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대 교수로서 스스로 대광고등학교 강제채플 문제의 부당성을 제기하였던 종자연에 속했던, 그리고 군승으로 살아온 자신의 과거를 드러내면서 기독교에 귀의하여 불교적 세계관을 딛고 섰으며 또한 종자연에서 추구했던 그런 세속적 가치관을 벗어 내던지고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갈아입었다는 주장과 함께 한국교회 젊은이들에게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혹은 <<엘정책연구원>>을 개원하고 그 영향력을 구체화하려고 하는 이정훈 교수의 강연을, 어떤 분의 신중한 문제의식과 함께 꼭 듣고 의견을 제시해 줄 것을 권유받은 후로, 일련의 동영상을 통하여 듣고 공감과 의문이라는 두 다른 문제의식을 갖게 되었다(https://www.youtube.com/watch?v=X9ooXuAvrOY).
▲유태화 교수(백석대학교
신학대학원 조직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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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그가 주장하는 기독교적인 가치 주장에 대하여는 개종한 뒤 매우 짧은 시간에 상당히 포괄적이고 체계적인 기독교 이해에 도달한 것으로 파악되며 조심스럽지만 비교적 긍정적인 마음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특별히 프로테스탄트교회의 후예로서 칼빈주의와 신칼빈주의의 신학에 대한 이해를 표준적인 가치로 삼고 기독교세계관적인 논의를 전개하는 것에 대하여는 영육이원론적인 경향이 배태되어 있는 한국교회의 전망에서 볼 때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특별히 칼빈의 자연법 사상의 진수를 잘 파악하고, 그리고 율법의 제3의 용도와 자연법 사이의 연관성을 조심스럽게 끌어안으면서 기독교인의 동성애에 대한 입장, 혹은 마르크스와 레닌적 사상체계에 대한 분석적이고 비판적인 입장을 전개하고,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인인 어떻게 자연법 사상을 기반으로 비그리스도인과 이런 문제에 대한 공감을 이끌어내고 협력을 도모해 갈 것인가를 논의하는 대목에서는 그의 신학적 통찰에 숙연해지기까지 하였다.
다음으로, 그가 주장하는 마르크시스트적인 사회혁명 이론의 근간을 찾아서 맥락을 따라 그 이해의 연원과 특징을 매우 포괄적이면서도 세세한 관찰과 함께 정리하고 이해하도록 돕는 지점도 흥미롭고 또한 매우 설득력이 있다고 여겨졌다. 이런 점에서 그의 법철학 혹은 법 사상사를 전공한 학자로서의 특징이 잘 반영된 전문적인 길 안내자로서의 역할을 그가 잘 수행한다고 생각된다. 특별히 사회계층적인 전복을 꾀하는, 그 결과로서 기득권세력을 죄악시 하는 진영논리를 만들어 권위와 전통적 가치에 대한 기반을 해체하는 그들의 전략 전술이 결과적으로 미칠 수 있는 파괴적인 양상을 소련과 중공의 혁명과정을 통하여 세세하게 설명하는 지점은 역사적이고 학문적인 충실한 이론을 배경으로 제안된다고 생각되어, 이러한 관찰에 대하여는 공감을 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바로 앞에서 제언한 이런 이해의 맥락을 현재 한국사회에 적용하는 과정에서 현재 한국의 권력집단이 마르크시스적인 사회혁명 혹은 전복을 꾀하려고 한다는 혐의를 제기하는데, 이에 대하여는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더욱이 이런 분석을 넘어서서 현 권력집단이 마오쩌뚱의 정치적 선동을 빌려와 청년세대를 자기의 진영으로 끌어들여, 기득권세력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세력 기반을 무력화시키고, 권위를 훼손하여 부모나 학교 교사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꼰대로 돌리고, 공산주의자들의 선동에서 보듯이 성을 기능화 시켜서 양성평등을 넘어 동성애를 고착화시킴으로써 사회질서의 근간을 교란하는 방식으로 인간의 삶을 유물론적인 세계관 아래 가두려는 시도를 전개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인 청년들의 집회에서는 이러한 정책의 끝은 교회를 해제하는 것인데, 그런 조짐이 읽힌다며 교회여 일어나라고 선동을 하는 수준의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특별히 이 마지막 문단에서 전개하는 그의 논점은 두 가지 점에서 시의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첫째로, 현 권력집단이 과연 마르크시스적인 공산혁명을 꾀하고 있는가에 대한 진정성 여부에 의심이 간다는 것이다. 천민적 자본주의에 근거한 민주주의를 추구해온 대한민국이 거의 물신적인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자본에 근거한 갑질을 일삼고 있는 시점에서, 개인의 사회적 기회의 평등이나 과정의 공정성이나 결과의 정의로움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에로의 선회를 꾀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사회의 진보 과정이 아닌가 싶은 마음이 들고, 현재의 권력집단은 어느 정도로 올바르게 그 길을 걷고 있는가에 대하여 일어나는 회의적인 의심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런 길을 향하여 걸음을 내딛고 있지 않은가 싶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운동을 이끄는 인물 가운데서 상당수가 과거 사회주의 관련 서적을 읽고 그런 운동에 전념했던 인물인 것은 어느 정도 감안할 여지가 없지 않으나, 그들이 이미 역사적인 반성을 거치고 있는 낡은 마르크스–레닌–마오이즘식의 사회혁명체제로의 회귀를 꾀한다고 판단하는 것은 매우 시대착오적인 발상이요 역사해석이라고 아니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이 내세우고 있는 역사바로세우기의 과정에서 이승만을 넘어서는 역사적 정통성에로의 몰두는 뚜렷하게 관찰되지만, 이것이 공화적 민주주주의의 길을 포기했다는 사실로 읽히기보다는 권위주의적인 체질을 합리적인 시스템을 구축함으로써 억제하고 보다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에로의 진보를 꾀하려는 것으로 읽고 해석하는 것이 좋을듯하기 때문이다.
▲이정훈 교수(출처: 엘정책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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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로, 이런 이해를 한국교회와 연관시키면서,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기독교적인 관점으로 기획한 인물이 바로 이승만이며, 이승만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을 실현한 진정한 자유민주주의에 기반한 대한민국을 국제사회에 알린 인물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기독교인은 바로 이러한 역사적 관점을 공유하고, 미래의 기독교 대한민국을 세워가야 한다고, 따라서 좌파에 기울어진 현 권력집단에 대하여는 분기탱천하여 반대해야 한다고 젊은이를 일깨우는 강연을 하는 것에 대하여는 실로 걱정스러운 마음이 일지 않을 수 없다. 한편으로, 그의 이런 평가가 어떤 면에서 일리가 있다고 생각되는 지점도 없지 않으나, 다른 한편으로 지금의 변화된 역사적 시점에서 볼 때는 대한민국의 건국 연대를 1919년 3월로 잡고, 남북한의 통일을 기대하는 미래지향적인 한반도 정책을 추구하는 것이 기독교인이 추구해야 할 중요한 가치가 아닐까 싶은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적어도 좌파에 경도된 현 권력집단이 추구하는 바가 기득권세력 7000만 명을 희생시킨 마오쩌뚱의 홍위병혁명과 연결된다는 그의 주장이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이라면, 그리고 천민자본주의적 민주주위에서 평등과 공정과 정의를 추구하는 사회민주주의에로 선회하는 것이 공화제를 포기하지 않는 길을 찾는 과정이라는 것이 더 적절한 역사 이해라면, 기독교는 역사를 보는 눈을 바꾸어 이승만의 공헌과 동시에 그가 살았던 불행한 전쟁 상황에서 벗어나 한반도의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기 위한 가능한 길을 적극적으로 찾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변화하는 세대를 보면서, 또한 68혁명이후 갈라진 백성의 상태를 깊이 인식하면서 불란서에서 이는 대안 찾기의 움직임을 보면서 보다 유연한 세계관을 가지고 공존을 꾀하며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이 서로 대화할 수 있는 분위기를 찾아나서는 것이 기독교적인 삶의 본질을 살려 가는데 더 유익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무엇보다도 기독교는 어떤 의미에서 보면 특정한 어떤 정파적 이해나 혹은 어떤 특정한 사회체제 이해와 자신을 동일시 할 수 없는 공동체가 아니겠는가 싶은 것이다. 체제나 혹은 이념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서 복음이 재생산하는 질서를 구현하기 위하여 애쓸 수 있는 귀한 자리를 선점하고 살아가는 것이 기독교이기 때문이다. 사실 어떤 체제하에서도 기독교는 복음을 따라서 자신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야 할 그런 진리의 종교이기 때문이다. 막스 베버를 통하여, 자본에 기반한 삶의 부조리한 측면을 다시 새롭게 발견하고 배웠던 서구 기독교가 사회적 평등을 지향하는 수정된 자본주의의 길을 찾은 것도, 그리고 그런 기반 위에서 삶을 다시 새롭게 체계화할 수 있었던 것도, 그리하여 네덜란드나 독일이나 스위스 같은 사회가 형성된 것도, 변화화는 시대를 살아가는 대한민국의 기독교가 관심을 기울여 보아야 할 중요한 삶의 미래적 차원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 시대를 살아가는 기독교인의 반성적 사고 가운데 이런 차원이 결여된다는 것은 매우 비극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개인이 하나님 앞에 서는 것과 공동체적인 책무를 다하며 공공의 선을 추구하는 기독교적 공동체가 형성되는 것 사이의 불연속성을 상정하고 후자를 마르크스주의와 동일시하는 이정훈 교수의 주장은 매우 편협한 진영논리에 포로된 것임을 드러내는 하나의 예일 뿐이다. 역으로 어쩌면 마르크스주의자가 그런 공동체를 사도행전 2장에서 보고 배웠을 수 있기 때문이다. 혹여 좌파가 공산주의이고 우파가 자본주의라면, 기독교는 좌도 우도 아닌 공동체라고 말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전자를 무신론으로, 후자를 유신론의 진영으로 단순하게 가르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거나 혹은 지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무신론만큼이나 맘모니즘도 위험하기는 매 한가지이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이 둘 사이의 근원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둘 모두 봉착할 수 있는 위기가 무엇인지를 깊이 비판적으로 숙고하며 자신의 미래적 삶을 기획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한국사회의 시민민주항쟁이라고 할 수 있는 1987년 6월의 정신을 계승한다고 자처하는 세력이 민주당이고, 정치적 자유와 시민적 평등사회의 길을 도모하는 일에 마음을 내준 것이 당시의 백성들이었다고 본다면, 그런 정신을 따라서 평등과 공정과 정의의 가치를 내걸고 그것을 삶의 매우 중요한 출발점으로 인식하는 오늘의 2030세대가 그런 정신을 대체, 계승했다고 생각된다. 그러면 1987년 당시 거리를 메웠던 그들이 오늘의 집권세력이 된 지금 그 정신을 제대로 읽고 정치적으로 대처했는지, 아니면 정치집단으로서 자신의 권력을 다지는 기회로 삼았는지의 분수령이 사실은 “조국사태”를 가로지르는 정신이라고 보고, 민주당은 이미 그러한 정신을 거스르며 자신을 권력화 하는 길로 접어들지 않았는가 싶다. “조국사태”는 조국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1987년의 시대정신을 허무는 기재로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깊이 헤아려야 할 것이다. 개혁을 주체적으로 내세웠던 자들에게서 그 외침이 어떻게 구현되었는지를 비판적으로 숙고하지 않는 정치세력은 스스로를 해체하는 길에 접어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사실 어느 정치세력도 자신의 정체성을 기독교가 제안하는 그런 신적인 공동체와는 동일시될 수 없는 것이 자명하다. 만일 이러한 길이 가능했다면, 천국의 도래를 왜 최종적인 희망으로 상정했겠는가! 사도 바울이 언급했던 이 세대의 정신이 어떤 옷을 입고 나타나더라도 그것은 그 자체로 부단히 극복되어야만 하는 역사적 발전과정의 일환일 뿐, 하나님 나라와 동일시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특정한 체제를 지원하거나 혹은 역사 내의 어떤 한정된 단체를 후원하는 것으로 환원되는 기독교적 선택은 그 자체로 위험천만한 일이다. 오히려 이정훈 교수가 언급하는 자연법사상의 토대를 신중하게 고려하여 분열된 삶의 통합을 꾀하는 칼빈주의나 신칼빈주의가 대안일 수 있거나 혹은 대안적 삶을 찾아가는 중요한 전거가 될 수 있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는 이정훈 교수가 한국의 프로테스탄트교회를 위한 좋은 방향을 선점했다고 보고, 이 방향을 향하여 좀 더 집중된 논의와 제안을 위한 시간을 갖고 “학문적 공”을 들이기를, 그리고 그런 열매와 함께 기독교 대중 앞에 나서기를 바라는 것이다.
유태화 교수 bareunmedia@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