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본 연재는 북 이스라엘과 남유다의 멸망부터 A.D. 70년 예루살렘 함락에 이르기까지 주요 왕조의 발흥과 쇠퇴를 중심으로 진행할 예정입니다.
안티오쿠스 4세(이하 안티오쿠스)의 박해와 헬라화 정책은 유대인들과의 갈등의 골만 깊게 만들뿐이었다. 존 브라이트는 안티오쿠스가 강압적인 헬라화 정책과 박해로 유대인들을 굴복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착각이라고 지적한다.1)
“왕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안티오쿠스의 헬라화 정책에 대한 반란은 한 제사장의 결단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안티오쿠스는 예루살렘과 욥바 사이에 위치한 모딘 이라는 지역에 자신의 신하를 보내어 이방신에게 제사를 지내라는 명령을 내렸다. 모딘 지역의 제사장이었던 하스몬 가문의 마타디아는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율법과 규례를 깨트리는 일을 금하고 계신다. 우리는 좌로나 우로 치우쳐 우리가 드릴 경배를 버리라는 왕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2)라며 왕의 명령을 단호히 거절한다. 한 유대인이 마타디아를 대신해 이방신에게 제사를 드리러 제단으로 나오자 마타디아는 그를 죽이고 추종자들과 함께 안티오쿠스의 보복을 피해 산으로 숨었다.
마타디아와 추종자들은 안티오쿠스의 군대를 상대로 게릴라전을 펼치며 결사 항전을 벌였다. 레이몬드 설버그는 “그들은 숨어 있던 산에서 갑자기 뛰어나와 인근의 작은 도시와 마을들을 급습하여 우상과 이방의 제단을 훼파하고 변절한 유대인들에게 강제로 할례를 행하였으며 회당을 재건하곤 하였다”3)라고 전한다.
마타디아는 약 1년간 항전을 이끌다 사망했고, 그의 다섯 아들 중 셋째아들인 유다를 후계자로 삼았다. 이 유다가 후대에는 마카비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졌는데, 마카비는 망치질하는 자(혹은 쇠망치)라는 뜻으로 유다의 별명이었다.
마카비의 연전연승과 성전정화
마카비는 반란군을 효과적으로 이끌었다. 게릴라 항전은 이들에게 계속된 승전보를 가져다 주었다. 특히 사마리아 땅의 지도자인 아폴로니우스와 수리아의 지도자 세론을 차례로 격파한 사건은 유대인들의 사기를 크게 진작시키며 하시딤들과의 연합세력을 구축할 수 있게 되었다. 마침 안티오쿠스는 또 다른 전쟁을 위해 원정을 가있던 터라 주력 병력을 마카비와의 전쟁에 투입시킬 수 없었다. 두 차례의 참패 소식을 들은 안티오쿠스는 리시아스에게 마카비의 반란군을 진압할 것을 명령했다.
리시아스는 그의 부하인 니카놀과 게올기아스를 지휘관으로 삼고 보병 4만 6000명, 기병 7천 명을 이끌고 전쟁에 뛰어들었다. 그들 옆에는 반란군을 진압한 다음 노예로 팔겠다는 노예상인들도 동행했다.
전쟁은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게릴라전에 능한 마카비의 승리로 끝났다. 마카비는 3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니카놀의 부대를 급습해 큰 피해를 입히는 동시에 노예상인들을 잡아 오히려 노예로 팔아버렸다.
또다시 혼란 속으로
니카놀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마카비는 그 길로 예루살렘으로 진격했다. B.C. 164년 기슬르월(유대력 9월, 그레고리력 11-12월) 25일, 마침내 마카비 군대는 예루살렘 성전을 회복하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이날을 수전절(요10:22)혹은 하누카라고 부른다. 이들은 성전 모독을 끝낸 기념을 3년간 이어갔다.
평화도 잠시. 예루살렘을 둘러싼 거센 공격이 다시 시작되었다. 리시아스는 다시 한 번 마카비 군대와 전투를 벌였고 이 전쟁에서 마카비의 형제인 엘르아살이 사망하고 만다, 리사아스는 예루살렘을 포위해 마카비의 항복을 받아내려 했지만 때마침 상황이 복잡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리시아스는 안티오쿠스가 전쟁 중에 사망했고 후계자로 필립 장군을 임명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정복보다 권력이 먼저였던 리시아스는 유대인들에게 율법에 따라 하나님을 경배하는 권리를 보장하는 협정서를 내밀고 급히 회군했다.
리시아스의 화해 정책을 두고 하시딤은 이를 반색했지만 마카비의 입장은 달랐다. 결국 다수의 하시딤에 의해 화해 조약이 체결되었고 그로 인해 하시딤과 마카비 가문은 각자의 길을 걷게 된다. 하시딤의 선택은 자신들과 마키비 가문 둘 모두에게 좋지 않은 결과로 이어졌다.
안티오쿠스의 후계자로 로마에 볼모로 잡혀있던 데메트리오스 1세가 돌아와 세워졌다. 그는 리시아스를 죽이고 예루살렘의 대제사장으로 알키무스를 세웠다. 알키무스는 예루살렘에서 60여 명의 하시딤을 죽였다. 이 일로 하시딤과 마카비 가문은 다시 뭉쳤다. 이들은 알키무스가 원군으로 요청한 시리아 군과의 전투에서는 승리했지만, 데메트리우스 1세가 예루살렘으로 보낸 군대와의 전투에서까지 승리할 힘은 없었다. 마카비는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1) 존 브라이트, 『이스라엘의 역사』(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3), 584.
2) 레이몬드 설버그, 『신구약 중간사』(기독교문서선교회, 2004), 46.
3) 같은 책, 47.
조믿음 기자 bareunmedia@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