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본 연재는 북 이스라엘과 남유다의 멸망부터 A.D. 70년 예루살렘 함락에 이르기까지 주요 왕조의 발흥과 쇠퇴를 중심으로 진행할 예정입니다.
알렉산드로스의 사후 제국은 여러 나라로 분열되었다. 유대인들은 분열된 나라 중 먼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지배를 받게 된다. 이 왕조 아래 약 120년을 지낸 유대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셀류쿠스 왕조 사이에 벌어진 갈등에 휘말리며 다시 한 번 큰 변화를 맞게 된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서 셀류쿠스 왕조로
셀류쿠스 왕조의 탁월한 왕으로 꼽히는 안티오쿠스 3세는 넓은 영토를 확보하고 부를 축적했다. 그는 B.C. 198년, 파네아스 전투에서 프톨레마이오스를 격파하고 유대 땅을 손에 놓는다. 당시 유대는 셀류쿠스의 편에서 프톨레마이오스의 군대를 몰아내는 데 힘을 모았다.
안티오쿠스 3세는 유대인들이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허락했고, 다 년간 세금 면제 및 도시와 성전 재건 등 파격적인 호의를 베풀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을 향한 셀류쿠스의 호의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로마에 패배한 셀류쿠스
당시 셀류쿠스 왕조에는 한때 로마를 멸망 직전까지 몰고 갔던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 장군이 망명을 와 있었다. “반드시 로마를 쓰러트린다”라는 한니발의 평생의 꿈 때문이었을까. 안티오쿠스 3세는 한니발의 격려를 받아 로마와 전투를 벌인다.
B.C. 190년 안티오쿠스 3세는 로마와의 전쟁에서 참패를 당하며 많은 영토를 빼앗겼다. 셀류쿠스 왕조는 일부 정복지를 포기한다는 조건에 합의했고, 아들 안티오쿠스 4세를 볼모로 내어 주었다. 결정적으로 엄청난 액수의 전쟁 배상금을 물어야 했다(편집자 주: 5천 달란트부터 1만 5천 달란트까지 학자들 간에 액수 차이가 있다.).
배상금 문제로 셀류쿠스 왕조는 피지배 계층, 특히 유대인들에 대한 호의적인 태도를 거두었다. 나라 안에 있는 모든 신전의 재산을 압류하는 과정에서 예루살렘 성전의 재산을 강탈했다. 레이몬드 설버그에 따르면 안티오쿠스 3세는 왕국의 남동부에 있는 한 신전의 재물을 압수하는 도중 살해당했다.1) 안티오쿠스 3세에 뒤이어 왕위에 오른 셀류쿠스 4세 역시 10여 년의 통치 끝에 암살당하고 말았다.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안티오쿠스 에피마네스!
셀류쿠스 4세가 죽자 로마의 볼모로 잡혀있던 그의 동생 안티오쿠스 4세가 돌아와 왕위에 올랐다. 레이몬드 설버그는 안티오쿠스 4세가 사악한 행위로 인해 유명해졌는데, 심상치 않은 정신착란으로 고생했다고 전한다.2) 흔히 안티오쿠스 4세는 현명한 신(혹은 신의 현현)이라는 의미의 에피파네스를 붙여 자신을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라고 지칭했는데, 당시 사람들은 미친 사람이라는 뜻의 에피마네스를 붙여 안티오쿠스 에피마네스라고 부르기도 했다.
안티오쿠스 4세는 자신에게 상당량의 돈을 지불한 야손을 대제사장으로 임명했다. 성직 매매가 시작된 순간이었다. 이후 메넬라우스는 야손보다 더 많은 돈을 내고 야손의 자리를 빼앗았다. 이 같은 성직 매매는 이후 예루살렘 멸망까지 이어졌다.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동전
|
본격적인 유대인 박해
안티오쿠스 4세는 프톨레마이오스가 다스리는 애굽을 점령하길 원했다. 그는 여러 차례 애굽에 선전포고 후 전쟁을 했는데, 두 번째 전쟁에서 유대 땅에 큰 변화가 찾아왔다. 안티오쿠스 4세가 전쟁 중 사망했다는 소문이 퍼졌고, 메넬라우스에게 대제사장 자리를 빼앗긴 야손은 이 기회를 틈타 메넬라우스를 몰아내기 위한 전쟁을 벌였다. 안티오쿠스 4세는 야손의 이 같은 행위를 반역으로 간주하고 예루살렘으로 진격해 피의 보복을 감행했다. 성전의 기물을 약탈했고, 인두세, 성전세 등 다양한 명목의 세금이 과중하게 유대인들에게 부과되었다.
안티오쿠스 4세는 다시 애굽과 전투를 벌였지만, 로마의 지원을 받은 애굽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굴욕을 맛본 안티오쿠스 4세는 본국으로 돌아가던 중 유대인들에게 여러 가지 명목을 씌워 분풀이를 시작했다. 안티오쿠스 4세에 의해 파견된 아폴로니우스와 2만 2천 명의 군대는 예루살렘에서 학살을 자행했다.
이들은 예루살렘 성벽을 파괴하고 ‘아크라’라는 요새를 세워 유대인을 감시했다. 존 브라이트는 아크라에 대해 “단지 군대 수비대가 주둔하고 있는 일개 성채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불쾌한 곳이었다. 그곳은 헬레니즘화된 이교도들과 배교한 유대인들이 사는 하나의 식민지로 예루살렘 성벽에 둘러싸여 독자적인 체제를 갖추고 있었던 헬라인 도시 국가”였다고 평가한다.3)
안티오쿠스 4세는 안식일을 지키지 말 것, 할례를 하지 말 것, 율법서를 소유하지 말 것 등 유대인들의 신앙의 근간을 뿌리 뽑을 만한 내용의 칙령을 발표했다. 그는 과거 로마에 볼모로 있으며 그리스 문화에 큰 감명을 받았는데, 자신이 지배하는 나라를 헬라화 시키겠다고 다짐했다. 안티오쿠스 4세의 박해와 칙령, 헬라화 계획은 유대인의 반발을 샀다. 그럴수록 안피오쿠스 4세의 박해는 심해졌고 많은 희생자들이 발생했다.
희생당한 이들은 대부분 하시딤 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이다. 하시딤이란 경건한 자들이라는 뜻으로, 유대의 헬라화와 성직 매매, 안티오쿠스 4세의 칙령에 반대했던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이 같은 상황에도 메넬라우스는 유대의 헬라화에 앞장섰고 성전에서 제우스에게 돼지고기를 제물로 바치는 일도 벌어졌다. 그럴수록 하시딤은 선조들의 신앙의 도리를 고수하고 헬라화 정책에 반대했다. 이 같은 반대는 한 가문의 주도하에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1) 레이몬드 설버그, 『신구약 중간사』(기독교문서선교회, 2004), 37.
2) 같은 책, 37-38
3) 존 브라이트, 『이스라엘의 역사』(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3), 583.
조믿음 기자 bareunmedia@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