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들어가면서
기독교는 성경을 통해 계시하는 하나님의 창조와 그 창조 신앙을 근본으로 하는 종교다. 창조는 일종의 초월(超越)이다. 그런데 성경의 하나님은 이 세상 너머 초월자인 동시에 이 세상에 존재하는 내재자(內在者)로 자신을 계시한다. 그렇기 때문에 초월은 내재를 사는 사람들에게는 늘 신비한 영역이다. 사실 성경의 저자들은 계시의 전달자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어떤 식으로든 모두 초월적 신비를 경험한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성경 저자뿐 아니라 초월의 신비한 영역에 대한 일반인들의 생각은 사람들에게 초월의 존재와 조우(遭遇)하기 위한 신비한 체험을 꿈꾸고 추구하게 만들곤 한다.
▲조덕영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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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파생된 것이 신비주의와 신비주의 신학이다. 이들 용어는 단순하게 중세 시대처럼 하나님에 대한 개인적 경험과 그 경험에 대한 반성을 의미할 수 있다. 즉 넓은 의미에서 종교체험 같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중세의 모든 신학자들은 자신이 이미 경험한 바를 기록했다는 면에서 신비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신학이 신비주의나 신비주의 신학에 대해 부정적 기류나 관점을 유지하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그것은 신비주의 속에는 유사(類似) 초월의 기록들이 혼합될 가능성이 늘 잠재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듯 신비주의는 초월을 믿는 사람들에게 동경(憧憬)의 부분이면서도 기독교적으로는 늘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왜냐하면 성경 밖에서도 미상(未詳)의 초월자와의 누미노제(numinose)한 체험은 늘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슬람 창시자 무함마드의 초월 체험은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이것이 늘 정통기독교가 신비주의를 경계하는 이유이다.
문제는 그런 유사 초월적 신비주의의 진위와 옳고 그름을 구별하기 쉽지 않다는데 있다. 그렇다면 오해와 편견이 아닌 건전한 성경적 신비와 유사 신비를 구분할 수 있는 잣대는 없을까? 본 논고는 그런 호기심과 고민 속에서 출발하고 있다. 이를 위해 먼저 기독교 신비주의의 역사를 간략하게 개관해 보고 오늘날 기독교 안에서 범람하고 있는 신비주의적 현상과 요소들을 어떻게 분별하고 정리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인지, 특별히 성경적 창조 신앙에서 그 기본틀을 만드는 기초 작업이 되기를 기대한다.
II. 성경의 신비와 종교로서의 신비주의
성경에 신비라는 단어는 주로 “뮈스테리온”(비밀, “musterion”)으로 표현된다. 신약 공인 본문(Received Text)에 27회 나오는 이 단어는 주로 바울 서신(20회)에서 인간을 향한 창조주 하나님의 구속사역의 계획과 측면들을 언급하는 단어이다. 즉 성경에서 “신비”란 곧 그리스도 계시와 관련된 비밀이다. 창조주 하나님의 모든 초월적 신비는 그 양상이 어떻게 전개되든 그리스도의 사역과 구원사와 연관된다.
칠십인 역(Septuagint)에서 “뮈스테리온”이 하나님의 감추어진 뜻(시 24:14)이나 숨겨져 있는 (군사적) 전략(외경 유딧서 2:2)으로 나타나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를 향한 계시의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렇게 볼 때 기독교의 신비란 그리스도의 사역과 구원의 비밀과 관련된 신비가 성경적 신비의 영역이라 할 것이요 이를 벗어난 신비는 유사 신비에 속하는 악마적 영성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기독교의 신비가 주로 그리스도와 관련된 비밀을 말하는 데 반해 영어의 “미스티시즘”(mysticism) 등 신비주의라고 번역되는 서구 근대어는 어원적으로는 (눈 또는 입을) 닫는 다는 의미의 그리스어 “myein”에서 유래한다. 따라서 신비주의는 물질적인 세계로 초월한 통상의 표현이 허용되지 않는 영의 세계를 중심한 철학, 교리, 가르침이나 신념이나 경험을 시사하는 것으로 신, 최고 실재, 우주의 궁극적 근거 등으로 생각되는 “절대자”를 인간이 자기의 내면에서 하나님 임재의 직접적이며 친숙한 의식을 통해 체험하려는 입장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절대자는 물론 기독교의 창조주 하나님과는 조금 다른 개념이다. 성경의 창조주 하나님이 초월자인 동시에 내재의 세상에도 관심을 가진 인격적 존재로서 인간과 끝없이 다양한 방식으로 소통하면서 일관된 창조–타락–구속의 계시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하는 반면 일반 종교로서의 절대자는 자신의 인격과 세상을 향한 절대자로서의 일관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또한 인격성을 보이기도 하고 인격성을 숨기기도 하는 “절대자” 앞에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든 신비 체험을 경험하려고 몰입하였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신비적 합일(uniomystica)이라는 방식의 합일체험이라고 한다. 그것은 인간을 초월한 절대자와의 합일, 통상의 자기와는 절대적으로 다른 것과의 합일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자기로부터의 탈각(脫却), 자기라는 틀의 돌파를 통해서만 현성(現成)하려고 한다.
그런데 이들 합일은 기독교적 신비와 조금 다름을 알 수 있다. 즉 기독교의 신비가 인격적 존재인 인간이 인격적 그리스도와 관련된 체험을 말하는 반면 이들 합일은 탈자(脫自)의 형태로 엑스터시(탈아, 망아)를 통해 개인 체험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 “절대자”라는 것이 세계와의 합일이면 범신론의 형태가 되고 만물의 신비 속에서 체험 되면 만유내재신론의 형태가 되기도 하고 애니미즘이나 미신이나 유사종교의 형태 속에서 체험되기도 한다.
이 같은 신비주의는 기독교의 그리스도 계시로서의 신비가 아닌 말 그대로 주관적, 개인적 신비체험을 이루게 된다. 즉 기독교의 신비주의가 전지전능한 창조주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 말씀에 기초한 반면 세속 신비주의는 주관적 체험이 주를 이룬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결국 성경 이외의 또 다른 특별 계시를 믿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따라서 기독교적 신비 체험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성경의 테두리를 벗어난다면 기독교를 이탈한 주관적 체험이라고 평가해야 하는 것이다. 본 논고에서는 성경적 창조 신앙의 관점에서 바로 이 같은 신비주의적 요소들을 평가하는 작업을 수행한다.
III. 기독교 신비주의의 역사
1. 신플라톤주의적 합일
시카고대의 버나드 맥긴은 서방 기독교 신비주의 역사를 다루면서 서방 기독교의 신비주의가 3, 4세기 시작되어 12세기까지 꽃을 피웠다고 보며 13-16세기를 신비주의의 개화기로 이때 신비주의의 고전적 학파들이 생겨났다고 보았다. 그리고 17세기부터 현재까지를 기독교 신비주의의 위기로 보고 있다. 이렇게 생각보다 신비주의는 그 역사와 뿌리가 깊다고 볼 수 있다. 이 역사 속에서 성 어거스틴(354-430)을 비롯하여 다양한 인물들이 신비주의 속에 관여한다.
맥긴이 3세기를 기독교 신비주의의 시작점으로 삼은 것은 아마 “수도자들의 아버지”인 사막 교부 안토니와 신플라톤주의의 원조 암모니우스 사카스(Ammonius Saccus, 175-250)의 두 제자였던 플라톤 철학의 종교적 해석의 달인 알렉산드리아의 신학자 오리겐(Origen, 185-254)과 신플라톤학파의 실제적 창시자 비기독철학자 플로티노스(Plotinus, 205?-270)를 염두에 둔 것임을 예측할 수 있다. 안토니가 실제적 신비 체험자였다면 신플라톤주의자들은 관념적 신비주의자였다.
신플라톤주의자들에게 물질은 정신의 산물이며 현상은 본질적으로 정신적인 것이었다. 여기서 합일(合一)에 대한 신비적 열망이 나타난다. 플로티노스는 감각적 세계와 초감각적 세계 사이의 합일, 즉 인간의 혼은 탈자(脫自)를 통한 절대적 일자(一者)와의 합일을 이룬다고 본 것이다. 이 같은 합일의 갈망은 과학기술시대인 오늘날에도 여전히 신비주의의 근간을 이룬다. 초월자이신 신과 합일을 이룬다는 개념은 결코 간단한 것이 아니다. 이 같은 신비주의 속에는 전지전능하신 인격자이신 성경의 창조주 하나님과 플라톤적인 선의 이데아(Idea),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만유의 목적인 누스(Nous)의 개념이 혼재해 있다고 보아야 한다.
2. 부정신학
오늘날 기독교 신비체험가들과 신비주의자들도 이런 기독교의 하나님과 철학적 하나님을 혼동하는 체험(즉 주관적, 개인적 일종의 합일의 체험)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일찍이 이 같은 혼돈을 간파한 신학자가 있었다.
유대교의 알렉산드리아 신학자 필로(Philo, 주전 20-주후 50년 경)는 신은 인간 오성(understanding) 너머에 지고지순한 분이기에 무한하고 이해 불가능하며 형언할 수 없는 존재이다. 따라서 유한한 인간이 신과 합일을 이룬다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필로가 스토아 철학의 로고스 개념을 초월적 하나님과 물질세계 사이의 중재 요소로 본 것과 더불어 신에 대해 인간이 단정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신은 이러이러한 분은 아니다’는 식의 서술만이 가능하다고 본 것은 분명 신학에 일정한 공헌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부정철학에서 파생한 부정신학(negative theology)이다. 당시 알렉산드리아 출신들이 그러하듯 구약성경의 알레고리적 해석에 관심이 많던 그는 헬라 철학을 히브리적 세계관으로 종합하는 과정에서 이 같은 부정신학의 실마리 찾은 것이다.
인간의 사고 범주로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이므로 긍정(kataphasis)에 대조되는 부정(apophasis)의 방식으로 신을 이해하려한 이 같은 방식은 6세기 아레오바고의 관원 디오니시우스(행 17:34, 僞디오니시우스)의 이름으로 저서를 유포시킨 익명의 철학자를 통해 훗날 동방정교회의 수도원 전승을 통해 정교하게 다듬어졌다. 위(僞)디오니시우스에 의하면 창조주 하나님은 일체의 규정을 초월해서 선(善)이라고도 존재라고도 할 수 없다.
신은 초선, 초존재로 일체의 형용과 규정을 부정하는 것만이 신에 대한 이해의 길이다. 신을 아는 자는 “무지(無知)의 지”이어야 한다. 이 모든 부정의 길 또는 부정신학은 이후 오랫동안 신비신학의 방법론 중 하나가 되었다. 이 익명의 저술가인 위디오니시우스는 아빌라의 테레사와 더불어 “신비 신학”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낸 것으로도 유명하다. 1520년 마르틴 루터가 자신의 유명한 책 『교회의 바벨론 유수』에서 이 익명의 위디오니시우스를 유해한 인물이라고 본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3. 중세 신비주의
중세의 스콜라신학에서도 마지막 교부로 불려진 클레르보의 베르나르(1090-1153), 아시시의 프란체스코와 그의 제자이자 전기 작가인 보나벤투라 등 많은 교부 신비주의자가 나왔고 토마스 아퀴나스에게까지 이어진다.
이들이 신비주의 속에서 발견한 것은 주로 사랑이신 하나님과의 합일이었다. 13세기 말, 14세기 초에는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 1260년 경-1327)를 중심으로 하는 독일신비주의 운동이 일어나고, 근세 초기에 이르기까지 큰 직접적 영향을 미쳤다. 이들 중세 신비주의자들이 하나님의 본성에서 사랑을 가장 중심의 영성의 길로 보았다는 것은 신비주의가 영혼의 내적 생활 중심으로 궤도를 이동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랑의 합일이 곧 영혼과 로고스 사이의 영적 결합으로 가는 길이었다.
이 같은 영적 합일의 길은 에크하르트에게서 좀 더 신의 본질에까지 접근하려는 경향을 가진다. 하지만 내재의 인간이 초월의 하나님을 찾아 만나는 길은 그리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인격적 만남의 길이 어두워질 때 하나님은 인격적인 신으로부터 신성으로 바뀌게 점점 더 초월자와의 만남은 안개 속으로 모습을 감추게 된다. 그러한 몸부림은 『그리스도를 본받아』로 국내에 많이 알려진 토마스 아 캠퍼스(Thomas a Kempis, 1380-1471)의 저작들에까지 이어진다,
16세기가 되면서 종교개혁에 반응한 카톨릭 개혁운동으로서 아빌라의 테레사(Teresa of Avila, 1515-82)나 십자가의 요한 등 스페인 신비주의에서 절정을 이룬다:
“나는 이제 묘사하고자 하는 것을 때로는 초보적인 형태로, 그리고 배우 순간적으로 경험하곤 했다. 그리스도에 대해 묘사할 때, 심지어 그리스도에 대한 글을 읽을 때, 나는 예기치 않게 하나님이 임재 의식을 경험하곤 했다. 나는 그리스도가 내 안에 있었다는 것, 혹은 내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심연으로 빠져 들어갔다는 것을 결코 의심할 수 없었다. 이것은 결코 환상이 아니었다. 나는 이것을 신비 신학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순한 신비주의를 넘어 테레사는 신비주의가 신학의 영역이라고 본 것이다. 이렇게 이들 중세 신비주의자들은 합일만 추구한 것은 아니었다.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합일을 갈망하면서 믿음과 참회와 십자가 고난에의 참여를 통한 거룩을 향함이 분명 있었다. 그 후 신비주의는 프로테스탄트의 정통주의에 대응하여 17세기 말부터 18세기에 걸친 경건주의 운동 속에도 나타났다. 이 운동은 종교의 본질을 직관(anschauung)과 절대의존감정에서 찾으려 했던 슐라이어마허에 까지 이어진다. 이들 신비주의자들이 사용한 신비 체험의 술어들은 주로 연합(union), 관상(contemplation), 하나님의 환상(vision of Gom), 신성화(deification), 영성 속 말씀의 탄생(birth of the Word in the soul), 엑스터시(ecstasy), 의식(consciousness), 임재(presense) 같은 단어로 나타났다. 참된 신의 현현(theophania theou)을 체험하기 위한 신비주의자들의 열정과 달리 이렇게 신비주의는 복음과 성경 밖 초월의 경계선 상에서 늘 위태로운 영성 체험을 추구하였다.
4. 성경 속 신비
성경 속 예수와 바울을 신비주의의 영역 속에서 설명하려는 시도가 있다. 예수의 사역은 기적의 연속이었다. 특별히 예수 공생애 이적에 나타난 계시는 예수가 먼저 자신을 창조주 하나님으로 계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수는 스스로 ‘내가 창조주이다“라는 식의 공표를 한 적은 없으나 스스로 신성을 가진 존재임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표적의 책인 요한복음에서 사용된 17번의 ‘표적’이라는 단어 중 11번은 예수의 기적과 관련되어 있다. 예수 공생애 첫 사역의 갈릴리 가나 혼인 자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꾼 이적은 단순한 기적이 아니었다. 그것은 창조의 기적이었다. 오늘날 과학 기술의 관점에서 ”자연은 영원히 과학에 순종“해야 한다. 그게 과학의 기본 원리이고 과학자들의 암묵적 합의이다. 자연이 인과(因果)의 법칙 안에서 과학에 순종하지 않을 때 모든 과학은 그 실험과 법칙의 규율을 상실해버리기 때문이다.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것은 오늘날 생화학이라는 학문의 영역에서는 있을 수 없는 초월의 사건이다.
이 공생애 최초의 이적인 요한복음 2장의 사건은 예수를 삼위의 제 2위 이신 창조주 하나님으로 인식하게 만든 기독교 신학의 핵심이다. 즉 이것이 기독론의 중심이다. 초대 교부 이레네우스가 그리스도와 성령을 말씀과 하나님의 영 즉 우주를 창조하는 하나님의 두 손이라고 표현한 것도 창조가 삼위일체의 사역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일부 신비주의자들이 이 창조주 하나님의 고유한 창조 사역을 자신의 주관적 체험 속에 끌어오는 경우가 있다. 비록 주관적 체험이라 그 진위를 평가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나 성경 속 신앙과 신학의 고유한 전승을 무너뜨리는 위험한 체험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공생에 기적을 창조 사역으로 시작한 것은 단순히 자신을 창조주로 계시하시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오직 창조주만이 영원히 무너진 이 인간과 피조 세계를 회복시킬 수 있다. 오직 전지전능한 초월자만이 내재의 세상을 회복시킬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의 창조는 철저히 창조주 하나님의 구속 사역과 연관됨을 알 수 있다. 신비주의자들은 창조와 구속으로 이어지는 이 초월적 사역 속에 끼어들어 자신이 남들이 경험하지 못한 신비 체험 속에서 남들과 다른 하나님의 특별한 존재임을 부각 시키는 경우 신앙의 위험한 한계를 단숨에 넘어버리는 심각한 지경에 이르게 됨을 명심해야 한다.
5. 사도 바울의 신비주의
바울이 묵시적으로 삼층천에 올라갔다는 기록(고후 12:1-6)이 기독교 신비주의 역사에서 중심적 역할을 한다는 점을 지적한 최초의 인물은 스톨츠(Anselm Stolz, 1900-1942)다. 그러나 사도 바울을 신비주의자라는 명제를 바탕으로 접근한 인물은 아프리카의 성자로 불렸던 신학자 알버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1875-1965)였다. 슈바이처는 인간이 지상적인 것과 초지상적인 것, 시간적인 것과 영원한 것 사이의 단절이 극복된 것으로 보고, 아직은 지상적이고 시간적인 것 안에 존재하지만 자신이 초지상적인 것과 영원한 것 안에 들어가게 됨을 체험하게 됨을 체험하는 모든 것을 신비주의로 보았다.
사도 바울은 예수의 메시아적 통치는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이미 시작되었고 예수의 선민들의 부활도 이루어졌다고 생각했을 만큼 성례와 윤리, 율법, 칭의에 대한 바울의 견해는 모두 종말론적이며 신비주의인 것이다. 원시 종교에 나타난 원시적 신비주의가 마술적인 반면, 인류가 우주와 맺고 있는 관계를 이해하기 위한 깊은 사유 가운데 모습을 드러내는 좀 더 고도화한 철학(플라톤, 스토아, 스피노자, 쇼펜하우어, 헤겔 등)이나 힌두교의 브라만(Brahman)이나 부처(Buddha)에게서 보이는 신비한 요소를 사유 신비주의라 하였다. 슈바이처는 바울의 신비주의는 이 두 신비주의 사이에 위치한다고 보았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신비주의라는 것이다.
슈바이처는 사도 바울이 받은 계시를 초월 계시와 진리로 보기를 회피하여 보다 높은 신비주의와 보다 낮은 신비주의가 혼재한 신(神)-신비주의 가 존재하지 않는 그리스도 신비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기독교 신앙에 있어 성경에 나타나지 않은 단어나 신학사(史)에 등장하지 않는 새로운 신앙과 신학의 용어를 사용할 때에는 신중에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자신의 믿음 부족을 나타내거나 신학적 미숙의 표현일 경우 신앙과 교리를 왜곡할 가능성을 지님을 늘 경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쉬바이처 신학에는 초월적 복음의 요소보다 내재적 학문의 향기가 난다.
Ⅳ. 신비 체험 분별을 위한 몇 가지 도구
기독교 신비주의 역사 속에서 교회는 신비 체험에 대한 다음의 몇 가지 분별의 도구를 도출해 낼 수 있다고 본다.
첫째, 성경의 틀을 벗어나지 않는 경험이어야 한다(성경론). 신비 체험이 성경의 하나님, 창조, 타락, 구속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근본적 틀을 허무는 작은 여우(아 2:15)가 되지 말아야 한다. 개인의 주관적 체험이 자신과 이웃의 신앙의 근간을 허무는 일이 없어야 한다.
둘째, 성경적 기독론을 훼손하는 체험은 아닌가를 살펴야 한다(기독론).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에 대한 복음적 기독교 교리에 탈선을 일으키는 신비적 체험은 조심해야 한다. 근본적으로 기독론에 대한 도전은 성경에 대한 훼손이요 믿음의 반역이다.
셋째, 기독교 역사 속에서 수용 가능했던 신비 현상이나 체험인가를 보아야 한다(교회사와 교리사). 기독교 역사는 많은 신비적 현상과 개인적 체험들에 대해 그 진위를 평가하여 왔다. 개인의 신비 체험이 이 역사적 평가의 기준들을 넘어가게 될 때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불순한 체험일 개연성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한국교회의 소위 “금가루 현상”에 대해 서철원 박사가 기독교 역사상 그런 신앙적 체험은 없었다고 단언한 것을 주목하라.
넷째, 성경의 틀을 벗어난 첨삭된 특별 계시적 체험이 있는가를 보아야 한다(계시론). 인류를 믿음으로 인도하고 구원에 이르는 근본적 계시(특별 계시)는 성경 속에서 이미 모두 완성된 것이다. 신비 체험이 이 계시의 영역을 넘어 새로운 특별 계시를 들고 나온다면 그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이 아닌 것이다. 새로운 구주, 새로운 성경(몰몬경, 통일교 교리 등)의 첨삭은 결단코 성령의 역사가 아니다.
다섯째, 성경이나 정통 교리보다 신비적 감정이나 체험이 앞서거나 기타 교리적 논쟁과 혼동을 일으킬 수 있는 낯선 단어를 분별없이 사용하고 있지는 않은가를 보아야 한다. 성경은 은사를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들뜬 흥분 같은 은사가 다가 아니다. 은사는 반드시 그 성경과 그 열매로 판단 받아야 한다. 또한 신비 체험이 새로운 낯선 단어들을 창출해내는 것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다. 교회는 성경과 더불어 역사 속에서 새로운 신학적 용어에 대해 치열한 논쟁과 토의를 거쳐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 교리를 구성하여 왔다.
비록 과학과 기술의 발달 속에서 다양한 단어들이 탄생하였더라도 이것들을 새로운 신학적, 교리적 용어로 활용하는 것은 극히 조심해야 한다. 마리아 염색체와 DNA, 예수의 염색체 숫자, 마리아의 월경, 왕의 기도, 신사도, 빈야드 운동, 구도자 위주의 열린 예배, 제2 선민론, 제 2 히브리민족 등과 같은 성경적으로 낯선 단어들이 신비주의와 결합할 때 그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닌 불순한 폭발력을 가지게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신학 전개에 있어 낯선 용어의 사용은 성령의 사람들 가운데 치열한 신학적 논증 속에서 달궈져서 그 진위를 평가 받은 다음 정금같이 나와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다섯 가지 도구를 통해 최근에 대두된 주요한 현대 신비주의 현상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Ⅴ. 현대 기독교 신비주의 평가
1. 성경적 창조론과 신론
(1) 영지주의
영지주의(靈知主義, Gnosticism)는 헬라어로 ‘지식’, ‘앎’ 등의 뜻을 가진 그노시스에서 비롯된 용어이다. 영지주의는 일종의 우주론적 이원론으로 우주는 영적 세계와 악한 물질 세계로 구분되며 사람은 그리스도를 믿거나 여타 종교를 통해 구원 받는 게 아니라, 신비한 지식을 통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본다. 그 특별한 비법, 특별한 지식을 바로 영지(그노시스)라고 부른다.
영지주의가 언제 어떻게 발생하였는가에 대해서는 아직 일치된 견해가 없다. 기독교와 무관한 종교 현상이라는 설과 유대교 이단이나 유대교 이탈 집단이라는 설 등이 있으나 그랜트(R. M Grant)는 영지주의가 주후 70년 로마인들이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후 전통적 종교적 관념들(유대적 관점과 기독교적관점들)이 철저히 파괴된데 대한 반응으로 생겨났다고 보았다. 반면에 영지주의를 신비적 체험에 대한 글을 담고 있는 일련의 운동으로 본 사람은 영국 학자 도드(E. R. Dodds)였다. 예루살렘 히브리대의 유대 신비주의 학자 게르솜 스콜렘(G. C. Scholem)은 유대적 영지주의가 신비적 명상과 실천을 포함하고 있다는 도드의 견해에 동의한다.
자유주의 신학자 하르낙이 『교리의 역사』(History of Dogma)에서 영지주의자들을 최초의 신학자라고 부른 반면, 성경은 사도 베드로와 사도 바울의 일련의 글들과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한 자들이 있음을 사도 요한이 언급(요일 2:22; 4:2,3)하는 것으로 보아 기독교 초기 사도들에게 있어 영지주의는 골칫거리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영지주의에 대한 자료들은 순교자 저스틴, 이레네우스, 히폴리투스, 터툴리안,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오리겐, 키프로스 살라미스의 에피파니우스(315경-403) 등의 저서에도 나타나고 있다. 특별히 이레네우스의 이단 논박(Adversus Haereses)에 잘 나타나 있다. 초대교회 훌륭한 교부였던 이레네우스(Irenaeus)는 소아시아 태생으로 이단 논박은 그가 거의 10년 간에 걸쳐 썼던 책으로 모두 5권으로 되어있다. 그는 성경과 아울러 헬라 철학과 문학에도 조예가 깊은 인물로 특별히 사도요한의 제자인 폴리캅이 그의 스승이었다. 그가 영지주의의 위험성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는 것은 그만큼 사도 시대로부터 영지주의가 기독교에게는 위험한 종교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래서 잉게(Dean Inge)는 “영지주의는 익기도 전에 썩어버렸다”고 했던 것이다.
교부들은 마술을 행한 사람으로 묘사하는 사마리아의 시몬(Simon Magus, 사도행전 8장)을 최초의 영지주의자로 간주한다. 그는 스스로 신이라 칭한 사람이었다. 불트만은 요한복음이 만다야교의 것들과 유사한 전승들을 실은 초기 영지주의 문서를 개작(改作)한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신약성경은 ‘구속된’ 구속자에 관한 기독교 영지주의 신화에 의존한 문서라고 본다. 그래서 불트만은 신화로 얼룩진 책인 성경을 제대로 보려면 신화를 제거하고 비신화화(Entmythologisierung, 非神話化)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같은 영지주의의 경향은 기독교의 신론과 창조론을 크게 벗어나는 것이다. 뿐 만 아니라 영지주의는 사람들이 천상에서 온 존재임을 모르며 육체에 대해 신성의 불꽃들이 특정한 영적 개인들의 육체에 갇혀있다고 본다. 영지주의가 그리스도를 부정하지는 않으나 영지주의에서는 그리스도를 성육신한 하나님이라든가 십자가 고난이 인류의 대속 사역이 아닌 영지의 사명을 띠고 오셨다는 주장을 통해 기독론조차 속상을 입히게 된다. 기독론의 손상은 구원론에도 당연히 영향을 준다. 영지주의는 구원이 믿음이나 행위에 달려있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영지주의에서 보는 구원은 단지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참된 본질을 아는 것이다. 영지주의는 오늘날 유대교 신비주의인 카발리즘 속에서 여전히 그 힘을 발휘하고 있다.
(2) 창조과학
창조과학(Creation Science)은 헨리 모리스(H. M. Morris)를 원조로 하는 성경 해석 운동이다. 주로 우주와 지구 창조 연대에 대해 6천년 내외와 창세기 대홍수 단일격변설을 중심으로 성경에 대한 문자적 해석을 시도해 온 종교 신학적 운동이다. 필자는 지난 80-90년대 한국의 창조과학운동의 간사로 사역하여 왔다.
이 때에도 창조과학 운동은 신앙 속 낯선 언어인 “창조과학”이라는 어원에 대한 논의를 창조과학 운동 내부 안에서 꾸준히 지속하여 왔다. 그만큼 신앙의 운동이 신앙의 낯선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분명 부담을 가진 행동이다. 과학철학자 칼 포퍼의 반증주의적 관점에서 창조과학은 과학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과학은 반증 가능해야 함에도 창조는 초자연적 절대자의 존재를 전제한다는 점에서 반증불가하다. 즉 창조와 과학이라는 두 단어는 초월과 내재라는 속성 사이에서 늘 충돌한다. ‘아버지’인 ‘어머니’처럼 두 단어는 정면으로 만나면 안 되는 단어인 것이다.
이 같은 창조과학의 딜레마는 늘 창조과학이 두 가지 잣대로 창조와 과학의 문제에 접근한다는 평가를 받게 만든다. 즉 과학이 유리하고 필요할 때는 과학의 논리를 사용하다가 과학의 논리로 반박할 수 없는 경우에는 성경의 문자적 해석에 의존하는 방식을 택한다. 틈새를 메우는 하나님(또는 성경) 논리가 성립되는 것이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창조과학에 대해 신학적 측면에서 성경신학적 해석학에 무지하면서도 저돌적이라고 비판 받고, 과학계에는 근본적으로 과학 단체가 아닌 신비주의 신앙 단체라는 지적을 당하는 것이다.
창조과학이 젊은 우주와 단일 격변론에 대한 성경적 신뢰를 바탕으로 성경에 대한 독특한 해석의 잣대와 과학적 해석이라는 두 가지 잣대를 오고가는 것은 분명 신비주의적 경향을 말한다. 이 같은 창조라는 초월의 신비와 과학이라는 내재의 잣대를 구분하지 않는 것은 늘 창조과학 운동이 딜레마 속에서 좌충우돌할 수밖에 없는 신비주의적 한계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에 대해 마크 놀이 창조과학은 “성경과 관련해서는 베이컨주의를 잘못 적용했고, 자연과 관련해서는 베이컨주의를 포기했다”는 지적을 옳았다.
과학적 무리한 해석은 ‘그건 하나님이 하셨으니까’ 라는 한 마디로 모두 무마된다. 예를 들어 성경적으로 우주는 지구 중심이므로 먼 우주의 별들이 그렇게 많다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다. 태양보다 수만 배 큰 천체가 존재한다는 것은 관심 밖이다. 왜? 외계생명체는 있을 수 없으니까. 아니면 우주가 그렇게 광활할 리가 없다. 하나님은 그렇게 먼 곳에 그렇게 수많은 별들을 만들었을 리가 없다. 지구 중심의 하나님이시니까. 아마 별들은 수억, 수천만 광년이 아닌 빛의 속도로 가도 수천 광년이면 갈 수 있는 실은 아주 가까운 곳에 박혀있는지도 모른다.
성경은 위대한 책이므로 답이 없을 리 없다. 외계인은 당연히 없는 것이다. 사실 이에 대한 답은 모른다는 것이 답이다. 그렇게 알고 믿음 가운데서 기다리면 된다. 모른 다는 것이 그렇게 말하기 어려운 것일까? 성경을 믿던 갈릴레이 이전의 모든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했을까? 태양계 시스템이 있고 지구는 그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갈릴레이 이전 사람들이 믿었을까? 당연히 아니다! 하늘과 별들은 하나님의 영광과 엄위하심을 암묵적으로 보여주는 실체라고 왜 말할 수 없는가. 최근까지도 지구 밖에는 절대 물이 있을 수 없다는 쪽에 창조과학이 집착한 것도 바로 이 같은 성경해석에 대한 미숙한 대처를 보여준다.
성경문자주의는 성경선민주의자가 되어 버리는 참사가 일어나면 안 된다. 충성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창조과학에 대한 충성이 맹종이 되지 말아야 한다. 말고의 귀를 벤 베드로는 예수의 충성스런 사람이었다(요 18:10). 하지만 그것은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행동이었다. 베드로는 십자가 고난은 결코 일어나면 안 되는 일이라고 역설하여 예수님께 ‘사단’이라는 책망을 받는다(마 16: 23). 창조과학은 과학에 길이 있는 게 아니라 신앙과 그에 따른 바른 신학에 길이 있음을 깨닫는 것이 먼저이다. 즉 창조과학도 신학의 일종임을 깨닫는 일이 중요하다.
(3) 지적설계
20세기 후반 창조과학의 대안으로 시작된 지적설계에서도 창조과학과 유사한 신비주의가 보인다. 설계와 설계자이신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지적설계라는 말은 창조과학처럼 낯설게 느껴진다. 새로운 낯선 단어인 것이다. 창조과학과 달리 지적설계는 설계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충성심이 감추어져 있다.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 속에서 설계의 강조는 가능할 수 있다. 문제는 그 설계자가 누구인가? 왜 인격적인 성경의 창조주 하나님이 아닌 하필 지적설계인가라는 궁금증이 생긴다. 지적설계는 유대인의 유일신, 힌두교의 창조신, 이슬람의 유일신, 조로아스터교의 신, 영지주의의 신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겠는가. 또한 그 설계자는 왜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 과정에서 짜증나는 모기와 징그러운 쥐들을 창조하였으며 지카 바이러스 같은 미생물들로 애꿎은 아이들을 구제불능의 심각한 장애인으로 만드는가? 그 지적설계자는 왜 우주를 쓸데없이 불필요하게 그렇게 크게 만들어서 인간에게 쓸데없는 상상을 하게 만드는가? 그 설계자는 왜 악마를 창조했나?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 안에 왜 돌이킬 수 없는 악을 넣은 것인가?
결국 지적설계도 새로운 낯선 단어를 만들어내기는 하였으나 신학의 문제로 환원 되어버렸다. 신앙과 신학이 함부로 새로운 낯선 단어를 만드는 작업이 얼마나 당황스러운 결과를 가져다주는 지 지적설계를 통해 다시 한 번 깨닫게 된 것이다. 신학이 교회의 시작부터 사용해 온 그대로 ‘창조’, ‘설계’, ‘섭리’, ‘보존’과 통치라는 말로 충분하다.
2. 기독론
이단들이나 사이비의 신비 체험에서 나타나는 현상은 모든 신앙 교리의 훼손이 일어나는 데 특별히 기독론의 문제를 일으킨다.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몰몬교)나 안식교, 여호와의 증인들이 기독론을 손상 시키는 것은 교주의 주관적 신비 체험에서 비롯된다. 개혁교회는 항상 성경 자신이 곧 성경해석자였다(Scriptura sui ipsius interpres). 또한 어거스틴이 서방 기독교 신비주의에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나 어거스틴이 정통 신학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은 그의 신비한 목표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기독교 공동체를 위한 그리스도 중심적이요 교회적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교회와 모두를 향한 신비한 그리스도의 “사랑”(caritas)과 관련된다.
그런데 몰몬교의 창시자 요셉 스미스(Joseph Smith)는 다르다. 그에게는 새로운 초월적 해석이 주어졌다. 제 7일 예수재림교에서 엘렌 지 화이트는 모세와 같은 특별한 계시를 받은 여선지자이다. 이렇게 될 때 성경의 특별 계시는 일반 계시보다도 못한 상대적 계시로 추락해버리고 만다. 성경을 이탈하여 기독론을 손상 시키는 신비 체험을 가지고 신자들을 현혹하는 일은 금물이다. 이들이 개혁신학이나 어거스틴과 다른 이유이다.
3. 구원론
기독론의 손상은 필연적으로 구원론의 손상을 가져온다. 무함마드의 계시에서 비롯된 이슬람교가 예수를 이슬람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라는 계시를 통해 예수가 아닌 무함마드를 알라의 마지막 선지자로 본 것은 이슬람이 근본적으로 기독교 이단들과 다를 것 없는 성경에서 이탈한 종교임을 보여준다. 예수를 선지자로 격하 시키면서 모든 구원의 도를 무산시켜 버리며 이슬람은 새로운 계시인 꾸란를 통해 성경 전체를 재구성하는 작업을 하였다. 이슬람의 이 같은 복음 아닌 ‘내가복음’, ‘자기복음’의 행태는 이단들의 ‘자가 복음’ 형태와 전혀 다를 바 없는 것이다.
4. 교회론
조지 폭스(George Fox, 1624-91)로부터 시작된 초기 퀘이커교는 가견적 교회의 배교(딤후 3:1-5)를 통해 외형적 신앙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고 우주의 내면의 빛(요 1:9-18)만이 그리스도께로 가는 유일한 길로 보았다. 당연히 교회의 성례도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순결한 내면의 예배에 부적절한 옛 언약의 잔존물이라 하여 배척당하였다(요 4:24). 교회와 더불어 빛의 조명을 받지 못하는 전가된 의와 전적 부패와 삼위일체 같은 교리들도 모두 부정되었다. 오직 퀘이커 교도만이 “빛의 자녀들”이요 “진리의 친구들”이었다. 다른 신비주의자들에게서 보이듯 이들도 자신들만이 특별한 빛을 받은 선민들이요 자신들은 오직 조용한 기도와 참 빛으로부터 오는 성령의 직접적 은혜의 설교를 체험한 신자들이었다. 보편적 빛의 교리를 찾아 퀘이커들도 분화되었으나 그 근본은 교회론을 이탈한 신비주의적이었다.
5. 종말론
신비주의적 종말론은 주로 그리스도의 재림과 관련된 시한부 종말론에서 문제가 된다. 시한부 종말론은 세대주의를 근간으로 파생된 종말론이 하나라 할 수 있다. 세대주의는 주로 인류 역사의 세대 구분과 문자적 이스라엘의 회복을 기본으로 한다. 대개 6-7개 세대로 구분하는 세대들은 1천년을 기본으로 역사를 구분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인 시한부종말론의 딜레마에 다다르게 된다. 이 같은 세대 구분은 젊은지구론의 창조과학과도 커넥션을 가질 수 있는 데 쥬영흠 박사가 창조과학 운동을 세대주의적이라고 한 것이나 마크 놀이 창조과학을 과학적 세대주의라고 한 것이 모두 이 두 운동의 종말론이 서로 창조 연대 6천년이라는 일치점을 가지기 때문이다.
문자적 천년왕국을 믿는 세대주의자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종말에 대한 조바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재림에 대한 무리한 소망은 재림의 재촉과 초조함으로 다가온다. 이 같은 세대주의적 갈망은 종말에 대한 간절한 기도 속에서 신비주의적 합일의 체험을 주장하는 일부 종말론자들을 양산하게 마련이다. 무화과나무를 이스라엘로 해석하여 이스라엘 독립의 해인 1948년에 희년이나 70년을 합산하여 1992년, 1998년, 1999년, 2000년, 2001년, 2018년 등 재림과 휴거를 갈망하는 시한부 종말설 등은 모두 건전치 못한 세대주의의 파급 효과라고 할 수 있다. 세대주의에 대한 지나친 확신이 급박한 휴거에 대한 확신으로 나타나는 과정에서 좀 더 명확한 표적으로서 신비적 체험이 동원되게 되는 것이다.
Ⅴ. 나가면서
1. 도대체 왜 속는 것인가?
(1) 착각을 즐기는 인간?
인간은 가끔 서로 아무런 관련이 없는 현상이나 정보에서 어떤 특정한 규칙성이나 연관성을 찾아내고 의미를 부여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 같은 인식 작용을 나타내는 심리학 용어를 아포페니아(Apophenia)라고 한다. 1958년 독일의 정신병리학자인 클라우스 콘라드(Klaus Conrad)가 맨 처음 사용한 개념인데, 사람은 이 같은 집착 가운데서 감정적 오류를 범하게 된다. 아포페니아(Apophenia)는 인류 발전의 원동력이 되기도 하였으나 인간 인지(認知)와 사고(思考)의 오류와 착각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기도 해 왔다.
불분명하고 불특정한 현상이나 소리, 이미지 등에서 특정한 의미를 추출해내면서 나타나는 착각과 오인(誤認) 등을 나타내는 ‘파레이돌리아(Pareidolia)’ 현상도 아포페니아(Apophenia)의 한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파레이돌리아(Pareidolia)’는 그리스어로 ‘나란히, 함께’ 등을 의미하는 ‘para’와 ‘이미지, 형태’를 나타내는 ‘eidolon(εἴδωλον)’에서 온 말로 ‘잘못된 연상에 의한 이미지나 인식의 형식’을 나타낸다.
이런 보기는 주변에 너무도 많다. 모양과 형질의 유사성을 유사한 질병 치료에 이용하는 동양의학 또는 의학의 대체요법이라던가 꿈의 형상을 삶의 미래의 투영으로 보는 경우, 과거 달 표면을 보고 계수나무와 옥토끼가 살고 있다고 연상하거나 별들의 배치를 별자리와 신화로 이미지화 한 것, 구름의 형태를 보면서 동물이나 사람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 불분명하고 불특정한 현상이나 소리, 이미지 등에서 별난 의미를 추출해내려는 심리, 또한 최근의 화성에 설치된 파이프 라인, 화성의 외계인 시체, 화성의 해골이나 고대 건축물들, 달 표면의 외계인 기지 등등 모호하고 연관성이 없는 현상이나 자극에서 일정한 이미지와 패턴을 추출해 연관된 의미를 추출해내려는 심리 현상이 모두 아포페니아와 파레이돌리아와 관련된다.
특정한 메시지가 무의식적으로 기억돼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는 ‘서브리미널 효과(subliminal effect)’라는 이론이 있다. 한때 음악을 거꾸로 돌려 들으면 마귀가 인간의 잠재의식 속에 숨겨놓은 인간을 타락시키는 치명적 음모가 있다는 소위 ‘백워드 매스킹’(Backward Masking) 소동도 이와 관련된다.
이들 이미지는 가끔 예술적 상상력과 창작 욕구를 진작시켜 문화와 예술 등의 발전을 촉발 시킨 긍정적인 면도 있었다. “서로 관련이 없어 보이는 물체나 생각들 사이에서 어떤 연관 관계를 찾으려는 성향은 정신병과 창조성을 연결시킨다”는 피터 부르거(Peter Brugger)의 말처럼 많은 예술가들이 훗날 정신병자가 된 경우가 많은 것도 이와 연관된다. 남들과 다른 이 같은 아웃사이더적인 경향이 예술적 창의성과 연관되기도 하지만 주변에 대한 망상과 환각, 착란과 같은 정신 분열 증상의 원인으로 나타나기도 하는 것이다.
(2) 착각의 심리학이 신앙적 착각으로
기독교적으로는 이 문제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기독교인들도 착각에는 당연히 예외가 없다. 신앙적으로 볼 때 이 문제는 많은 부작용을 내재하고 있다. 개인의 신비 체험은 반드시 주관주의 신앙을 낳는다. 그리고 주관주의 신앙은 성경의 절대성을 허물어뜨린다.
신비체험이 강조될 때 신앙은 질서를 잃어버리고 각자의 ‘내가복음’, ‘자가복음’이 되어 버린다. 그렇게 되면 신자들 숫자만큼의 기독교 교리가 만들어지게 된다. 즉 ‘내가 예수를 보았고 내가 천국을 보았고 내가 지옥을 보았다. 하나님은 나를 절대적으로 특별 대우하시며 신비롭게 만나 주셨다‘는 착각 속에 성경의 질서를 이탈하게 된다. 내 개인적 신앙 체험이 오직 최고인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남보다 특별히 사랑해서 특별한 복이나 은사를 주셨다거나 우리 민족은 다른 민족과 구별된 특별한 민족이라든가 우리 학교야말로 하나님의 학교라는 등의 선민의식은 대단히 위험하다. 특별하기는커녕 선줄로 알 때 무너질까 조심해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다. 그리스도인은 우월적 착각(선민)이 아닌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늘 겸손해야 한다.
기독교 신앙은 신비한 진리이지만 일개 신비주의로 변질 되어버리면 위험하다. 최근 일부 기독교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주관적 신비 체험, 천국지옥 체험, 길흉 예언, 점술식 기독교화 등 ‘신앙의 부채 도사화‘ 현상은 우려할만한 수준이다. 이 같은 현상은 누미노제(numinose)한 주관적 신앙 체험을 가지고 아포페니아적 연관성을 찾아내려는 심리적 집착에서 비롯된다.
성경은 주관적 신비주의자들이 풀 듯 사사로이 풀거나 그렇게 풀 수 있는 책이 전혀 아니다(벧후 1:20-21). 인간은 하나님을 자기 논리와 체험 속에 가두는 착각과 오류를 범하면 안 된다. 사사 시대는 바로 영적 포스트모던 시대였다. 그 영적 사사시대가 지금 대한민국의 일부 병든 종교인들에게서 재현되고 있다. 성경과 성령의 사람들인 신앙의 정통 선배들이 역사를 통해 구축해 놓은 바른 믿음과 교리(신조)의 권위를 무시하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제멋대로 가르친 일부 엉터리 신앙 지도자들의 일차적 책임이 크다.
2. 분화되고 있는 신비주의
현대 신비체험 운동은 세대주의 종말론뿐 아니라 다양한 방식으로 분화되고 있다. 뉴에이지, 관상 기도, 빈야드, 토론토 축복, 하늘의 언어 방언 운동, 예언 사역, 신사도, 종교 현상이 초월의 존재가 아닌 UFO나 외계인과의 조우(遭遇)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현대적 종교운동 등 새로운 유사기독교 운동들이 미숙한 성경 해석, 신학의 부재와 교리에 대한 무시 속에 성경 이탈, 새로운 특별 계시와 접목될 때 주관적, 개인적 체험이 초월을 넘나드는 신성모독의 위험한 상황을 초래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최근의 신비주의적 경향들이 역사적 기독교 신비주의자들처럼 인간의 더러운 죄성과 정면으로 대면하여 개인적 참회와 거룩성 회복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대단히 기복적이며 타인을 향한 상대적 영적 우월감(일종의 영적 선민의식)을 조장하는 경향이 뚜렷한 점은 우려스러운 점이 아닐 수 없다.
예레미야나 요나나 아모스나 나훔과 같은 성경의 선지자들이 참된 회개와 징계의 경고를 발한 초월 체험자인 것과 마치 특별 취급 받는 무슨 선민이 된 듯한 착각 속으로 대중들을 몰고 가는 최근의 신비주의 운동은 오히려 극렬히 대비가 된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안 된다. 한쪽이 성령의 초월적 체험이었다면 한쪽은 분명 아니다. 신비 체험을 통해 ‘신령한 선민’이 되지 않아도 된다.
“진정한 선민”은 신화와 신비에 매달려 복을 누리고 즐기려는 “영적 선민 히브리 족”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의 위엄과 십자가의 영광을 알고 십자가 지신 승리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그 분과 함께 그렇게, 성문 밖 고난 받은 예수처럼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는 것이 진정한 선민인 것이다(히 13: 12-13).
편집자 주: 필자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는 김천대와 평택대 신대원 겸임교수로 사역하고 있다.
조덕영 박사 bareunmedia@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