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주권 강조에 집중한 칭의론들_박재은 박사의 칭의 바르게 이해하기(2)
신학과 교리의 역사는 수천 년에 걸쳐 다양한 흥망성쇠를 경험한 장구한 역사이므로 몇 가지 레토릭으로 단순화하여 설명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표현들로 신학 전체 역사를 “대결 구조” 안에서 구도화 할 수 있는데, 예를 들면 객관 vs. 주관, 초월 vs. 내재, 초자연 vs. 자연, 하나님의 주권 vs. 인간의 역할/책임 등이 바로 그것들이다. 눈치 빠른 독자라면 이미 알아챘겠지만 이러한 대결 구조는 두 개의 거대한 대결의 틀 사이에서 벌어지는 다툼인데 즉 “하나님”과 “인간”이라는 두 주요 주체들 사이의 영역 다툼이요 주권 다툼이다.
▲ 박재은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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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성향은 칭의론의 영역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하나님을 칭의 사건의 결정적 주체로 볼 것인지 아니면 인간을 칭의 사건의 결정적 주체로 볼 것인지 혹은 이 둘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지에 대한 첨예한 의견 대립으로 점철된 싸움의 장소가 바로 칭의론의 전쟁터이다. 워낙에 이 싸움이 치열하다 보니 객관성을 상실한 채 서로 양극단으로 치닫는 경향이 짙어왔다. 그 결과 다양한 형태의 불균형적 칭의론들이 양산되고 말았다. 이러한 칭의론의 역사는 가슴 아픈 역사이고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역사이다.
첨예한 대결 구조 안에서 신학을 구도화 하여 설명하는 여러 가지 틀 가운데 본고는 “하나님의 주권 강조 vs. 인간의 역할/책임 강조”라는 틀을 사용하여 장구한 칭의론의 흐름을 2회에 걸쳐 조망해 볼 예정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칭의 사건은 하나님의 주권 강조와 인간의 역할/책임 강조 둘 중에 어느 것 하나 무시되거나 평가절하 되지 않은 채 둘 다를 놓치지 않고 “균형 있게” 조망해야 한다(어떻게 “균형 있게” 조망할 것인지는 추후 연재를 통해서 살펴볼 것이다). 하지만 균형 잡는 작업이 쉽지만은 않다. 안타깝게도 하나님의 주권“만”을 강조하거나, 반대로 인간의 주권을 하나님의 주권보다 “더” 강조하는 경향이 교회사 가운데 왕왕 있어왔기 때문이다. 이번 회에서는 칭의의 영역 가운데서 하나님의 주권 강조에만 집중한 칭의론을 살펴보고, 다음 회에서는 인간의 주권 강조에 더 집중한 칭의론을 살펴볼 것이다. 이러한 작업 가운데 “균형” 잡기가 얼마나 필요하고 중요한지 새삼 느끼게 될 것이라 확신한다.
반(反)율법주의 칭의론
먼저 용어 정리가 필요하다. 반율법주의를 영어로는 “안티노미아니즘”(antinomianism)으로 표기하고, 한글로는 “율법폐기론”이라고도 부른다. 기본적으로 반율법주의는 인간의 “행위”를 평가절하하거나 논외로 두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반율법주의는 17세기 영국에서 크게 유행한 신학 사조인데 그 탄생 배경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반율법주의는 로마 가톨릭 신학(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선행 준비가 합력하여 의롭게 된다는 신학)이나 아르미니우스주의 신학 사상(인간의 믿음이 칭의의 조건으로 작용하는 신학)이 유럽 전체를 강타하는 상황 자체를 심히 못 견뎌했다. 반율법주의자들에게 있어 칭의 사건은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으로만 가능하고, 이 속죄 사역은 완전하게 무상(free) 은혜이므로, 인간의 역할이 그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사건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반율법주의자들은 인간의 믿는 “행위”가 칭의의 방정식 안으로 잠입하는 순간을 매우 경계했다. 그러므로 반율법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칭의는 인간의 “믿음 전”에 벌어지는 사건이다.
물론 반율법주의자들의 최대 논적은 아르미니우스주의였으므로 왜 그들이 칭의 사건 가운데 “믿는 행위”를 철저히 제거하려 했는지 일견 이해는 간다. 인간중심주의 신학이었던 아르미니우스주의에 반대해 어떻게든 칭의의 영역 가운데서 하나님의 주권을 최대한 확보하려 노력한 점은 치하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의 극단적 태도였다. 그들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지 간에 반율법주의가 전개한 칭의론 안에는 “인간”이 들어설 공간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이는 자연스럽게 인간의 책임과 역할이 배제된 채 구원론이 전개되는 양상으로 귀결되었다. 즉 인간의 “믿음 전에” 칭의는 무상으로 완료되었기 때문에, 믿음을 통해 의롭다 칭함을 받는다는 의미인 “이신칭의”(以信稱義, justification through faith) 원리는 무색하게 되었다. 이미 칭의 된 자들의 죄는 하나님 눈앞에서 완전하게 사라졌기 때문에, 더 이상 회개 기도할 필요도 성화의 삶을 살 필요도 없다는 식의 무책임한 논리가 양산될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성화의 가능성과 행함의 필요성이 구조적으로 제한되는 논리를 품고 있다는 측면에서 이러한 사상을 “반율법주의” 혹은 “율법폐기주의”라고 명명한다.
반율법주의 칭의론은 죄인의 칭의를 위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무상으로 “모든 것”을 다 하신다는 것(그러므로 논리적으로는 인간이 해야 할 일이 없음)을 강조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주권이 극단적으로 강조되는 신학 사상이다. 반율법주의 논리 가운데서는 인간의 책임과 역할이 자연스럽게 배제되므로 반율법주의적 칭의론은 불균형적 칭의론의 전형으로 발전한다. 존 이튼(John Eaton, 1574-1630), 토비아스 크리슾(Tobias Crisp, 1600-1643), 존 설트마쉬(John Saltmarsh, d.1647) 등이 대표적으로 반율법주의적 칭의론을 전개한 인물들이다.
2. 하이퍼(hyper) 칼빈주의 칭의론
하이퍼 칼빈주의 혹은 초(超)칼빈주의는 18세기 영국에서 일어난 신학 사상이다. 하이퍼(hyper) 혹은 초(超)라는 용어 자체가 의미하듯이 하이퍼 칼빈주의는 칼빈주의를 “뛰어넘는” 신학 사상을 뜻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뛰어 넘는다는 말인가? 만약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듯이 칼빈주의를 하나님 주권 강조 사상으로 상정한다면, 하이퍼 칼빈주의는 칼빈주의가 지향하는 하나님 주권 강조 사상을 한층 더 뛰어넘어 하나님 주권을 “지나치게 극단적으로” 강조하는 성향을 지니고 있다. 하이퍼 칼빈주의 사상의 핵심은 두 가지로 압축되는데 첫째는 복음에로의 부르심(calling)이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혹은 “자유롭게” 적용되는 것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고(즉 “모든 사람에게”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계획 안에 속해 있는 자들에게만” 복음의 부르심이 적용된다고 주장함 1)), 둘째, 불신자가 복음을 받아들일 때 “믿음”과 “회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거부 한다(즉 복음을 수납할 때 인간의 역할이 필요 없다는 것을 주장함). 결국 하이퍼 칼빈주의는 구원의 영역 속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인간의 역할을 배제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측면에서 17세기 반율법주의의 재판(reprint)적 성격을 갖는다.
하이퍼 칼빈주의의 요체인 “극단적 하나님 주권 중심” 사상이 칭의론에 적용되면 17세기 반율법주의 칭의론보다 더 극단적인 칭의론으로 치닫게 되는데 그 이유는 하이퍼 칼빈주의가 말하는 칭의 사건은 “하나님의 내재적 행위”(God’s immanent act) 속에서 완전하게 “완료”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견 큰 문제가 아니게 보일 수 있다. 왜냐하면 만약 하나님의 내재적 행위를 “신적 작정”(divine decree)으로 이해한다면, 칭의 사건은 영원 전 하나님의 내재적 행위로부터 시작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칭의가 하나님의 내재적 행위에서 “완료”된다는 의미를 자세히 뜯어보면 이는 신학적으로 큰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깨달을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의 작정과 실행에 대한 전통적 틀인 “영원에서의 작정, 그 작정의 시간 속에서의 실행”(decree in eternity & its execution in time)의 원리에 비추어 볼 때 만약 칭의가 하나님의 영원 전 내재적 행위에서 완료된다면, 그 칭의는 시간 속에서의 실행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칭의가 되기 때문이다. 즉 하이퍼 칼빈주의가 말하는 칭의 사건은 인간이 현재 살아가고 있는 “현실태,” 인간의 존재 자체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현 “시간,” 인간의 현 “믿음”과는 하등의 상관없이 단순히 하나님의 내재적 “생각” 속에서 완료되는 뜬 그름과도 같은 신기루에 불과한 사건이 되고 만다.
17세기 반율법주의자들처럼 18세기 하이퍼 칼빈주의자들의 주 논적도 아르미니우스주의였다. 칭의의 영역 속에서 인간의 역할이 꽤 결정적 역할을 담당하는 아르미니우스주의적 칭의론의 뿌리를 초장부터 잘라내기 위해 하이퍼 칼빈주의자들은 반율법주의자들보다 더 극단적으로 칭의를 “하나님의 내재적 생각 안”에 가두어 버렸다. 이로 인해 하나님의 주권은 극단적으로 강조되었지만, 인간의 역할과 책임은 동시에 완전하게 제거되어버렸다. 더 극단적인 불균형적 칭의론이 탄생한 것이다. 존 스켑(John Skepp, d.1721), 조셉 허시(Joseph Hussey, d.1726), 존 브라인(John Brine, 1703-1765) 등을 대표적 하이퍼 칼빈주의자들로 명명할 수 있다.
3. 영원 칭의론
칭의론의 영역 가운데 하나님의 주권을 극단적으로 강조했던 사상들 중 하나가 바로 “영원 칭의론”(eternal justification)이다. 영원 칭의론은 “영원으로부터 칭의”(justification from eternity)라고도 표기한다. 영원 칭의론의 핵심은 인간이 “태어나기도 전” 즉 “영원 전”에 이미 칭의가 완료되었다는 것이다. 일견 하이퍼 칼빈주의 칭의론과 유사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약간의 차이는 존재한다. 하이퍼 칼빈주의 칭의론은 “하나님의 내재적 행위”에서 칭의가 완료되지만 그 내재적 행위를 반드시 “영원”과 연결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하이퍼 칼빈주의 칭의론은 하나님의 “내재적 생각”을 칭의의 완료점으로 상정하여 하나님의 내재적 생각 자체에 더 큰 강조점을 둔다. 반면 영원 칭의론은 칭의의 완료점을 하나님의 내재적 생각보다는 “영원” 그 자체에 두어 영원이 내포하는 의미 자체에 더 큰 방점을 찍고 있다. 즉 “시간 전 영원에서부터” 우리 모두의 칭의는 “이미” 완료되었다는 것이 영원 칭의론의 요체이다.
하지만 순수한 의미로서의 영원 칭의론 즉 영원에서부터 모든 칭의가 완전히 완료되었다는 극단적 입장을 가진 인물은 교회 역사 속에서 오롯이 찾아보기 힘들다. 칭의의 시작점과 완료점을 “영원”에 두고 칭의론을 전개하는 인물들도 시간 속에서의 믿음의 역할 등에 대해서 여전히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원 칭의론은 칭의의 방정식 속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신학적 레토릭으로 자주 쓰여 왔으며 그 성격상 많은 오해와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 또한 양지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반율법주의 칭의론, 하이퍼 칼빈주의 칭의론, 영원 칭의론 등은 인간의 역할/책임보다는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던 칭의론들 이었다. 인간 중심적 칭의론과의(특히 아르미니우스주의 칭의론과의) 치열한 다툼 가운데서 탄생한 이러한 칭의론들이 가지고 있는 신학적 의도의 긍정성은 박수 받아 마땅하다. 칭의는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하시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백번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늘 “인간을 통해” 일하신다는 사실이 무시되거나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 반율법주의, 하이퍼 칼빈주의, 영원 칭의론은 바로 이러한 오류를 범했다. 하나님의 주권 vs. 인간의 역할이라는 거대한 시소게임의 추가 지나치게 혹은 완전하게 한쪽으로 기울어져 불균형적 칭의론들이 양산되었다.
다음 회에서 살펴보겠지만 이러한 시소게임의 추는 그 반작용으로 또다시 다른 쪽 극단으로 치우쳐 기울기 시작한다. 그것이 바로 인간 중심주의적 칭의론의 탄생 배경이다. 하나님의 주권 vs. 인간의 역할이라는 시소게임 속에 나타난 치열한 작용과 반작용의 다툼을 과연 어떻게 균형 있게 조망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내리는 것이 바로 본 연재의 근본 목적이다. 이에 대해서는 연재가 진행되면서 차츰 드러날 것이다). 지나간 교회 역사를 통해 다양한 불균형적 칭의론들을 조망하는 근본적 이유가 바로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라면 지금 하고 있는 작업이 얼마나 적실하며 필요한지 굳이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역사 속에 나타났던 불균형적 칭의론들을 조망함을 통해 현재 나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다. 그것이 이 작업의 존재 이유이고, 그 이유에는 당위성이 한 가득 서려 있다.
1) 개혁신학 구원론은 부르심을 외적(혹은 일반적) 부르심과 효과적 부르심으로 구분해 이해한다. 외적 부르심이란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복음의 부르심을 뜻하고, 효과적 부르심이란 하나님의 작정과 경륜 가운데서 전적으로 값없는 은혜로 구원 받을 자들을 위한 효력 있는, 특별한 복음의 부르심을 뜻한다.
편집자 주: 필자 박재은 박사는 미국 칼빈 신학교에서 조직전공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현재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조직신학을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 『칭의, 균형 있게 이해하기』(부흥과개혁사), 『성화, 균형 있게 이해하기』(부흥과개혁사)가 있다.
박재은 박사 jepark.theopneustos@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