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적 선언으로서의 칭의

박재은 박사의 칭의 바르게 이해하기(4)


칭의 교리를 다룸에 있어 칭의”(justification)란 단어의 의미 자체를 정확히 규정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왜냐하면 칭의라는 단어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칭의의 구조과정결과가 판이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결론부터 말하자면칭의는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법적 선언으로 이해해야 한다칭의는 왜 하나님의 법적 선언으로 이해해야 하는가총 세 가지로 그 이유들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1) 성경적 이유, (2) 신학적 이유, (3) 실천적 이유들이 바로 그것들이다.

▲ 박재은 박사

성경적 이유

구약에서는 의롭다라는 뜻을 표현하기 위해 히브리어 짜다크가 사용되었고신약에서는 디카이오오(δικαιόω)라는 헬라어 단어가 사용되었다둘 다 법정적 선언(forensic declaration)의 의미가 내포된 단어이다구약에서는 대표적으로 신명기 25장 1절을 예로 들 수 있다. “사람들 사이에 시비가 생겨 재판을 청하면 재판장은 그들을 재판하여 의인은 의롭다 하고 악인은 정죄할 것이며.” 재판장은 의인을 의롭다 선언하고죄인을 악하다 선언하는 법적인 권리와 권위가 있는 존재이다죄인과 의인을 가르는 기준은 법적으로 공명정대(公明正大)해야 한다.

 

성경에서는 이 공명정대한 기준점을 하나님의 성품에 돌리고 있다즉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공의로운 분이시므로 그의 법적 선언은 언제나 옳은 것이다. “…나는 악인을 의롭다 하지 아니하겠노라”(출 23:7). 성경에서 법적인 선언은 곧 심판을 의미한다. “주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행하시되 주의 종들을 심판하사 악한 자의 죄를 정하여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돌리시고 공의로운 자를 의롭다 하사 그의 의로운 바대로 갚으시옵소서”(왕상 8:32). 지금까지 언급된 모든 구약구절들은 의롭다의 히브리어 동사인 짜다크를 기본 어근으로 삼아 법적으로 의롭다 선언하는 의미가 내포되어있다.

 

신약 성경에서도 의롭다를 뜻하는 헬라어 동사인 디카이오오를 사용하여 법적 선언의 의미가 내포된 형태로 칭의 논의가 전개되는 것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로마서 8장이 대표적이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롬 8:33). 이 구절은 법적 용어로 가득 찬 구절이다하나님의 법정적 선언에 대해 그 누구도 법적으로 고발”(혹은 송사”)할 수 없다는 것이다로마서 4장 5절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이 구절에서 의롭다 하시는”(δικαιοντα)이란 표현은 법적 선언으로서의 칭의 개념을 잘 드러내 준다즉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이유는 그 죄인이 어떤 행위를 해서가 아니라(그러므로 일을 아니할지라도”) 혹은 경건했기 때문도 아니라(그러므로 경건하지 아니한 자”) 오히려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죄인의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간주” 혹은 여겨 주신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법적 선언으로서의 칭의 개념이 명확히 드러난다신구약 성경에서 짜다크와 디카이오오의 사용은 죄인을 의롭게 만들어 주는” 의미가 아니라 여전히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법적으로 의롭다고 선언여겨칭해” 주는 것을 의미한다그러므로 의롭다의 성경적 용례는 본질적인 갱신이나 의롭게 변화되어가는 과정을 지칭한다기보다는 죄인의 신분이 바뀐 것에 대한 공개적인 법적 선언에 더 가깝다이러한 성경적 용례는 다음부터 살펴볼 신학적 이유와도 밀접하게 관련을 맺어 논의의 물꼬를 튼다.

신학적 이유

신구약 성경 속에서 사용된 의롭다라는 단어가 뜻하는 바는 내부적 변화나 갱신을 뜻하기보다는 바뀐 신분에 대한 법적 선언이라는 사실을 앞에서 살펴보았다또한, 법적 선언을 하는 주체는 공의로운 재판장이신 하나님이라는 사실도 살펴보았다이를 확고히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칭의 선언의 궁극적 주체를 하나님께로 돌릴 수 있다법적인 선언은 재판장이 가진 고유 권한이다공의로운 재판장은 사사로운 감정이 아닌 법을 기준으로 재판한다유일무이하고 영원한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법에 근거해 내리는 법적 선언은 언제나 옳고 언제나 공의롭다하나님의 성품이 가득 깃들어 있는 그의 법은 무궁하며 공명정대하기 때문이다그러므로 함부로 하나님의 판단에 토를 달 수 없다(욥 32:2). 하나님만이 칭의 선언의 궁극적 주체이다이러한 고백은 인간 스스로가 칭의 선언의 궁극적 주체가 되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 차 있는 근현대 칭의론의 인간중심주의적 경향에 경종을 울리는 고백이다.

 

만약 칭의 선언의 주체를 인간으로 상정한다면 이것이야말로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라는 격이다전적 타락한 인간이 전적 타락한 또 다른 인간을 향해 의롭다고 선언할 수 없다공의 상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자기 스스로를 의로운 자로 셀프 칭의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상천하지에 가장 공의로운 분만이 죄인을 법적으로 의롭다고 선언하실 수 있는 자격과 권리가 있다그분이 바로 하나님이다이것이 바로 법적 선언으로서의 칭의 사건이 내포하는 의미이다.

(2) 칭의는 신분의 변화이지 내부적 갱신과 변화를 뜻하지 않는다: 칭의는 죄인의 신분을 의인의 신분으로 간주하는 것(여겨주는 것칭해주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다그러므로 칭의는 죄인의 내부적 질이 결정적으로 갱신되고 변화되어 실제적으로 의로운 자가 되는” 내부 탈바꿈의 이야기가 아니다이러한 내부 탈바꿈의 이야기는 칭의란 용어보다는 로마 가톨릭식의 의화(義化)라는 용어가 더 어울린다로마 가톨릭과는 다르게 개신교 신학에서는 칭의를 내부 탈바꿈이 아닌 법적 선언으로 본다이 차이는 전가”(imputation)와 주입”(infusion)이라는 단어로 서로 간에 존재하는 팽팽한 의미 차이를 부각시킬 수 있다즉 전가란 죄인 밖에 존재하는 낯선 의”(iustitia aliena)가 죄인에게 신비적으로 넘어오는 것을 지칭한다(그러므로 전가”). 이 낯선 의는 우리 안에서는 절대 발견 할 수 없는 의이기 때문에 낯선 의(혹은 외부적 의)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지칭한다(이는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의 설명이기도 하다). 

반면 주입이라는 용어는 하나님의 의가 은총이라는 형태로 죄인에게 직접적으로 주입되는 것을 뜻한다주사를 맞듯이 하나님의 의의 은총이 신자에게 주입되기 때문에 신자의 영적인 본질과 도덕적인 본질이 신자의 내부에서 실제적 변화와 갱신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이러한 주입 개념은 바로 위에서 논의한 칭의 선언의 궁극적 주체를 누구로 볼 것인가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많은 문제를 양산해냈다왜냐하면 주입 교리가 가능하게 되기 위해서는(즉 하나님의 의의 은총이 신자에게 주입되기 위해서는), 신자가 미리 마음의 성향과 의지의 뜻을 내부적으로 준비해야 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선행 준비 없이는 주입도 없다결국 칭의 선언의 유일무이한 궁극적 주체가 하나님 외에” 또 다른 존재가 필요하다는 논리가 생겨난다이러한 로마 가톨릭 논리는 칭의를 법적 선언으로 파악 한 종교개혁 신학과 극렬하게 논쟁해 온 대척점이었다.

 

실천적 이유

칭의를 법적 선언으로 이해하는 견해를 껄끄럽게 생각하는 진영은 다음과 같은 이유를 가지고 반대 논리를 펴나간다. (1) 만약 칭의가 법적 선언에 불과하다면그러한 칭의는 신자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사변적”(speculative) 탁상공론에 불과한 교리가 될 것이다. (2) 만약 칭의가 법적 선언 정도에 그치고 만다면점점 더 의롭게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삶을 살아내야 하는 신자의 삶의 태도에 부정적 영향을 초래한다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법적 선언으로서의 칭의 사건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발로로 생겨난 얕은 논리이다.

 

법적 선언으로서의 칭의 사건은 절대로 탁상공론의 공허한 교리로 그 생명선이 끝나지 않는다오히려 신자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구체적 행동 지침을 내려주는 매우 실천적 교리이다의롭다고 간주 될 그 어떤 자격도 없는 자가(롬 4:5)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의롭다 칭함을 받았다면(롬 3:24) 이 사실을 깨달은 자가 마땅히 해야 할 행동은 받은 은혜에 감사하여 최선을 다해 주어진 순례자의 길을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살아내는 일일 것이다(엡 4:24).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일관되게 가르치는 바요지속적으로 요구하는 바이다또한 이것이야말로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히 12:4).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으로 인해 우리의 죄책은 남김없이 해결되었고(이에 대해서는 “6죄인인가 의인인가과거현재미래의 죄는 모두 사해졌는가?”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볼 것이다이로 인해 더 이상 죄인이 아니라 의인으로 신분이 바뀐 것에 대한 법적인 선언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지만우리는 여전히 죄성의 유혹에 빠져 살아가고 있다(롬 7). 그러므로 그리스도와의 연합 가운데 이미 받은 의인이라는 신분은 죄와 싸워나갈 수 있는 참되고 강력한 원동력을 신자들에게 제공할 수 있다죄가 더 이상 신자의 삶에 궁극적인 주인 노릇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롬 8:2). 이것이야말로 법적 선언으로서의 칭의 교리가 한껏 품고 있는 실천성의 정수이다.

나가는 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는 공의로운 재판장이신 하나님의 법적 선언으로 죄인의 신분이 아닌 의인의 신분으로 비로소 하나님 앞에 담대히 설 수 있게 되었다신자는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골 1:22)로 선언되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선언을 받은 우리는 이제 더 이상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결코 정죄함이 없다”(롬 8:1). 법적 선언으로서의 칭의는 감격이요 은혜이다우리를 본질상 진노의 자녀에서 의의 자녀로 신분적 입적을 해주셨다(엡 2:3). 의롭고 영원한 재판장이신 성부 하나님께서성자 그리스도의 온전한 의의 전가를 통해우리의 새로운 신분을 법적으로 만 천하에 선포하셨다이것이 바로 법적인 선언으로서의 칭의 사건의 모체요 핵심이다법적 선언으로서의 칭의는 우리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위대하고 감격적인 사건 중의 사건이요 복 중의 복이다.

편집자 주필자 박재은 박사는 미국 칼빈 신학교에서 조직전공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고현재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조직신학을 강의하고 있다저서로 『칭의균형 있게 이해하기』(부흥과개혁사), 『성화균형 있게 이해하기』(부흥과개혁사)가 있다.

박재은 박사 jepark.theopneusto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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