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중간사(3)_바벨론의 몰락과 페르시아 치하의 유대인 포로 귀환

편집자 주본 연재는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멸망부터 A.D. 70년 예루살렘 함락에 이르기까지 주요 왕조의 발흥과 쇠퇴를 중심으로 진행할 예정입니다.

 

신구약 중간사(3)_바벨론의 몰락과 페르시아 치하의 유대인 포로 귀환

  

앗수르와 애굽을 누르고 패권을 차지한 바벨론은 제국을 한 세기도 유지하지 못했다바벨론의 강력한 지도자 느부갓네살의 퇴장은 왕좌를 탐하는 이들의 죽고 죽이는 피바람을 불러왔다.

바벨론의 불안한 국내 정세

느부갓네살 사후 7년 동안 바벨론의 왕은 세 번이나 바뀌었다느부갓네살의 아들 아멜 마르둑(성경에는 에윌므로닥으로 기록)은 왕위에 오른 지 2년 만에 매부인 네르갈 사르 우슬에게 살해된다네르갈 사르 우슬의 통치도 길지 못했다그는 4년 만에 죽게 되는 데 뒤이어 성인이 되지 않은 아들 라바시 마르둑이 왕좌에 오른다미성년자 왕은 단 몇 개월 만에 반대파에 의해 숙청당한다라바시 마르둑을 제거한 이는 아람계 귀족 가문의 나보니두스였다.1) 왕권은 이제 느부갓네살 가문에서 새로운 가문으로 넘어갔다.

종교를 둘러싼 갈등

왕이 된 나보니두스는 바벨론에 종교 갈등을 불러왔다자신의 어머니가 숭배하는 달의 신인 신(sin)을 섬기는 신전을 세웠다느부갓네살 때부터 마르둑(편집자 주태양의 아들이라는 뜻)을 바벨론의 수호신으로 믿던 바벨론인들은 새로운 신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특히 마르둑 제사장들은 나보니두스를 미워하기 시작했다.

종교 문제는 나라를 파국으로 치닫게 했다나보니두스는 종교 생활을 위해 거처를 옮기고 그의 아들 벧 사르 우슬(성경에는 벨사살로 기록)에게 통치권을 넘겨버렸다문제는 바벨론에서 매년 열리는 신년 축제인 아키투가 나보니두스의 부재로 중단되었다는 점이다아키투는 바벨론인들에게 굉장히 중요한 의식이었다아키투의 중단은 나보니두스가 민심을 잃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나보니두스는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바벨론으로 돌아왔지만 그가 순탄하게 바벨론을 다스릴 수 있는 상황은 지나버렸다존 브라이트는 바벨론은 사분오열되어 일개 지방 국가로 전락하였고 국가의 위기사태에 대처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2)라고 전한다.

고레스의 등장과 바벨론의 몰락

바벨론의 위협이 되는 존재는 이란 북서부에 자리했던 고대국가 메디아였다(성경에는 메대라고 기록). 이들은 바벨론의 땅을 호시탐탐 노렸고 두 국가는 간헐적으로 충돌했다그런데 페르시아(성경에는 바사라고 기록)에 고레스(키루스 2)라는 강력한 지도자가 등장했다고레스는 메디아를 장악하고 근방의 국가들을 빠른 속도로 자신의 발아래 두기 시작했다.

나보니두스는 고레스를 겁내어 이집트리디아와 동맹을 맺지만 고레스는 리디아를 순식간에 제압했다고레스는 바로 바벨론을 치지 않고 다른 쪽으로 영토를 확장했고 이전의 어느 나라보다 훨씬 거대한 제국을 창건”3)했다.

고레스는 바벨론으로 진격해왔다혼란한 바벨론은 고레스를 막을 힘이 없었다엘람 지방의 바벨론 장군 고브리아스는 고레스에게 투항한 뒤 고국에 칼을 들이밀었다.4) 나보니두스는 사력을 다해 바벨론을 지키려 했지만 때는 늦었다. B.C. 539고레스는 손쉽게 바벨론으로 입성했다.

한편고레스는 메디아의 왕 아스티아게스의 외손자였다아스티아게스는 자신의 딸 만다네가 많은 양을 오줌을 누어 도시와 아시아가 잠기는 꿈을 꾼다마고스(편집자 주메디아의 사제)들의 해몽을 듣고 겁이 난 아스티아게스는 만다네를 페르시아인과 결혼시켜 페르시아로 보낸다만다네를 보낸 첫 해 아스티아게스는 만다네의 생식기에서 포도나무 한 그루가 자라 아시아를 뒤덮는 꿈을 꾼다아스키아게스는 만다네를 메디아로 불러들이고 심복 하르파고스에게 만다네가 자식을 낳으면 죽이라고 명령한다하지만 하르파고스는 아이를 살리게 되는데 그가 바로 고레스였다.5)

고레스의 관용정책

고레스의 정책은 피지배층을 강하게 억압하던 앗수르나 바벨론과는 달랐다고레스는 일찍이 바벨론으로 붙잡혀온 민족들을 고국으로 돌려보내고그들의 종교도 인정했다특히 마르둑을 섬기는 제사에 참석해 바벨론인들로 부터 지지를 이끌어냈다.

 

▲고레스의 무덤. 고레스는 파르스에 제국의 수도인 파사르가대(현재의 이란)를 세웠다.
현재 남아있는 유적들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록되었다(출처: 위키피디아).

  

폴 존슨은 고레스 통치 아래 페르시아 제국에서는 아사리아나 바빌로니아 제국과 전혀 다른 종교 정책이 발전했다페르시아 제국의 권위를 받아들이기만 하면피복민이 민족 고유의 종교 신념을 추구하는 것을 기꺼이 허락했다”6)라고 페르시아의 정책을 전했다게오르크 포어러는 굴복당한 이방민족들의 운명이 행복할수록 그들의 운명은 더 만족을 누린다는 관점이다억압보다 더 저항을 일깨우게 하는 것이 없으며회유 이외에 어느 것도 그런 저항을 제거할 수 없다”7)는 고레스의 원칙을 소개했다고레스는 각 나라의 독립을 허락하지는 않았지만 군주를 두고 행정 책임을 맡기는 등 당시로써는 파격적인 정책을 펼쳤다고레스의 정책은 페르시아 치하의 국가들의 결속력을 높이며 성공을 거뒀다.

포로귀환

하나님은 고레스의 탄생 150년 전에 이사야를 통해 고레스의 등장을 말씀하셨고(사 45:18)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생활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올 것을 알려주셨다(렘 29:414). 고레스는 이스라엘 백성의 귀환을 허락했고 성전을 건축하도록 배려했다(대하 36:2223).

이스라엘은 바벨론으로부터 세 차례에 거쳐 포로로 끌려가는데귀환 역시 세 차례에 거쳐 이루어진다(편집자 주유대인 역사가 폴 존슨은 스룹바벨 이전 예루살렘 재건 사업을 맡은 여호야긴의 아들 세스바살(세낫살)의 귀환을 1차 귀환으로 보고 스룹바벨을 2에스라를 3느헤미야를 4차 귀환으로 본다.).

B.C. 537년 스룹바벨학개스가랴 등이 중심이 된 1차 귀환을 시작으로 B.C. 458에스라를 중심으로 한 2차 귀환이 B.C. 445년에는 느헤미야를 중심으로 한 3차 귀환이 이루어진다페르시아 즉 옛 바벨론 땅에 남아있기를 자처한 이도 많았다고국에 대한 열망이 적은 바벨론 포로 2세대들은 굳이 황폐한 땅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았다.

한편, ‘유대인은 구약에 등장하지 않는 단어다바벨론이 유다 땅에서 붙잡아온 사람들을 다른 나라의 포로와 구분하기 위해 사용한 명칭이었다바벨론 포로기 부터 유대인은 특정 지역에서 통일된 사상과 관습을 가지고 살아가는 공동체로 보기 어려워졌다시간이 지날수록 이스라엘 밖 유대인은 증가했다이들을 흔히 디아스포라’(그리스어로 흩어진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이스라엘을 떠난 유대인들을 통칭하는 말)라고 부른다.

1) 존 브라이트『이스라엘의 역사』(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3), 483.

2) 같은 책 484.

3) 같은 책 485.

4) 같은 책 493.

5) 헤로도토스『역사』(, 2009), 93-94.

6) 폴 존슨『유대인의 역사』(포이에마, 2014), 151-152.

7) 게오르크 포어러『이스라엘 역사』(성광문화사, 21986), 264. 

조믿음 기자 jogog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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