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곤주 목사의 로마서 핵심 요약(2)
바울은 로마서 4장에서 다윗의 행복과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다윗과 같이 자신의 의로운 행위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은혜로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께 의인으로 인정받은 사람들이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라고 시편의 내용을 인용해서 말하고 있습니다(시32:2). 그리고나서 바울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할례자와 무할례자 모두의 조상이 되었다는 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 김곤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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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신앙은 연약했고 아브라함의 순종은 불완전했습니다. 하지만, 25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면서 그의 믿음은 성장해 갔습니다. 그 결과 아브라함이 100세가 되었을 때 자신의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는 믿음의 수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을 받은 이후에, 실제로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 되어가는 믿음의 과정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바울은 인간이 의롭다고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이 오직 믿음으로 된다는 사실과 그 믿음은 순종의 행위로 나타나게 된다는 사실을 이야기한 이후, 5장에 와서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영적인 부요함(축복)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화목(평화)을 누리고, 그 결과 영혼의 참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5:1), 또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들어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참 소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5:2)
또 바울은 아담 한 사람으로 인해서 인류 전체가 하나님의 형벌 아래 있게 되었고, 반대로 예수님 한 사람으로 인해서 인류 전체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아래 있게 되었다고 ‘대표성의 원리’를 설명합니다(5:17〜19). 그리고 인간에게 율법이 주어졌을 때, 그 율법은 인간의 죄를 더 분명하게 깨닫게 해주고 보여주었다는 점을 말합니다(5:20〜21). 바울은 이러한 이유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고 말하면서,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하나님의 의(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영생에 이르게 한다고 말씀합니다.
6장에 와서 바울은 당시 교회가 행했던 물세례의 실제적인 사건을 비유로 믿음에 의한 영적 연합의 원리로서 영적 세례를 설명합니다(6:1〜11). 그리고나서, 몸의 욕망에 순종하여 너희 지체(몸)를 죄에게 내주지 말고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권면합니다(6:12〜13). 동시에, 바울은 신자들이 은혜 아래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죄를 지으며 살아갈 수 없다고 말하면서, 신자들은 ‘율법아래 있지 않고 은혜아래 있다’고 말씀합니다(6:14〜15). 여기서 ‘율법아래 있지 않다’는 말은 신자는 율법과 상관이 없는 삶을 살아간다는 말이 아니라, 신자가 율법을 지키는 노력으로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7장에서 결혼제도를 예로 들면서, ‘이제는 율법에서 벗어나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고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하지 않는다’(7:6)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영의 새로움’이란 ‘성령의 새로운 방식 안에서’(in the new way of the Spirit: NIV), 즉 ‘성령으로 말미암은 새로운 생활’을 의미합니다(롬2:29 cf. 6;4; 8:4). 따라서 ‘예수를 믿은 우리들에게도 율법은 필요 없다’고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에 의하면, 구원받은 신자들은 유대인들과 같이 율법의 외면적 행위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아니라, 복음의 은혜를 따라서 성령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으로 말미암는 참된 내면적 변화를 통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롬2:29; cf렘31:33; 겔36:26〜27).
바울은 ‘율법은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7:12). 다시 말해서, 율법은 선하고 거룩한 것이지만, 죄를 드러내기 위하여 율법이 있다’고 율법의 소극적 측면을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롬7:13; cf.갈4:1〜5).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분이시기에 하나님이 주신 율법도 거룩하고 의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어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교훈해서 의롭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게 해주기 때문에 신령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7장 14〜17절의 내용을 통해서 ‘선한 율법과 내 속에 거하는 죄’를 비교해서 대조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7장14절 이후에 ‘하나님의 율법은 신령하지만 나는 죄에게 팔려서 죄의 종이 된 것처럼 신령하지 못하다’는 고백이 나옵니다. 이와 관계된 해석들을 크게 세 가지로 소개해 드리면, 첫째로 본문에 나오는 절망적인 “나”는 예수를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나 불신자들을 가르킨다는 주장, 둘째로 사도 바울이 예수를 믿기 전에 한 고백이라는 주장, 세 번째로 사도 바울이 예수를 믿은 후에 한 고백이지만, 성령체험의 경험이 없는 연약한 신앙의 상태에 있었을 때 한 고백이라는 주장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나오는 “나”는 사도 바울이 예수를 믿은 후에 성령의 은혜를 받아서 하나님께 헌신된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여전히 그 마음속에 계속되는 죄에 대한 갈등을 고백한 내용이라고 보는 것이 더 바람직합니다. 실제로 사도 바울은 약 A.D. 60년 초에는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엡3:8)에게 은혜를 주셨다고 고백했지만 그의 사역의 말년인 A.D. 63〜67년경에는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1:15)고 고백했습니다. 이처럼 신자의 삶은 자신의 연약함을 안고 갈등하고 절망하면서 더 성숙하고 겸손한 신앙의 걸음을 내딛게 되고, 그러한 가운데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갈 때 죄를 이기는 믿음의 승리가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다음으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느니라”(롬8:2)고 말합니다. 이 말을 오해해서 율법 아래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저주아래 있기 때문에, ‘행하라’는 율법을 지키려고 하는 것은 자기 의를 내세는 또 다른 불신앙적 행위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물론 바울은 ‘율법은 사망의 법’이고, ‘율법 아래 있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는 말을 했습니다(롬8:2; 갈3:10).
그러나 율법을 ‘사망의 법’이라고 한 것은 율법이 우리의 죄를 정죄하고 그 결과 우리는 사망에 이르게 된다는 뜻에서 한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을 통하여 구원에 이를 수 없고, 율법 그 자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지 못하기에, 이런 차원에서 성령의 법이라는 말과 대조해서 ‘사망의 법’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으면 생명의 성령의 법안에 머물러 살기 때문에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롬8:4).
다음으로 바울은 신자의 현재적(실존적) 삶의 자리에서 이야기를 시작하고나서 8장 15〜25절에서 신자의 현재와 영원한 미래를 하나의 연장선에 두고 말합니다. 즉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8:17)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장차 누리게 될 종말론적 차원의 영원한 축복을 말합니다(cf롬4:13〜17; 8:18〜23). 따라서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감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롬 8:17〜18. cf엡1:11〜14).
더 나아가서, 바울은 신자와 불신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뿐만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피조물(창조물)도 고난을 당하고 있다고 말씀합니다(8:22).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자녀들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이 이러한 고통과 썩어짐의 종노릇하는 것으로부터 해방되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고통에서 해방될 때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때’(8:19)이며,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광의 자유에 이를 때’(8:21)입니다. 즉, 이 세상 만물의 회복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과 다시 오심 안에 계획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다시 오실 때 완성 되어질 구원과 회복의 영광이고, 고난의 인생을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참된 소망입니다(8:24〜25).
이 마지막 열매를 맺게 될 때까지 성령의 도우심이 함께 할 것을 바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8: 26〜30). 그러므로, ‘하나님이 모든 일을 합력해서 선을 이루신다’(8:29)는 말은 이 땅에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고 우리가 장차 하늘나라에 가서 영원한 영광을 누리도록 하나님이 모든 사건들 가운데 일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와 관련해서, 바울은 ‘하나님이 부르셨다’는 말을 세 번에 걸쳐서 사용하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미리 아시고(예지), 미리 정하시고(예정), 부르시고(효과적 부르심), 의롭다 하시고(칭의), 영화롭게 하셨다고 설명합니다(28〜30).
하나님의 부르심은 구원의 출발점이요 거룩한 삶의 출발점이 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가 없습니다(11:29). 이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는데 누가 우리를 정죄할 수 있겠느냐(8:33)고 바울은 말합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우리가 환난과 곤고와 박해와 기근과 생명의 위협을 받는 것이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말씀하면서, 그것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8:35)고 말씀합니다.
편집자 주: 김곤주 목사는 안양대 (B.A) 및 안양대 신대원(M.Div) 을 졸업한 이후, 호주(Australia) 몰링 학교(Morling College)와 무어 신학교(Moore College)에서 각각 성경신학 석사과정 (MA in Theology)을 졸업 했다. 코람데오 신학교(CoramDeo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약학을 가르쳤고, 현재는 호주 시드니에서 새언약 교회를 담임으로, 필리핀 세부 연합 신학교 (Subu Union Theological College) 교수로 사역 중 이다. 저서로는 『 원문 중심의 이야기 로마서 』 (세움북스)가 있다.
김곤주 목사 bareunmedia@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