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조덕영 박사의 사도 바울의 창조 신학 글을 4회에 거쳐 연재합니다. 조덕영 박사는 조신학연구소 소장, 창조론 오픈 포럼 공동대표, 평택대 신학부 겸임교수로 사역하고 있다.
4. 인간의 의식주 문제(고린도전서 8장을 중심으로)
사도 바울이 인간의 의식주 문제에 대해 심각한 의미를 부여한 적은 없다.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을 빼곤 무엇이든지 자신에게 유익하던 것을 그리스도를 위해 모두 해로 여길 뿐 아니라 모든 것을 해로 여기고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처럼 여겼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았다(빌4:12). 하지만 모든 세상은 그리스도의 세상이요 모든 창조 세상은 그리스도가 지으시고 운행하시는 섭리의 땅이다.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케 하는 일이 바울의 사역 속에 기다리고 있었다.
▲조덕영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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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 가장 첨예한 문제는 매일 닥치는 섭생에 관한 것이었다. 모세 율법은 다양한 음식 규례를 다루지 않던가. 고린도 지역에서 이 문제가 정면으로 발생한다. 바울은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였을까? 헬라의 고린도지역은 우상과 잡신과 음란이 넘쳐나는 도시였다. 시장에 출하되는 육류들 대부분은 온갖 잡신들을 향한 음란한 제사 속에서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들이었다. 고린도 교인들은 이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들을 먹어도 되는 것인지 바울에게 질문하였다. 이 문제는 초대교회 심각한 이슈이기도 했다(행15장, 롬14-15장). 고린도전서 8장 본문을 통해 이 우상에 바쳐진 제사 음식과 먹거리 전반에 대한 관점을 살펴보자.
(1) 첫째 우상(idol)은 아무 것도 아니다(고전8: 1-7절).
당시 고린도 사람들은 우상에 대해 약간의 지식들이 있었다. 그걸 가지고 서로 고기를 먹어도 되느니 먹으면 안 되느니 논쟁을 벌였다. 여기에 대해 바울은 다음의 다섯 가지를 지적한다. 1) 지식(여기서 지식은 남보다 별난 신비적 지식 즉 영지주의적 지식을 말함)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든다. 2) 지식보다 덕을 세우는 것이 사랑이다. 3) 지식이 있다고 생각(자랑)하는 자들은 실은 당연히 알만한 것도 잘 모르는 자들이다. 4) 참된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것과 관련된다. 5) 따라서 하나님이 알아주는(인정하는) 사람이 참 지식을 가진 사람이다.
이 같은 관점에서 볼 때 우상은 사람이 만든 것으로 인간의 길흉화복, 흥망성쇠, 생사를 주관하지 못한다. 따라서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대단하게 여길 필요도, 겁낼 필요도, 거리낄 필요도 없다. 제사 음식이든 우상에게 바쳐졌던 음식이든 먹든 안 먹든 아무런 문제가 없다. 우리는 창조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아닌가(6절). 우상에 바쳐진 고기를 먹느냐 안 먹느냐의 문제는 사실 믿는 이의 논쟁거리가 아닌 것이다. 오히려 반대로 이방인들이나 따질 문제이다. 속되고 부정 탄다고 여기는 사람에게나 두려움을 줄 뿐이다.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롬 14:14).
(2) 둘째 식물은 우리를 세우지 못 한다: 먹거리의 유익은 아주 작은 유익에 불과할 뿐이다(8절).
이것을 일반 은총이라 한다. 즉 믿지 않는 이들도 누릴 수 있는 자연 은총이다. 물론 인간에게 바른 먹거리의 유익은 분명 있다(단 10장). 평범하게 먹든 잘 먹든 작은 유익일 뿐이요 영생을 믿는 신앙의 눈으로 본다면 다만 약간의 유익(수명 연장, 육체적 건강)이 있을 뿐이다. 건강하게 살아도 결국 인간은 언젠가 죽게 마련이다(시90:10). 세우지 못 한다는 말은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말이다.
본질상, 잘 먹는 유럽 사람들이나 가난한 아프리카 사람들이나 우상 식물을 먹는 자들이나 먹지 않는 자들이나 식물은 우리의 영적 삶을 세우는 일과 별 관련이 없다. 음식은 선하지만, 거룩과 무관하다. 음식을 먹지 않는다고 해서 더 경건해지는 것은 아니다. 바리새인들은 정결법과 안식일 규정을 철저히 준수했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정결하지도, 안식을 누리지도 못했다. 경건에 이르는 길을 사도 바울은 말씀과 기도, 야고보는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고 자신을 지키는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들은 그 자체로 속된 것은 없다. 다만, 부정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만 부정할 뿐이다.
(3)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자유함이 믿음 약한 자를 넘어지게 만드는 장애물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하고 절제하라(9-12절).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요 우리를 세우는 것도 아니므로 먹든지 안 먹든지 별 문제는 없다. 하지만 자유 하더라도 절제할 필요가 있다. 믿음 약한 사람들은 사소한 것에도 믿음이 혼란을 겪기 마련이다. 형제에게 죄를 지으면 안 되고 형제의 양심을 상하게 해서도 안 된다. 그런 것들은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과 다르지 않다. 약한 자를 실족케 함은 아주 큰 죄이다(마18:6). 자유하다고 목사가 거리낌 없이 아무 것이나 함부로 먹는 것을 보고 초신자들이 멋대로 따라하면 교회는 질서가 무너지며 혼란이 발생한다. 사실 목사들이나 교회 지도자들은 무엇이든 먹어도 문제없다고 보양식조차 함부로 거리낌 없이 즐기는 경우가 있으나 때론 조심해야 한다. 필자는 애완동물을 아주 사랑하는(?) 어느 기독언론 기자가 사철탕 등 보양식 즐기는 교회지도자들을 비분강개(悲憤慷慨)하며 강하게 비판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4) 사도 바울의 개인적 처방은 신앙 지식보다 앞선 복음을 위한 배려와 사랑이다(13절).
먹어도 아무 상관없는 이 우상 제물 문제에 대해 사도 바울은 어떤 개인적 처방을 하고 있을까? 바울은 무엇을 먹어도 아무 상관이 없음을 잘 알고 있었으나 복음을 위해 기꺼이 절제한다. 복음만 전해진다면 고기 한 점 덜 먹는 것이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이것이 올바른 지식을 바탕으로 남을 배려하는 사랑으로 나아가는 복음의 대선배 사도 바울의 결단이었다.
필자는 과거 부산에 집회를 갔다가 하루 세끼를 모두 회만 먹은 적이 있다. 집회 장소와 대접해주시는 분들이 모두 다르다보니 생긴 불상사(?)였다. 내륙 지방 출신 사람이라 회를 그다지 먹을 기회가 많지 않았던 내게는 아주 큰 고역(苦役)이었다. 사도 바울이 볼 때 이웃을 배려하는 것이 사랑의 마음이었지만(1-3절) 대접해주시는 분들의 준비된 사랑을 생각해서 거부 하지 못하고 필자는 하루 종일 회를 꾸역꾸역 열심히 먹었다. 사도 바울의 개인적 처방은 신학적 지식과 처방보다 사랑이 먼저였다. 사도 바울은 먹어도 상관없는 우상에 바쳐진 제물을 형제들을 위한 배려로 평생 먹지 않겠다고 고백한다. 과연 그리스도인들이 강아지를 친자식처럼 여기는 형제들을 위해 사철탕 먹기를 금할 수 있을까? 이것이 범인(凡人)들은 흉내 내기 어려운 사도 바울의 결단이었다.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은 먹지 말라고 할 터이나 음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딤전4:1-3).
Ⅳ. 사도 바울의 새 창조 신앙
바울의 창조 신앙은 단순한 창조 신앙에 머물지 않는다. 창조주요 구속의 주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준비한다. 즉 성경의 창조 신앙은 궁극적으로 새 창조(구원 창조) 신앙으로 발전한다. 바울은 이 새 창조를 주로 강림(파루시아)과 부활이라는 말로 표현한다(살전4:16, 17). 게할더스 보스는 이 강림과 부활에 대해 첫 번째 부활은 그리스도가 강림하실 때 일어나고, 두 번째 부활은 그리스도가 그의 나라를 바치실 때 일어난다고 보았다. 부활의 시기와 빈도에 대해서는 신학적 관점들이 다양하게 존재한다. 본고는 이 부분을 지면의 제약 상 다루지 않는다. 다만 필자가 주목하는 바울의 새 창조 사상은 이 강림과 부활 속에 사도 바울이 사람뿐 아니라 모든 피조물들이 허무함의 종살이의 고통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기 위해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 중에 있다고 한 말이다(롬8:18-22).
기독교는 결코 동물을 무시하거나 동물에게 무례한 종교가 아니다. 인간은 피조물의 주인도 아니다. 청지기일 뿐이다. 바울은 동물 역시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이요 언약의 약속 안에 있는 존재임을 암시한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뿐 아니라 수많은 가축이 있는 니느웨 성을 불쌍히 여기셨다(욘4:11). 창조는 종말론적 구원을 지향한다. 태초에 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에 모든 피조물을 위한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실 것이며(사65:17, 계21:1), 아담의 죄로 인해 파괴된 인간과 동물 간에도 평화가 다시 회복될 것이다(사65:25). 그 때까지 인간은 다스림의 위치에서 소명을 감당해야 한다. 이 다스림은 군림이 아니다.
인도의 신학자요 생태학자인 켄 그나나칸(Ken Gnanakan)은 이 ‘다스림’ 안에는 사랑, 상호 연결, 지속 가능한 창조성, 다른 이들을 위한 배려, 종으로서의 섬김, 청지기, 하나님의 창조물에 대한 존경심, 정의라는 여덟 가지 요소가 들어있다고 했다. 마치 예수께서 죄 짐 맡은 우리 구주요 좋은 친구였던 것처럼 인간은 당연히 동물들과 사랑 안에서 함께해야 하는 것이다. 바울은 창조주 하나님의 새 창조 속에 이 같은 하나님 사랑의 본질이 담겨 있음을 시사한 것이다(계속).
조덕영 박사 bareunmedia@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