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곤주 목사의 로마서 핵심 요약(1)
바울과 로마서
바울은 주후 1년경 헬라문화권의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났고, 태어난 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은 베냐민 지파의 정통 유대인이며,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율법을 배운 정통 율법학자였습니다(행22:3; 빌3:5). 그는 한때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고 스데반 집사를 돌려 쳐 죽이는 일에도 가담했지만(행7:54〜8:1),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신앙의 변화를 경험하고(행9:6〜9) 그리스도의 증인이 됩니다(행9:15-16; 22:14〜15).
▲ 김곤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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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기록한 로마서는 A.D. 55〜58년경 (혹은 57〜58년으로 추정), 제3차 선교 여행을 하는 동안 고린도에서 기록된 것으로 추정 됩니다(cf.행20:1〜3; 롬16:1, 23; 고전 1:14; 딤후4:20). 이 로마서를 기록한 목적은 크게 목회적 동기와 선교적 동기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목회적 동기는 로마에 있던 교회 신자들이 확고하게 복음에 뿌리를 내리고 바른 기독교 교리와 실천적인 신앙생활로 성숙한 신앙인이 되도록 하기 위함을 말합니다(롬1:8〜15).
더 나아가서, 로마교회는 유대인 크리스천들과 이방인 크리스천들 간의 갈등문제가 있었습니다. 로마교회는 A.D. 49년에 로마정부에 의해서 행해졌던 유대인 추방령 이후, 이방인 신자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로마서 11장과 14:1〜15:13절은 이러한 두 그룹의 갈등에 대한 실제적인 권면과 조언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한 두 번째 이유는 선교적인 동기입니다(롬15:22〜29). 그래서 바울은 멀리 서바나로 즉 지금의 스페인으로 복음을 전하러 가려는 선교 계획을 가지고 있음을 밝히면서 ‘먼저 너희를 만나서 교제의 기쁨을 나누고, 또 너희들의 후원을 받아서 스페인에서 선교하기를 원한다’고 15장 24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선교계획에 앞서서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는데 예루살렘 교회가 가뭄으로 인해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했기 때문에 그 동안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의 교회들로부터 모금한 구제헌금을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하는 것이었습니다(15:25-26). 이러한 헌금전달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구제의 의미도 있지만, 동시에 유대인 크리스천들과 이방인 크리스천들이 믿음 안에서 한 가족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연합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었고, 그 결과 사도바울의 선교에 있어서 예루살렘 교회의 지속적인 신뢰와 후원의 관계를 유지하는데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었기 때문에 아주 중요한 사안이었습니다. 따라서 예루살렘 교회의 신자들을 돕기 위해 연보(헌금)을 전달하려는 바울의 계획은 목회적 동기와 선교적 동기가 함께 어우러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서와 복음(롬1∼3장)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고,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롬1:1〜2)이라고 소개합니다. 하나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본질상 같지만, 그 복음의 내용과 범위에 있어서는 다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은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가 창세기로 부터 시작해서 예수님이 오시기까지의 구원의 전 경륜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하나님의 복음은 이 땅에서 이루어져 가는 하나님의 나라 (통치)와 장차 이루어질 종말론적 하나님의 나라(통치)라는 큰 주제를 포함합니다.
따라서 복음을 단순히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믿음으로 얻는 영생’이라는 좁은 의미로 한정해서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기초이긴 하지만, 이러한 복음의 기초가 복음의 전부인 양 강조되면 문제가 됩니다. 그러한 가르침은 결국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하여 신자들이 긍정적인 사고와 적극적인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하기보다는 이 세상에 대하여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신앙관을 심어줄 수 있고 결국 천국 가는 것만이 신자의 유일한 목적으로 알고 살아가는 건전하지 못한 신앙관을 형성하기 쉽습니다. 이것이 ‘죄–십자가–구원–영생’ 이라는 지극히 좁은 복음에 대한 이해가 복음의 전부인양 가르치고 강조하는 ‘십자가 복음주의’의 치명적인 약점입니다.
더 나아가서, 복음의 내용을 예수님의 십자가와 구원이라는 좁은 의미로만 한정해서 이해할 경우, 성경이 가르치는 풍부하고 다양한 진리들을 무시해 버리기 쉽습니다. 그러면서, 성경에서 말씀하신 명령의 말씀들은 단지 도덕적 교훈이나 율법적인 행위에 속한 말씀으로 간주하고 쉽게 무시하면서, 성경의 내용은 ‘죄–십자가–구원–영생’이라는 주제로 일관된 책이라고 확신하고, 이 진리만 제대로 깨달으면 된다는 식으로 성경 전체를 억지 해석(혹은 영적해석이나 알레고리적 해석)을 하는 경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신자가 구원받고 천국 가는 점만 강조함으로서 구원 그 이후의 삶에 대한 거룩함(성화)을 향한 의지적 노력을 배제시키고 율법과 복음을 오직 반대적인 개념의 의미로만 이해하고 가르치는 것은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씀하고 있는 복음에 대한 심각한 오해가 아닐 수 있습니다.
바울은 1장에서 원대한 하나님의 복음에 대해서 말씀하면서 로마서 전반부(1〜8장, 혹은 1〜11장)의 교리적인 내용뿐만 아니라, 로마서의 후반부에서 가르치는 윤리적인 실천명령 (12〜16장) 전체를 하나님의 복음으로 가르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이 복음을 받아들인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믿어 순종하게 되었다’고 1장 5절에서 말씀하고 있는데, 이 말의 의미는 ‘진정한 믿음은 순종을 동반한다’는 것입니다(faith that consists of obedience: NIV).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의 마지막장에 가서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롬16:26) 라는 말을 하면서 ‘같은 표현’(ὑπακοὴν πίστεως)을 반복해서 진정한 믿음이 어떠한 것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사도 바울은 로마서를 통하여 철저하게 믿음을 강조하지만, 그 믿음은 순종의 행위를 동반하는 믿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신자가 성령 안에 거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참된 신자의 삶을 살아가야 함을 의미합니다(롬8:3〜4).
이러한 복음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측면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공의(정의)입니다. 하나님은 사랑과 용서의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의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한량없이 사랑하지만 동시에 죄는 결코 용납하지 않으시고 심판하시는 심판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공의를 완성시킨 사건이 십자가의 사건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의로운 자’로 여기시고 구원을 베풀어 주십니다. 이것이 ‘인간의 의’와는 전혀 다른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그 하나님의 의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을 ‘의의 전가’라고 합니다. 우리의 죄는 예수님에게 전가 되어 우리 대신 죄의 형벌을 받으셨고, 그 결과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전가 되었다고 믿는 것이 전가교리입니다(롬1:16〜17; 3:21〜26).
이러한 의미에서 로마서 1장 17절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의’는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즉 ‘하나님의 의’ (롬1:17)는 하나님 자신이 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소유하신 ‘하나님의 의’요,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해 주시는 ‘법정적 의미’에서 ‘하나님의 의’요, ‘구원의 행위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의’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는 관계적 의미에서 ‘하나님의 의’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의’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받아들이게 될 때 하나님은 죄인을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는 사건을 ‘칭의’(Justification)라고 말합니다. 이 칭의는 법정적 선언이라는 점에서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동시에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님의 의가 회복되는데 한 평생이 필요하기에, 칭의와 성화는 평생의 과정인 동시에 종말론적입니다.
이러한 전통적 칭의론을 부정한 새관점(New Perspective)은 바울 서신에 나타난 ‘이신칭의’를 ‘전가적 의’라는 구속사적 관점이 아닌 교회론적 관점에서 이해합니다. 다시 말해서, 새관점을 대표하는 톰라이트에 의하면, 칭의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일원이 되었다’는 선언이고, 따라서 ‘의의 전가’라는 전통적 칭의 교리는 성경적 근거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바울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상관없이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고 선을 행한다면 그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을 것’이라고 2장 8-10절에서 말씀합니다 (롬2: 8-10). 이 말씀은 믿음과 행위가 똑같이 구원의 조건이 되는 것으로 오해 할수 있는 본문이지만, 바울은 자신의 행위를 의롭게 여기는 유대인들을 향해서 말하고 있다는 문맥을 따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2장 14〜16절의 내용을 보면 율법 없는 이방인도 자신의 양심 (마음에 새긴 율법)의 따라 살아간다고 하면서, 모든 사람들의 심판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심판은 믿음에 근거한 심판이요, 그 믿음은 순종의 행위가 동반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 정죄함이 없는 이유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 때문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신자들 안에 내주하신 성령께서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cf.롬8:1〜4)
또한, 바울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롬3:23)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이르지 못했다”는 말은 헬라어로 “결여되다” 또는 “부족하다”는 의미입니다. 즉 성경이 말하는 죄는 아담의 타락 이후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되어 있고,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이 결여되어 있는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죄인들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셨습니다(롬3:24). 이렇게 하나님이 죄인을 의롭다고 인정해 주는 데는 두 가지 원리가 있는데, ‘구속의 원리’와 제물의 원리’입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 때문입니다. 여기서 “구속” (redemption)이란 “값을 주고 꺼내온다” 또는 “값을 주고 풀어준다”는 말입니다. 즉 몸값을 대신 지불해주어서 자신의 형제가 종이 되지 않도록 구해내는 것 혹은 풀어주는 것을 “구속”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고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모든 죄의 대가를 지불해 주셨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가리켜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이라고 말씀합니다.
두 번째는 ‘피 제사를 통한 대속의 원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죄를 지을 때마다 자신의 생명을 대신하는 짐승의 피를 흘리는 제사로 죄의 용서를 받아야만 했습니다(레17:11; 신12:13). 이 불완전한 희생 제사는 예수님 자신을 드리는 완전한 제사로 십자가에서 완성되었습니다. 그 결과 우리들이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시고, 의롭다고 선언 하신 후에는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나 구원을 얻게 하심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롬3:27〜31; 요3:16; 롬5:8〜9).
김곤주 목사는 안양대 (B.A) 및 안양대 신대원(M.Div) 을 졸업한 이후, 호주(Australia) 몰링 학교(Morling College)와 무어 신학교(Moore College)에서 각각 성경신학 석사과정 (MA in Theology)을 졸업 했다. 코람데오 신학교(CoramDeo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약학을 가르쳤고, 현재는 호주 시드니 새언약 교회 담임으로, 필리핀 세부 연합 신학교 (Subu Union Theological College) 교수로 사역 중 이다. 저서로는 『 원문 중심의 이야기 로마서 』 (세움북스)가 있다.
김곤주 목사 bareunmedia@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