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달 정도 주말이면 늦은 시간까지 채널 OCN에 시선을 고정했었다. <구해줘>라는 드라마 때문이었다. 일종의 스릴러 장르 드라마인데, 사이비 종파의 일탈과 비행을 다룬 종교물이었다. <이단사상비판>이라는 과목을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작가와 감독이 어떤 관점으로 사이비를 접근하는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고, 드라마 그 자체의 극적인 구성도 매우 탄탄하게 전개된 탓이 지루하지 않게 몰입할 수 있었다. “고구마” 드라마라는 비판도 없지 않았으나, 사이비종파의 문제를 조목조목 밝히고, 악행을 고발하고 청산해야 하는 근거를 설득력 있게 쌓아가기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접근이지 않나 싶었고, 오히려 그것이 최종회에서 극적인 카타르시스를 고양시키지 않았는가 싶다.
▲ 유태화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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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구해줘>를 보면서 신학자인 내게 특별하게 다가왔던 것은 사이비와 정통 사이를 가르는 기준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예배, 기도, 찬양, 방언, 축사, 치유와 같은 형식을 놓고 볼 때는 사이비도 정통과 매우 근접한 요소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경험적인 차원에서 볼 때, 누군가의 눈에는 대중적인 기성종교와 어떤 점에서 다른지 얼른 분간되지 않을 만큼 조밀한 유사성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드라마상의 교주인 영부의 행위는 모두 조작된 것이지만, 악령에 사로잡힌 교주도 있을 수 있고, 또한 일반 회중이 볼 때는 보이지 않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작가와 감독은 사이비 종파인 “구선원”을 드러내는 과정에 매우 대중적인 종교와 의도적인 겹치기를 기도함으로써 드라마의 긴장감을 더욱 고조하지 않았는가 싶다. 예배와 교육과 전도와 봉사와 같은 영역들을 현실 그대로 차용함으로써, 또한 찬양과 기도와 방언과 축사와 치유와 같은 것을 동원함으로써 사이비와 정통 사이의 관계를 매우 긴밀하게 끌어당겨놓았다. 물론 그렇지 않은 대다수의 기성종교가 있다. 그러나 대중적인 차원에서 상당한 수의 기성종교가 그런 양상을 가지고 있는 것도 부인하기 힘들기 때문에 문제의 양상이 훨씬 더 복잡해진다.
종교현상학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사이비와 정통 사이에는 그렇게 큰 차이가 없어 보일 수도 있지 않나 싶다. 중세의 교회도 대중적인 종교성을 표방하고 지향할 때 마리아와 성자숭상과 관련한 형태의 지나친 관행들이 생겨났다. 종교개혁(이후)의 유산을 상속한 한국 개신교회도 대중화의 길을 걸을 때 한반도에 광범위하게 기생하는 기존의 종교적 관행들을 교회 안으로 유입하는 타협을 시도하지 않았나 반성하게 된다. 전형적인 것이 샤머니즘의 관행이다. 이런 점에서는 정통을 표방하는 종파에서 자기를 반성적으로 살피는 일이 꼭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 사진출처: OC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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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구해줘>를 보면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사이비와 정통 사이의 핵심적인 차이는 바로 가르침에 있다는 사실을 꼭 언급하고 싶다. 사이비가 표방하는 가르침과 정통이 표방하는 가르침 사이에 근본적이고 핵심적인 차이가 실재한다. 텍스트를 공유하고, 찬양을 광범위하게 공유하고, 종교적 예전을 형식적으로 흉내 낸다고 하더라도, 흉내로는 막을 수 없는 근본적이고 핵심적인 차이는 바로 텍스트 읽기이다. 텍스트를 공유하고 텍스트를 읽되 어떤 관점으로 읽느냐가 관건이다. 관점이 사적이나 공적이냐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관점은 사사로워서는 안 된다.
“관점”, 그것은 이 땅에 존재해 온 정통이 그의 선조들,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동료들, 그리고 미래에 존재하게 될 후손들과 함께 공유하는 것에 기반 하여 구성된다. 정통을 가늠하는 관점은 사적이거나 사사로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깊이 유념해야 한다. 이것은 기독교 안에서 뿐만 아니라 일반해석학에서도 마찬가지다. 관점은 언제나 기존의 공동체를 근간하는 전통에 근거해야 한다. 따라서 삼 세대가 공유하는 관점은 올바른 전통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사이비가 아닌 정통은 자신이 속한 전통에 정통해야 한다. 정통도 전통에 착근하지 않으면 대중적인 종교로 쉬이 빠져나가는 실수를 피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기성종교는 자신이 어떤 전통에 근거해 있는지를 정확히 확인할 필요가 있다.
과거가 아닌, 오늘의 상황에서 전통은 또한 새롭게 읽혀지지 않을 수 없다. 전통에 정통할 때, 비로소 자신의 모습을 반성적으로 보게 되는 길을 찾을 수 있다. 그 때의 상황과 오늘의 상황이 현저하게 다른 이슈와 엮어 있다는 사실을 매우 명확하게 인지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과거의 정통에 정통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오늘의 상황에서 자신의 삶을 정확히 직면하지 않을 수 없는 예민함을 경험하게 된다. 이 관계성 안으로 자신을 개방하지 않으면 결과적으로 나르시시즘에 빠져 자신을 망치게 되고 만다. 자기만족적인 추구는 변화하는 세상을 직면하고 도전할 수 없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사실 사이비는 전통에 정통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가치를 공유하지도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사사로운 종교로 전락하고 만다. 역사를 통해서 읽혀온 텍스트가 드러내는 정통교훈에 착념하면서 자신을 해석해야 하는데, 그 과정이 없기 때문에 너무나 쉽사리 사사로운 종교로 둔갑하여 결과적으로 혹세무민하는 사이비로 전락하는 것이다. 전통에서 기반 하는 정통에서부터 자신의 삶을 형성해야 하는데, 그것이 없으니 결과적으로 현재의 삶도 왜곡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당연히 미래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사이비가 허물어지는 것은 단순히 시간문제일 뿐이다.
마지막으로 진정한 종교는 계시의 주관성이나 주관성에 기반 한 경험에서 구성되지 않는다. <구해줘>에서 영부는 죽음으로 심판을 받지만 매우 흥미롭게도 교주인 영부의 비행을 보면서 새로운 계시를 경험한 박지영이 분한 강사도(?)는 어느새 새로운 영모로 둔갑한다. 새로운 사이비종파가 시작되는 계시가 바로 계시의 주관성에 묶여 있다. 계시는 주관적이어서만은 곤란하다. 진정한 계시는 텍스트라는 객관성을 떠나서는 성립할 수 없다. 주관의 바다는 너무나 망망하기 때문에, 또 다시 표류할 수밖에 없다. 계시는 객관적이어야 하고, 객관적 계시는 역사라는 준엄한 심판을 통하여 정련된 형태로 자신을 구현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정련의 과정을 통과한 계시만이 종교의 근간을 이루되 사이비의 범주를 벗어날 수 있는 토대로 기능하는 것이다.
유태화 교수(백석대학교 신학대학원) bareunmedia@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