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조덕영 박사의 사도 바울의 창조 신학 글을 4회에 거쳐 연재합니다. 조덕영 박사는 조신학연구소 소장, 창조론 오픈 포럼 공동대표, 평택대 신학부 겸임교수로 사역하고 있다.
Ⅴ. 창조 신앙을 복음으로 연결하는 바울
파이네(P. Feine)가 바울의 복음이 “그리스도 중심적”(christozentrisch)으로 바울이 자신만의 고유한 “하나님 표상”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고 본 것은 바울이 어떠한 인물이었는지를 바라보는 신학자들의 일반적 정서를 바르게 표현한 말이다. 사도 바울은 어떤 사도보다 구약성서의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넘어 초대 기독교의 인식에 대한 새로운 신 이해를 심어준 인물이었다. 그렇다면 이 바울의 모호한 “하나님 표상”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조덕영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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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창조와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다고 거짓 것들을 비판만 하고 있을 바울은 아니었다. 바울은 우리가 한 하나님 곧 만물을 창조하신 아버지가 계실 뿐 아니라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그분이 바로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요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다고 했다(고전8:6). 바울의 “하나님 표상”(신론)이 창조주 예수 그리스도로 확장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비록 바울이 조직신학자는 아니었으나 히브리적 창조, 창조주, 창조 신앙에 그치지 않고 바울은 당연하게 기독론적 접근으로 나아갔다. 바울이 원하는 것은 창조와 창조주 신앙에 그치지 않고 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며 그분의 고난에 참여하고 그분의 죽음을 본받아 부활의 영광에 이르는 것이었다.
이것은 다이스만이 말한 대로 하나님의 “새로운 가르침”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입장을 발견한 것”이었다. 즉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의 창조 신앙을 “창조주 성육신”과 십자가와 부활의 신앙과 신학으로 연결하여 기독교 구속 신학을 완성하고 있다.
누가는 사도행전 17장에 나오는 바울의 아레오바고 연설에서 바울이 아테네 시민들에게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겨놓은 제단을 소개하면서 이곳에 있던 헬라의 신 이해를 통해 복음을 어떤 방식으로 전하려 하였는지를 소개하고 있다. 바울은 아테네 사람들에게 종교성이 많다는 덕담 비슷한 언급을 하면서 복음을 소개하고 있다. 사실 이 도시는 우상이 가득한 도시였다(행17:16). 바울은 아테네의 이런 풍경을 보고 격분하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정적인 바울은 마음을 가다듬고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다. 회당의 유대인 및 경건한 이방인들과 토론하고 장터로 나가 날마다 거기 모이는 사람들과 토론하였다.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철학자들과도 논쟁하였다. “외국 신들을 선전하는 것 같다”는 이들에게 바울은 한 사람에게서 모든 민족을 만들고 온 땅 위에 살게 하신 창조주 하나님은 각 나라의 연대를 미리 정하시고 그들의 국경을 정하셨으며 이제는 죽음에서 부활하여 죽음을 이기신 그리스도를 통해 회개하고 영원히 사는 영생의 복음을 전하였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말에 어떤 사람들은 비웃었고 또 더 듣고 싶다는 사람들도 있었다(행17:32).
이 부분에 대해 주석은 바울의 선교 전략이 실패했다고 보는 측과 성공적이었다고 보는 견해로 나누어져 있다. 슈바이처는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바울의 사상이 여기서는 “하나님 안에” 있다는 이교 사상으로 대치되었다고 말한다. 이 연설이 복음이 아니라 헬라 시인들과 사상가들을 전거로 삼아 하나님에 대한 참 된 지식을 확증하려 했다는 점에서 2세기 변증론자들의 합리주의를 보여준다고 말하는 학자도 있다. 콘젤만이 주장한 것처럼 정말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이방인에게 미련한 것“으로 알려졌기에 교묘히 그것을 회피하려고 한 것이었을까?
과연 바울의 선교 전략은 실패한 것이었을까? 수많은 사람들이 공산권, 북한, 이슬람 등 창의적 선교지역에 복음을 전하고 있다. 하지만 복음의 양적 열매는 가시적으로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들의 선교 전략이 실패한 것일까? 바울이 전한 복음에 아테네의 몇 사람들은 복음에 반응하고 바울을 따르고 믿었다. 그중에는 놀랍게도 아레오바고의 법관 디오누시오(Dionysius)와 다마리(Damaris)라는 여자와 그 밖에 몇 사람이 있었다. 결코 복음은 좌절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신 이유 가운데는 바리새인 출신 바울의 확고한 유대적 창조 신앙이 뿌리박혀 있었음을 선교 방식의 지혜 속에서 확인이 되는 것이다.
바울이 유대인들을 접촉할 경우에는 그들에게 일부러 창조 신앙을 역설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하지만 이방인들은 다르다. 선교 전략상 그들에게는 먼저 창조주 하나님 선포를 통해 그리스도 복음을 전파할 필요가 있었다. 신 자체를 부정하는 공산주의자들에게도 이 전략은 동일하다. 이방인의 사도인 바울에게 있어 그리스도 복음을 전하기 위한 기초 선결 지식으로서의 창조 신앙 선포는 선교 전략 상 이렇게 중요한 것이었다.
바울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그리스도의 의”와 “십자가의 도”를 강조한 로마서의 저자다. 로마서는 그리스도인을 대상으로 한 서신이요 아레오바고 연설은 이방인을 대상으로 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브루스는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으로 복음을 전하고자 했던 바울의 선교적 지혜로서 이것을 복음적(evangelium)이라기보다는 ‘복음의 예비(Praeparatio)적 성격을 띠는 연설로 보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사도 바울은 복음의 신출내기가 아니었다. 복음의 본질(텍스트)와 상황(컨텍스트)를 구별 못할 만큼의 미숙한 전도자는 전혀 아니었던 것이다.
예수에게 있어서도 이 같은 유비는 설득의 도구였다. 예수는 창조계식, 자연계시를 구속 계시의 접촉점으로 부단히 사용하셨다. 예수의 자연계시는 단순한 자연계시와 자연 신학에 그치지 않고 구속 계시로 연결하는 복음 사역의 예비적 과정이었다. 예수의 창조주 자연계시는 이신론(理神論)에 머무르지 않고 복음적 창조주 하나님 계시로 나아간다.
골로새서에서 사도 바울은 예수를 창조주 하나님으로 묘사하면서 영적 존재들도 피조 된 존재들이라고 설명하였다(골1:16). 4복음서는 모두 이들 영적 존재들인 사단과 귀신의 존재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신약 성경에 사탄은 32회 가운데 14회 복음서에서 언급되며 귀신은 복음서를 제외한 신약(행, 고전, 딤전, 약, 계) 성경에 11회 언급된 가운데 복음서에는 100여 회가 넘는 빈도로 등장하고 있다. 사도 바울과 달리 예수는 이들 영적 존재의 창조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으나 사탄과 귀신과 같은 영적 존재들이 있음과 더불어 그들도 예수 자신의 통치 아래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영적 존재인 사탄과 귀신에 대해 예수는 인격을 가진 그들과 대화한다. 물론 그들이 예수의 사귐의 대상은 아니었다.
예수에게 사탄은 꾸짖어 쫓아낼 존재요(막8:33), 귀신도 악하고 더러워 추방해야 할 존재였다(마12:43, 45). 예수는 십자가 죽음과 3일 만에 살아날 것을 예언한 가르침에 대해 예수께 항변하며 이 같은 일이 예수에게 일어나지 않기를 소원하던 제자 베드로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라고 말하며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로 책망하였다. 또한 ‘사탄’은 제자 가룟 유다에게 들어갔다(요13:27). 그렇게 복음서의 예수는 인류 타락과 죄와 불순종의 배후에 있는 인간이 그 전모를 파악하기 결코 쉽지 않은 심각한 영적 존재에 대해 자연스럽게 계시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자연계시를 통해 의인 욥의 고난의 배후에 있는 사탄의 존재를 계시하신 하나님을 연상케 하는 한다(욥1-2장 참조). 심지어 하나님은 욥기 41장에서는 ‘사탄’이라는 언급을 한마디 하지 않으면서도 ‘리워야단’이라는 동물(자연계시)를 통해 모든 높은 자를 내려다보며 모든 교만한 자들에게 군림하는 왕으로서의 사탄에 대해 암묵적 계시를 하고 있다. 욥이 깨닫고 회개하고 은혜 받고 복 받은 것은 구속 계시가 아닌 놀랍게도 모두 70여 가지에 달하는 속사포 같은 하나님의 자연계시 속에서 이루어졌다. 교만하고 군림(소위 ‘갑질’)하는 자는 베드로나 가룟 유다처럼 ‘사탄’의 도구나 다름없다 할 것이다.
예수를 창조주 하나님으로 인식하는 것은 기독교 신학의 핵심이요 기독론의 중심이다. 예수의 자연계시가 자연을 초월함 속에서 전개되는 것은 삼위의 제 2위이신 창조주 하나님, 예수의 모습을 드러낸다. 초대교회 교부 이레네우스 역시 말씀과 하나님의 영, 즉 그리스도와 성령을 우주를 창조하는 하나님의 두 손이라고 표현하여 삼위일체적 창조를 언급한다. 그런데 20 세기 들어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을 비롯한 현대 신학자들은 예수를 구속사(Heilsgeschichte) 내에 묶어두려는 의도적 시도를 통해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애써 숨기려드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사도 바울도 그리스도가 인간만이 아닌 모든 피조물의 창조주임을 언급한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골1:15-17). 예수는 곧 창조주임을 전파하여 자연스럽게 그 예수를 우리의 주(主)요 구주(救主)로 연결한다(고전8:6). 바로 예수가 전한 그 방식이었다.
Ⅵ. 나가면서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존재론적 간극(ontological gap)이 엄연한 현실 아래에서 자연계시의 구원적 가치(salvific value)의 문제는 포스트모던 시대를 맞으면서 여전히 그치지 않고 있다. 전면 부정론과 비관론을 넘어 오히려 논쟁은 더 심화 되는 듯하다. 포스트모던 신학자 클락 피녹(Clark H. Pinnock)은 일반 계시를 구원적 가치에 적극적으로 연결을 시도하는 인물이다. 오늘날 일반 계시에 구원의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가톨릭 신학의 공식 입장이다. 대표적 종교 다원주의자 존 힉(John Hick)은 신적 계시로서의 성경을 포기하고 자연 종교로 돌아가고 있다.
하지만 반 틸(Cornelius Van Til)은 개혁신학의 특징 가운데 일반 계시의 명료성을 말하나, 타락한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일반 계시로는 누구도 실제적인 하나님을 참된 창조주로 알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성경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우리 인간은 늘 제한을 가진 도구로 하나님을 이해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의 불완전이라기보다 분명 인간의 죄성과 그에 따른 교제의 상실 그리고 피조물로서의 인간이 지니는 한계 때문이다. 인간은 오직 부분을 다룰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특수 계시가 적용되는 공간은 여전히 일반 계시의 영역이다. 이 점을 깨닫는다면 창조된 우주 안에 하나님이 계시(啓示)는 인간의 정신 활동 가운데서 제한적으로 살아날 수 있다.
예수의 자연계시는 두 가지 측면 즉 자신이 곧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시요 동시에 그리스도이심을 드러내는 구속 계시를 향한 연결 고리를 제공하는 길잡이 역할을 한다. 이신론의 영향 속에서 ‘자연에 의존하는 신학이 계시를 뒷받침하기보다 희생시켜 왔다’는 생각이 20 세기 신학을 지배하여 온 것은 분명 사실이다. 그래서 지난 세기 신학자들이 자연계시의 합리성을 알면서도 자유주의 신학자라거나 무지한 신학자라는 공격을 염려하여 자연 신학이라는 언어의 불충분성 때문에 자연계시의 유용성조차 포기해버리는 경우가 많았다고 볼 수 있다.
알리스터 맥그라스(Alister McGrath)가 자연 신학에 대한 바르트의 극단적인 부정적 견해에 대해 바르트의 비판이 (1) 부적절한 성경적 기초에 기초하며, (2) 바르트 자신이 개혁신학의 전통에 있다는 주장이나 칼빈이 자연 신학에 대해 반대자의 입장에 있었다는 견해는 모두 잘못이요, (3) 자연 신학에 대한 바르트의 부정적 태도는 자연과학에 대한 무관심 때문이라고 비판한 것은 바로 20 세기 주요 신학에 있어 자연계시와 자연 신학을 보는 편견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보여준다.
삼위의 제 2위이신 ‘창조주 하나님, 예수’가 바라보고 언급하고 사역한 공생애를 통한 창조계식(자연계시)는 결국 궁극적 구속 계시로 연결되는 접촉점을 찾는 작업이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의 창조 신앙도 결국 체계적으로 의도한 작업은 아니었을지라도 궁극적으로는 개종 이전의 히브리적 창조 신앙을 그리스도에게 연결한다. 즉 바울은 기독교 신앙을 정립하는 과정 속에서 창조 신앙을 구속 신앙의 완성을 위한 마중물이요, 기초석으로 삼았다. 그는 통전적인 기독교 사랑의 실현으로서의 하나님 계시를 구원론적, 종말론적 구원–창조 신앙으로 연결하는, 조직적이며 선교적인 작업을 통해서 자신의 창조 신앙을 복음을 전혀 몰랐던 이방인들을 향한 자연스러우면서도 필연적인 논리적 도구로 사용하였다고 볼 수 있겠다.
조덕영 박사 bareunmedia@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