면 그리스도를 받아 누릴 수 없게 된다고 말했다.10) 도구적 원인으로서 인간의 믿음의 역할이 이토록 지대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칭의의 공로적 원인이 될 수 없다. 공로적 원인은 이미 오로지 그리스도에게로 돌렸기 때문이다.
나가는 말
칭의 사건 속에서 인간의 역할은 분명히 존재한다. 혹자는 전통적 개혁신학의 칭의론은 인간의 역할을 심각히 약화시킨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오해이다. 인간의 역할을 약화시켰다기보다는 인간의 역할이 칭의의 유효적, 형상적, 질료적, 공로적, 목적 원인으로 작용하는 것을 부단히 경계했을 뿐이다. 인간은 믿음이라는 수단을 사용해 칭의의 도구적 원인으로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해야 한다.
성경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히 11:6)라는 말로 우리에게 귀한 권면을 하고 있다. 인간의 믿음(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믿음은 칭의의 공로적 원인이 아니라 수단적 원인이다)은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것으로 칭의 사건의 목적을 이루어가는 과정 가운데서도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 이런 측면에서 칭의의 영역 내 인간의 역할은 유(有)의미하고 유(有)가치하다.
1)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이 16-17세기 스콜라주의, 후기 종교개혁 개혁파 정통주의 철학에 미친 영향에 관한 구체적 논의로는 다음을 참고하라. 박재은, “16-17세기 개혁파 정통주의 시대의 형이상학 이해,” 「교회와 문화」 37 (2016): 135-165; Joseph S. Freedman, “Aristotle and the Content of Philosophy Instruction at Central European Schools and Universities during the Reformation Era (1500-1650),” Proceedings of the American Philosophical Society 137/2 (1993): 213-253; Richard A. Muller, Post-Reformation Reformed Dogmatics: The Rise and Development of Reformed Orthodoxy, ca. 1520 to ca. 1725 (Grand Rapids: Baker, 2003), 1:360-405; idem, “Scholasticism, Reformation, Orthodoxy, and the Persistence of Christian Aristotelianism,” Trinity Journal 19:1 (Spring 1998): 81-96; idem, “Reformation, Orthodoxy, ‘Christian Aristotelianism,’ and the Eclecticism of Early Modern Philosophy,” Nederlands archief voor Kerkgeschiedenis 81.3 (2001): 306-325; Charles H. Lohr, “Metaphysics,” in The Cambridge History of Renaissance Philosophy, eds. Charles B. Schmitt and Quentin Skinner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8), 537-638.
2) Calvin, Epist. Pauli ad Ephesios, I.8 (CO, 51:150). 칼빈은 이 본문에서 칭의 사건을 이야기하기보다는 “구원” 사건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칭의와 구원의 불가분성을 생각한다면 구원의 형상적 원인과 칭의의 형상적 원인을 상호 교차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3) Calvin, Inst., 3.14.17 (CO, 2:575).
4) Calvin, Inst., 3.14.17 (CO, 2:576).
5) Calvin, Inst., 3.14.21 (CO, 2:578).
6) Calvin, Inst., 3.14.17 (CO, 2:576).
7) Calvin, Inst., 3.14.17 (CO, 2:576).
8) Calvin, Inst., 3.11.7 (CO, 2:538).
9) Calvin, Inst., 3.11.7 (CO, 2:538).
10) Calvin, Inst., 3.11.7 (CO, 2:538).
편집자 주: 필자 박재은 박사는 미국 칼빈 신학교에서 조직전공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현재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조직신학을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 『칭의, 균형 있게 이해하기』(부흥과개혁사), 『성화, 균형 있게 이해하기』(부흥과개혁사)가 있다.
박재은 박사 jepark.theopneustos@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