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은 박사의 칭의 바르게 이해하기(6)
들어가는 말
모든 신학 각론들이 그러하듯이 칭의론과 속죄론 또한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를 서로 간에 맺고 있다. 이전 글에서 살펴본 것처럼 만약 칭의를 가능하게끔 만드는 질료적 원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의(義, righteousness)라면(이에 대해서는 5회: “칭의에 있어서 인간의 역할”을 살펴보라) 이 그리스도의 의는 십자가에서 하신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에 그 신학적 근거를 굳건히 두고 있기 때문이다. 즉 그리스도께서 죄인의 속죄를 위해 보혈의 피를 죄인 대신 아낌없이 쏟으셨고, 대속적 죽음을 온전히 감당하심을 통해 죄인들이 응당 받아야 할 죄의 형벌은 탕감되었다(속죄론). 십자가에서 하신 그리스도의 대리적 속죄 사역이 그리스도의 온전한 의가 되었고 이 그리스도의 의가 믿음으로 죄인에게 전가됨으로써 죄인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칭함을 받게 된다(칭의론).
▲ 박재은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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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신학적 내용은 우리가 자주 부르는 찬송가 가사에도 여실 없이 드러나 있다. “변찮는 주님의 사랑과 거룩한 보혈의 공로를 우리 다 찬양을 합시다 주님을 만나볼 때까지 예수는 우리를 깨끗케 하시는 주시니 그의 피 우리를 눈보다 더 희게 하셨네”(270장 1절). 이 가사에 내포된 신학적 의미에 대해 여러 갈래로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죄를 눈보다 더 희게 만들었다면 과연 어느 범위까지의 죄를 깨끗하게 만든 것일까? 그리스도의 피의 능력은 과거에 지은 죄에만 그 영향력을 미치는가? 아니면 현재 짓고 있는 죄까지도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해질 수 있는 것일까? 아니면 미래에 지을 죄까지도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가 흥건히 적셔지는가? 이러한 질문은 다음과 같이 요약 정리할 수 있다: “우리는 의인인가? 아니면 (지금도 죄를 짓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적으로 죄를 지을 것이기 때문에) 여전히 죄인인가?” 이는 “칭의”와 “죄” 사이의 관계성에 대한 문제로 칭의의 본질을 이해함에 있어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이에 대한 바른 답변을 지금부터 찾아보도록 하자.
의로운 동시에 죄인1)
독일의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칭의의 장 한 복판에 서 있는 인간의 정체성을 대단히 역설적인 표현을 사용해 규정하였다. 그것이 바로 “의로운 동시에 죄인”(simul justus et peccator)이라는 표현이다. 과연 한 사람이 의로운 동시에 죄인일 수 있을까? 루터는 이것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루터는 그리스도의 의로 덧입혀진 사람은 더 이상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라고 확고하게 정체성 규정을 했다. 즉 하나님의 시각에서 볼 때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덧입은 자는 “전적으로 의롭다”(totaliter justus)는 것이다. 그러나 죄악 된 인간의 본성적 시각으로 바라볼 때 인간의 근원적 본성은 여전히 후패하며 부패한 “전적인 죄인”(totaliter peccator)이다.2)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되어 의인으로 칭함 받은 자는 이미 “의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죄를 짓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바라볼 때 여전히 죄인이므로 루터는 이를 역설적인 표현인 “의로운 동시에 죄인”이라는 표현으로 신자의 정체성을 규정한 것이다.
▲ 마르틴 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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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 사역을 통해 과연 어떤 죄가 사해진 것일까? 어떤 죄가 사해졌기에 우리는 여전히 죄인이지만 의인으로 칭함을 받고 있을까? 반대로 죄의 어떤 부분이 남아있기에 우리는 의인으로 칭함을 받았지만 여전히 죄인일까? 이러한 질문을 죄의 두 가지 결과와 연결시켜 살펴보도록 하겠다.
죄의 결과: 죄책과 부패(혹은 오염)
죄를 지으면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것이 있는데 바로 “죄책”(罪責, guilt)과 “부패”(腐敗, corruption)이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금은방에 들어가 귀금속을 훔치면 법적으로 절도죄에 해당되어 실정법을 어긴 죄인이 된다. 죄인이 된다는 말은 곧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한 법적 책임(liability)을 져야 한다는 것인데, 이것이 “죄책”이 생긴다는 개념이다. 즉 죄인이 절도죄에 상응하는 형량을 받으면 그는 형량대로 교도소에서 죄의 책임을 지며 살아야 한다. 만약 살인죄를 저질렀으면 그에 대한 책임을 무기징역 혹은 사형으로 져야만 한다. 그 어떤 죄인도 마찬가지이다. 저지른 죄에 대한 법적 책임은 그 죄를 저지른 자가 져야만 한다.
죄책과 더불어 부패(혹은 오염) 또한 죄인에게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결과이다. 성경은 죄의 결과의 한 측면인 부패의 특성에 대해 다각도로 설명하고 있다. “총명이 어두워진” 상태, “무지한” 상태, “마음이 굳어진” 상태(이상 엡 4:18), “더러운 것”을 내는 상태(욥 14:4), “거짓 된” 상태(렘 17:9), “가시와 엉겅퀴를 맺는” 상태(마 7:16), “감각 없는” 상태, “방탕”한 상태,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는” 상태(이상 엡 4:19) 등이 바로 그것들이다. 이처럼 죄인은 그 마음이 부패하고 후패하여져서 영적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만들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죄의 결과인 부패하고도 오염 된 상태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은 우리가 받아야 할 “죄책의 형벌”을 무죄한 그리스도께서 대신 받아 대리적 속죄를 이룬 사역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라는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죄인인 우리가 져야만 하는 “죄책”을 완전하게 해결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더 이상 죄책을 묻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그리스도가 감당하신 죄책은 단순히 과거의 죄책이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에 지을 죄의 모든 죄책까지를 다 포함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을 때(즉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책을 다 짊어지고 죽으셨다는 사실을 믿을 때) 비로소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됨으로써 우리는 법적으로 더 이상 죄인이 아니라 의인으로 신분적 칭함을 받게 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서는 더 이상 법적인 죄의 책임을 물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를 위에서 살펴본 루터의 논의에 비추어 설명하면,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완전하게 의롭다”고 칭하시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책”을 다 해결해주셨기 때문이다. 죄에 대한 책임이 없는 자는 법적으로 더 이상 죄인이 아니다. 완전한 “의인”인 것이다.
그러나 루터는 “의로운 동시에 죄인”이라는 역설적 레토릭을 구사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죄인은 죄책의 측면으로서가 아닌 “부패의 측면으로서의 죄인”이라는 사실을 염두 해야 한다. 즉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으로 인해 우리의 죄책은 남김없이 깨끗하게 되었지만 죄의 또 다른 결과인 부패와 오염은 여전히(사실 아주 지독하게) 남아있으므로 우리는 의로운 동시에 여전히 죄인이다.
실천적 고려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통해 과거, 현재, 미래의 “죄책”은 남김없이 사라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의 “부패성”과 “오염성”이 남아있다는 가르침은 칭의론을 공부하는 우리에게 있어 매우 소중하다. 왜냐하면 이러한 가르침은 한번 예수 믿으면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해지므로 더 이상 회개 기도할 필요도, 성화의 삶을 살 필요도 없다는 식의 반(反)율법주의적 가르침이 서 있을 공간 자체를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의 죄책은 남김없이 해결되었지만(칭의의 영역)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의 지독한 결과인 “부패”는 여전히 남아 있으므로 우리는 이 잔존하는 부패를 깨끗케 만들기 위해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회개와 성화의 열매를 부지런히 맺어야 한다(성화의 영역). 죄의 결과를 죄책과 부패(오염)로 상정하여 이를 각각 칭의와 성화라는 신학적 관점 속에서 이해하는 관점은 칭의가 완료되었기에 성화는 필요 없다는 식(즉 죄책이 없어졌으므로 부패 또한 사라졌다는 식)의 불균형적 칭의–성화 이해에 경종을 울릴수 있다. 그러므로 존 칼빈(John Calvin, 1509-1564)은 칭의와 성화 사이의 관계를 “불가분” 관계로 보았다. 칭의가 없으면 성화도 없고, 성화가 없으면 칭의 또한 없다. 즉 칼빈은 칭의와 성화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이중 은혜”(duplex gratia)라고 생각했다.3) 칼빈의 주장은 옳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의 죄책은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를 통해 단 한순간에 해결되었지만(칭의의 단회성), 여전히 부패와 오염은 남아 있으므로 늘 성령 하나님과의 동행 가운데 “자기 두루마기”를 성실히 빨아야 한다(계 22:14, 성화의 점진성).
나가는 말
예수를 믿기만 하면 과거, 현재, 미래의 죄책이 다 사해진다는 소식이야말로 복된 소식 즉 “복음” 그 자체이다! 그러나 이 복된 소식이 “방종주의”(과거, 현재, 미래의 죄책이 다 사라졌으므로 죄를 막 짓고 살아도 이미 없어진 죄책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논리), “실용주의”(죽기 전까지 열심히 죄를 짓고 살다가 죽기 직전 예수 한번 믿고 모든 죄책을 사함 받겠다는 논리), “값싼 은혜주의”(복음의 유익을 받아 누릴 줄만 알고 예수를 믿고 섬김에 있어 어떠한 대가도 치룰 마음이 없는 논리)로 발전되어 “다른 복음”(갈 1:9)으로 변질되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다. 죄의 결과는 죄책과 부패요 그것이 곧 사망이다(롬 6:23). 십자가의 은혜로 죄책이 해결되어 영원 사망이 아닌 영생 복락을 얻어 누리는 자라면, 늘 자신을 되돌아보고 죄의 부패와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한다(히 12:4). 칭의의 은혜를 누린 사람이라도 늘 자신의 정체성을 되돌아보고 참된 반성과 더불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지속적으로 묵상해야 한다. 우리는 죄책으로서는 의인이라는 땅을 밟고 서 있지만, 부패로서는 여전히 죄인이라는 땅을 밟고 서 있는 역설적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1) 이에 대한 구체적 논의는 박재은, 『성화, 균형 있게 이해하기: 하나님의 주권 대 인간의 역할, 그 사이에서 바라본 성화』(서울: 부흥과개혁사, 2017), 47-63을 참고하라.
2) Luther, WA, 56:271.
3) Calvin, Institutes, 3.16.1.
편집자 주: 필자 박재은 박사는 미국 칼빈 신학교에서 조직전공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현재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조직신학을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 『칭의, 균형 있게 이해하기』(부흥과개혁사), 『성화, 균형 있게 이해하기』(부흥과개혁사)가 있다.
박재은 박사 jepark.theopneustos@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