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본 연재는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멸망부터 A.D. 70년 예루살렘 함락에 이르기까지 주요 왕조의 발흥과 쇠퇴를 중심으로 진행할 예정입니다.
정복자 안렉산드로스의 삶은 그리 길지 못했다. B.C. 323년, 그는 삼십 대 초반의 나이로 갑작스레 죽음을 맞이했다. 알렉산드로스가 후계자를 남겨놓지 않은 탓에 왕국은 혼란에 빠졌다. 대왕이 이루어놓은 왕국을 소유하기 위한 전쟁이 벌어졌다.
분열된 왕국
알렉산드로스의 사후 그의 아내 록산나에게서 아들이 태어났지만,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장수들은 록산나와 아들을살해했다. 프톨레마이오스, 카산드로스, 리시마코스, 셀류쿠스는 동맹을 맺고 알렉산더를 뒤이어 통치자가 되려는 안티고누스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프톨레미오스는 애굽, 카산드로스는 마게도니야, 리사마코스는 수리아, 셀류쿠스는 바벨론의 속국들을 중심으로 자리를 잡았다. 요세푸스는 “이들은 서로 세력 확장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았기 때문에 전쟁이 그칠 줄 모르고 계속되었다. 이 통에 도시들은 평온한 날이 없었고 수많은 사람이 비명에 죽어갔다”1)고 전한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죽음(칼 폰 필로티, 188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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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톨레마이오스의 지배를 받게 된 유대인
유대인들은 갈라진 왕국 중에서 먼저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요세푸스는 프톨레마이오스가 예루살렘을 정복하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톨레미(편집자 주: 프톨레마이오스)는 예루살렘도 정복했는데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거짓과 사기를 서슴지 않았다. 그는 안식일에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것처럼 가장하여 예루살렘에 들어온 후에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성을 점령하였다. 유대인들은 방심하고 있다가 대항도 한번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를 의심하지 않은 데도 원인이 있지만 안식일은 안식과 쉼의 날이기 때문에 유대인은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었다. 톨레미는 이렇게 예루살렘을 장악한 후에 잔인한 방법으로 폭정을 휘둘러 댔다.2)
프톨레마이오스는 약 10만 명의 유대인을 예루살렘에서 애굽으로 이주시켰다. 학자들은 이당시 본토에 살고 있는 유대인보다 팔레스타인 테두리 밖에 사는 유대인들이 훨씬 많았을 것으로 본다. 특히 애굽에서는 흩어진 유대인 중 가장 규모 있는 공동체를 형성했을 것이라고 예측한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점차 안정화되기 시작했다. 레이몬드 설버그는 “프톨레미 왕조의 초기는 비록 그들의 개인적인 생활이 비도덕적이고 방탕하였지만 애굽과 기타 속국들에 대하여 절대적이고 무제한의 권력을 행사하는 유능하고 지각있는 통치자들이 있었다. 프톨레미 황조의 통치 동안에 애굽은 헬라세계의 가장 중요한 지적인 중심지 중의 하나가 되었다”3)고 밝힌다.
유대인들은 셀류쿠스 왕조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애굽에서 몰아내고 그들의 치하를 받기까지 약 120년간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고 문화를 지킬 수 있었다. 하지만 두 왕조 사이의 전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70인역의 탄생
70인역이란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성경이다. 70인역에 대한 작업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두 번째 왕인 프톨레마이오스의 2세 때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이루어졌다고 알려지는데, 이스라엘 12지파에서 6명씩 선정된 72명의 번역자가 작업을 했다고 한다. 70을 의미하는 라틴어 셉투아진트라고 불리기도 하고, 수비법에 따라 LXX(50+10+10로 불리기도 한다.4)
70인역은 초대교회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헬라 문화권에서 살게 된 유대인들은 점차 히브리어를 잊어갔다. 때문에 1세기는 유대인조차 특별한 교육을 받지 못한 경우 히브리어를 알지 못했던 시대였다. 초대교회의 많은 구성원이었던 이방인들은 당연히 히브리어를 몰랐다. 만약 70인역이 없었더라면 다수의 사람이 구약성경을 읽거나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1) 요세푸스, 『요세푸스Ⅱ: 유대고대사』(생명의말씀사, 2006), 63.
2) 같은 책, 63-64.
3) 레이몬드 설버그, 『신구약 중간사』(기독교문서선교회, 2004), 29.
4) 70인역의 번역 동기와 배경에 대해서는 아리스테아스의 편지에 의존하는데, 이 기록의 신빙성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조믿음 기자 bareunmedia@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