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중후반에 활동한 신학자 가운데 위르겐 몰트만(Jurgen Moltmann)은 삼부작(Trilogy) 가운데 2부에 속하는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이란 제목의 책을 썼다. 신학을 조금만 접해본 사람이면 이 책의 제목 “Der gekreuzigte Gott”이 일으킬 논란이 금방 다가올 것이다. 하나님의 죽음이라는 실로 엄청난 논제를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몰트만 자신은 결코 이 사실을 의도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누군가에 의해서 “하나님의 죽음”이 가능한 것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이 제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전한 말씀은 하나님의 죽음이 불가함을 명확히 언질하고 있다(딤전 6:14-16). 오직 하나님에게만 죽지 않음이 있기 때문이다. 창조와 함께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은 원칙상 죽을 수 있는 존재이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않음이 있기 때문이다. 위르겐 몰트만의 책 제목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십자가라는 형틀은 죽음 이외의 방식으로는 내려올 수 없는 형 집행 방식이기 때문이다.
▲유태화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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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대조적으로 하이델베르크신앙교육서는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을 이야기 한다. (제40문: 왜 그리스도는 죽기까지 자신을 낮추어야 했습니까? 답: 왜냐하면 하나님의 공의와 진리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이외에 다른 어떤 방법으로 우리의 죄에 대한 대가를 지불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그리스도 예수를 뜻한다.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며 동시에 참 사람이다. 두 본성이 한 인격에 거하는 존재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 예수이다. 하이델베르크신앙교육서의 제1저자인 우르시누스(Ursinus)나 그의 신앙고백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이 사실을 매우 주의해서 읽고 이해했었다. 신성과 인성을 분리 없이 혼동 없이 그리스도 예수라는 한 인격 안에서 읽고 해명해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신성과 인성은 근원적으로 분리되지 않는다. 심지어는 영혼이 그 육체로부터 분리되었을 때조차도 신성은 육체가 놓인 무덤을 비우지 않았고 동시에 영혼과도 함께 있었다. 심지어 인성을 따라서 그리스도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때에도 신성은 인성과 분리되지 않았다. 그러나 동시에 신성은 결코 인성과 혼동되지도 않았다. 인성을 따라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을 때에, 즉 영혼이 육체로부터 떠날 때에, 신성이 인성의 고난을 받고 피를 흘리며 죽음에 넘겨질 때에 본체적으로 혹은 존재론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리스도 예수의 수난은 신성의 직접적인 수난이나 죽음에 넘겨짐이 아니라 인성을 따라서 일어난 일이어서 하나님의 실제적 죽음을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다만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이 있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리스도 예수라는 한 인격적인 존재는 신성과 인성을 함께 내포하는 존재이되, 그 인격 안에 있는 신성과 인성은 직접적으로 각각 자신을 상대방에게 전달하지 않고, 다만 간접적으로만 전달한다. 쉽게 말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인격을 통하여 신성이 표현될 때에는 인성이 신성과 함께 있으며, 인성이 표현될 때에도 신성이 인성과 함께 있지만, 그러나 어디까지나 직접적으로 신성을 표현하거나 혹은 인성을 표현하거나 하는 사실이 희석되지 않는 방식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그리스도의 수난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수난이고, 따라서 직접적으로 인성의 수난인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리스도 예수는 그 영혼과 육체로 수난과 죽음에 참여하는 것이다.
▲몰트만의 Der gekreuzigte G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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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실을 하이델베르크신앙교육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제37문: 그대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당하셨다“고 말할 때, 그대는 무엇을 고백하는 것입니까? 답: 예수 그리스도께서 땅위에 사시는 전 생애 동안, 그러나 특별히 생애의 마지막 순간에, 전 인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친히 육체와 영혼으로 감당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 유일한 속죄 제물로 고난을 당하심으로, 우리의 몸과 영혼을 영원한 정죄로부터 구속하시어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의와 영생을 얻게 해 주셨습니다.
제37문답에서 확인하듯이 수난과 죽음의 직접적인 당사자는 인성을 그 인격에 수반한 그리스도 예수인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 곧 하나님의 아들로서 십자가에서 수난을 당하신 것이다.
이 수난에 신성이 배제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또한 기억해야만 한다. 인성이 수반된 그리스도 예수의 수난에서 몸과 영혼으로 자기 백성 모두의 죄를 실제로 담당하고 죽음의 심판에 넘겨질 때, 신성은 인성을 떠나지 않았다. 직접적인 수난의 당사자인 인성을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사야 63장 9절에서 하나님이 죄인의 모든 고난에 동참할 수 있듯이, 죄인의 모든 죄를 담당한 예수의 모든 고난에 오롯이 동참한다. 우리의 죄를 담당하기 위하여 하늘을 가르고 우리에게로 오사(사 64:1) 성육신 한 그리스도 예수의 전 삶과 그 정점으로서 십자가에서 신성은 온전히 함께하였다. 인성에 정해진 수난과 고통을 신성이 공감하는 방식으로 경험하는 것이다. 인성이 실제로 직면했고 경험했던 죽음의 고통까지도 신성이 공감하는 방식으로 실제적으로 경험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죽지는 않았다.
다만,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와 같이 행함으로써 다음과 같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던 것이다. “제 40문: 왜 그리스도는 죽기까지 자신을 낮추어야 했습니까? 답: 왜냐하면 하나님의 공의와 진리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이외에 다른 어떤 방법으로 우리의 죄에 대한 대가를 지불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인성의 직접적인 수난에 신성이 분리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말하여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리스도 예수의 수난이었기 때문에, 한 사람의 죽음이 많은 사람의 죄의 값을 지불하고 죄와 사망에서부터 생명에로 옮길 수 있었던 것이다. 비록 직접적인 수난과 죽음에 넘겨진 것은 아니었으나, 간접적으로 인성과 함께 있음으로써 택함받은 모든 백성의 죄를 실제로 감당하여 진노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인성의 수난은 실제적이되 그 효과가 모두에게 미칠 수 있었던 것은 신성이 인성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거기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으로 단번제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인을 속량하는 일을 완결 지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의 신비의 힘을 보게 되는 지점이다. 사실 마귀는 이 사실을 읽을 수 없었을 것이다. 십자가의 신비는 성령의 사역이 아니고는 접근할 수 없는 진리이기 때문이다(고전 2:14). 그 당대의 지혜자도, 선비도, 변론가도 십자가 사건에 감추인 구원의 지혜와 능력을 헤아릴 수 없었다.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고전 1:19-21). 심지어 교부들은 사단도 십자가의 신비에 도달하지 못한 것으로 이해했다. 단순히 인간적인 일인 줄만 알았던,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를 죽음에 붙잡아 둘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그리스도 예수의 신성과 인성의 구현으로 죽음의 권세를 깨트리고 부활하자 속은 것을 알았던 것으로 이해하지 않았던가!
하나님은 죽음에 매이거나 혹은 죽음에 종속되는 분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에게는 죽지 아니함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신비를 친히 목격하고 그로부터 계시를 받았던 바울은 디모데전서 6장 15, 16절에서 다음과 같이 연약한 후배 사역자인 디모데에게 권면하였는데, 바울이 걸었듯이 전도자와 목회자와 신학자의 길을 걷는 모든 후배들에게도 실로 매우 중요한 말씀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은 복되시고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오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 가운데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 다만 바울 사도가 갈라디아교회에 보내는 편지(2:20)에서 친히 고백했듯이 이렇게 고백할 뿐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유태화 교수(백석대학교 신학대학원) bareunmedia@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