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역할 강조에 집중한 칭의론들_박재은 박사의 칭의 바르게 이해하기(3)
1. 들어가는 말
시소게임(a seesaw game)은 작용과 반작용의 이야기이다. 한쪽이 내려가면(즉 작용하면) 다른 한쪽이 올라가고, 올라간 쪽이 다시 내려가면(즉 반작용하면) 또 다른 쪽이 다시 올라간다. 지난 회부터 칭의론의 역사를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역할”이라는 큰 두 축을 중심으로 고찰하고 있다.
▲ 박재은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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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회에서는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한 칭의론 가운데서 반율법주의 칭의론, 하이퍼 칼빈주의 칭의론, 영원 칭의론 등을 살펴보았다. 이러한 칭의론들은 하나님의 주권“만”을 지극히 높인 사상들로서 시소게임 안에서 볼 때 한 쪽만 지나치게 올라가 있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또 다른 축인 인간의 역할 강조에 집중한 칭의론들이 반대 논리로 고개를 들게 된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역할이라는 치열한 시소게임에서 서로 결정적 주도권을 잡으려고 최선을 다하여 경기에 임하는 모습이 여과 없이 드러나는 것이 바로 칭의론 교리사의 민낯이다.
지금부터 칭의의 영역 내에서 인간의 역할이 꽤 중대한(혹은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칭의론들을 살펴볼 것이다. 물론 칭의 속에서 인간의 역할은 중요하다. 칭의는 “믿음”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갈 2:16). 그러나 만약 이신칭의(以信稱義, 믿음으로서 의롭다 칭함을 받는다) 원리가 하나님의 주권을 약화시키거나 혹은 하나님의 주권보다 더 강력한 주도권을 칭의의 방정식 안에서 갖게 된다면, 이는 “믿음을 통해서”가 아닌 인간의 “믿음 때문에” 혹은 인간의 “믿는 행위 덕분에” 혹은 더 나아가서 인간의 “순종 행위 때문에” 칭의가 이루어진다는 교묘한 논리로 흐르게 될 위험성을 내포하게 된다. 지금부터 살펴볼 아르미니우스주의, 로마 가톨릭, 페더럴 비전 칭의론이 바로 이러한 위험성에 노출되어있다.
2. 아르미니우스주의 칭의론
아르미니우스주의(Arminianism)란 네덜란드 신학자였던 야코부스 아르미니우스(Jacobus Arminius, 1559/60-1609)가 설파한 교리를 따르는 일련의 신학사상을 뜻한다.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전통적 칼빈주의 사상에 대항하여 날카로운 신학적 대립각을 세운 것으로 유명하다. 최대한 단순화하여 설명하자면 전통 개혁신학은 전적 타락(total depravity, 타락 후 인간은 전적 부패, 전적 무능력하다),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창세전부터 하나님은 어떠한 조건 없이 구원 받을 자를 선택하셨다), 제한 속죄(limited atonement,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은 오직 택자들을 위한 것이다),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 그 누구도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를 거부할 수 없다),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자신의 믿음을 끝까지 지키고 인내할 수 있는 힘을 허락하신다) 등을 주장한다. 이에 반해 아르미니우스주의는 부분적 타락(partial depravity, 타락 후 인간도 여전히 자연적 능력, 자유선택 의지가 존재한다), 조건적 선택(conditional election, 하나님께서 인간이 믿을지 혹은 안 믿을지를 미리 아시고[예지] 이에 근거해 선택 한다), 보편 속죄(universal atonement, 그리스도가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죽으셨지만, 자신의 자유의지로 그리스도를 믿기로 선택한 자만 구원 받는다), 가항력적 은혜(resistible grace,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를 거부할 수 있는 선택을 할 수 있다), 구원의 탈락 가능성(possibility of secession from salvation, 받은 구원을 상실할 수 있다) 등을 대항논리로 주장한다.
결국 아르미니우스주의 논리 가운데 거하는 “인간”은 타락 후에도 자유선택의 능력이 여전히 생생히 살아있는 인간이다.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구원을 받을 수도 혹은 받지 않을 수도 있는 꽤 능력이 출중한 인간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뒷자리를 돌아보고 혹시라도 하나님의 은혜에 반하는 행동을 했다면 이미 받은 구원을 상실할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인해 늘 불안에 사로잡힌 인간이다. 그러나 일단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를 걷어차지 않고 “받아 누리는 선택”을 한다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선택”을 한다면, 또한 받은 구원을 상실하지 않도록 지속적인 “믿음의 선택”들을 해 나간다면 드디어 고대하던 구원의 최종 역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에 결국 이러한 구원은 “인간의 선택”으로 이루어지는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구원이 될 가능성이 농후해진다. 이 점이 아르미니우스주의의 문제였다. 칭의 역시 인간의 “믿는 선택”이 꽤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하므로 마치 칭의의 조건을 인간의 행위로 전락시켜버린 사상이 아르미니우스주의가 설파한 인간 중심주의적 칭의론이었다(과연 “인간의 믿음”은 칭의의 영역 가운데서 어떻게 작용하는 것이 바른 것인가에 대해서는 추후 연재를 통해 차근차근 살펴볼 것이다).
3. 로마 가톨릭 칭의론(=의화론)
2017년 올해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해이다. 종교개혁은 기본적으로 중세 로마 가톨릭 신학에 저항하여 촉발되었다. 로마 가톨릭 칭의론은 의화론(義化論)으로 표기하는 것이 더 어울린다. 종교개혁 신학의 칭의론은 “법정적 칭의” 개념을 염두하고 전개한다(법정적 칭의에 대해서는 다음 회에 “법적 선언으로서의 칭의”라는 제목으로 더 구체적으로 다룰 것이다). 즉 “죄인이 실제로 의로운 자가 된다”라는 개념보다는 비록 여전히 죄인이지만 그리스도의 온전한 의로움(perfect righteousness)의 전가(imputation)를 통해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법적으로 “죄인을 의인으로 칭하고, 여겨 주고, 일컬어 주는 것”이다. 하지만 로마 가톨릭 칭의론은 죄인을 의인으로 칭하는 것을 뛰어넘어, 실제적으로 죄인이 의인으로 변화 될 뿐만 아니라(그러므로 의화), 하나님의 은총으로 내적 갱신이 되어 성화를 통해 실효적으로 내적 쇄신이 되는 것까지를 포함한다. 그러므로 로마 가톨릭 의화론은 칭의 개념과 성화 개념이 교묘히 섞여 있는 관점이다.
로마 가톨릭 의화론을 인간의 역할을 강조한 칭의론으로 분류하여 위치시킨 이유는 바로 로마 가톨릭 신학이 가지고 있는 인간론 때문이다. 앞에서 살펴보았지만 개혁신학 전통에서는 타락 후 인간을 “전적 타락한” 인간으로 본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 신학에서는 타락 후 인간을 전적 타락한 인간으로 보기보다는 “부분 박탈한”(partially deprived) 인간 정도로 본다. 무엇을 부분적으로 박탈당한 것일까? 로마 가톨릭 신학에 의하면 하나님은 인간 창조 시 인간에게 두 가지를 주셨는데 첫 번째는 자연적 의(iustitia naturalis)이고 두 번째는 “초자연적 선물”(dona supernaturalia)이다. 자연적 의는 인간의 이성과 지성이 핵심적으로 포함된다. 하지만 자연적 의로는 인간의 저급한 육욕(concupiscentia, 욕정, 분노, 탐욕, 정욕 등)을 제어하기 힘들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초자연적 선물을 주셔서 이를 제어하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자연적 의에 더해서 초자연적 선물을 주셨기 때문에 이를 “덧붙여진 선물”(donum superadditum)이라고도 불린다. 로마 가톨릭 신학에서는 타락 후 바로 이 덧붙여진 선물 즉 초자연적 선물“만”을 박탈 당했다고 가르친다. 여기서 핵심적인 것은 비록 덧붙여진 선물은 타락으로 박탈 당했지만 “여전히 자연적 의는 존재 한다”는 점이다. 여전히 자연적 의는 존재하므로 인간은 이 능력을 여지없이 쓸 수 있다. 칭의론의 영역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칭의(즉 의화)를 위해 인간은 자연적 의를 사용해야 한다.
그러므로 로마 가톨릭 의화론에서는 의롭게 되기 위해 인간이 자연적 의를 사용하여 미리 준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를 “선행 준비”(prevenient preparation)라고 한다. 선행 준비는 미리 의지(voluntas)를 움직이고, 미리 성향(habitus)을 갖추는 것이 핵심이다. 미리 의지와 성향을 갖춘 자들에게 하나님의 의화 은총이 임하기 때문에, 의지와 성향을 미리 갖춘 자들은 의화 됨에 있어 스스로의 “공로”가 생겨난다. 공로주의가 싹 틀 수 있는 공간이 생겨나는 것이다. 로마 가톨릭 의화론은 하나님의 의화 은총과 인간의 선행 준비 공로가 함께 일하는 신인(神人) 협동 구조이며, 기껏해야 부분 박탈 당한 타락 후 인간이 자유롭게 의지와 성향을 가지고 구원을 만들어가는 구조이므로 반(半)펠라기우스주의적 형태를 지닌다. 즉 인간의 역할이 꽤 결정적으로 작용하는 칭의론의 구조를 로마 가톨릭 의화론 안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4. 페더럴 비전 칭의론(혹은 셰퍼디즘 칭의론)
이제 논의의 장을 현대로 돌려보자. 2002년 1월에 미국 루이지애나 주 몬로라는 도시에 위치한 어반 애비뉴 장로교회(Auburn Avenue Presbyterian Church)에서 “페더럴 비전: 개혁주의 언약사상에 대한 고찰”이라는 주제로 목회자 컨퍼런스가 열렸다. 이 컨퍼런스 제목을 따서 이들의 사상을 “페더럴 비전”(Federal Vision) 신학으로 부른다. 혹자는 컨퍼런스가 열렸던 거리 이름을 따서 “어반 애비뉴 신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페더럴 비전 신학은 짧은 지면 안에 다 담기 어려운 방대한 논의이므로 지금부터는 노만 셰퍼드(Norman Shepherd)의 신학 사상에만 집중해 논의를 진행하도록 하겠다. 셰퍼드는 필라델피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조직신학 교수였는데 그가 전개한 칭의론이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어 학교로부터 면직을 당한 인물이다. 셰퍼드는 페더럴 비전 신학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기 때문에 페더럴 비전 신학을 또 다른 용어로 “셰퍼디즘”(Shepherdism)으로도 불린다.
셰퍼드는 2000년에 출간 된 그의 책 『은혜의 부르심』(The Call of Grace)에서 “믿음, 회개, 순종, 인내는 새 언약의 복을 향유하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조건’”(Shepherd, The Call of Grace, p. 50)이라고 주장했다. 이 주장이 신학적으로 큰 문제가 되어 수없이 많은 논쟁들을 양산했다. 이 논쟁의 핵심은 셰퍼드가 이해하는 “칭의를 불러 일으키는 믿음”의 성격이 무엇인가에 방점이 찍혀 있다. 셰퍼드의 주장은 칭의를 위한 믿음은 “순종하는 믿음”(obedient faith)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순종하는 믿음이야말로 칭의의 “조건”이라고 설파했다. 이는 결국 “칭의”와 “선행” 사이의 관계 문제이다. 즉 행위(순종이든, 인내든, 회개든)를 해야 칭의 되는 것인가 아니면 칭의 된 사람이라면 행위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가의 문제다. 셰퍼드는 전자를 받아들였다. 인간의 순종하는 믿음을 통해(혹은 “순종하는 믿음 때문에”) 죄인이 의롭게 되는 칭의 사건이 비로소 성취된다고 가르쳤다. 곧 인간의 순종하는 행위가 칭의의 방정식에서 “조건”으로 작용해 인간이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하는 구조를 만들어 버렸다. 이것이 바로 셰퍼디즘 칭의론의 문제였다.
5. 나가는 말
지금까지 칭의의 영역에서 인간의 역할이 강조된 칭의론들을 아르미니우스주의, 로마 가톨릭, 페더럴 비전(셰퍼디즘) 칭의론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이러한 칭의론들은 지난 회에서 살펴본 반율법주의, 하이퍼 칼빈주의, 영원 칭의론과는 완전히 반대의 대척점에 서서 하나님의 주권을 약화시키고 인간의 역할을 강조했던 칭의론들이다. 글의 서두에서 밝혔지만 마치 시소게임과 같다. 아르미니우스주의, 로마 가톨릭 칭의론의 반대 논리로 반율법주의, 하이퍼 칼빈주의 칭의론이 탄생했기 때문이다. 이 치열한 시소게임은 현대 속에서도 그 명맥이 끊어지지 않고 있다. 이 점을 페더럴 비전 칭의론이 웅변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2회에 걸쳐 바라본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역할/책임 사이에서의 칭의론의 역사는 불균형의 전쟁터였다. 하나님의 주권만 지나치게 강조되거나 아니면 인간의 역할이 상대적으로 더 강조되는 경향성이 짙어왔다. 이제는 균형을 잡아야 한다. 다음 회부터는 총 4회에 걸쳐 다시 균형 잡는 작업을 할 것이다. 이 작업을 위해서는 칭의란 정확히 무엇인가(4회: 법적 선언으로서의 칭의), 칭의의 영역 내에서 인간의 역할을 무엇인가(5회: 인간의 역할), 인간은 여전히 죄인인가 의인인가(6회: 과거, 현재, 미래의 죄는 모두 사해졌는가), 믿음과 칭의의 관계(7회 최종회) 등의 주제를 정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 칭의 사건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 역시 칭의의 영역 내에서 할 역할이 분명 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이 미묘한 주도권 논쟁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바른 지도(map)를 가지고 이 험난한 여정을 떠날 필요가 있다. 이것이 바로 본고의 존재 이유이다.
편집자 주: 필자 박재은 박사는 미국 칼빈 신학교에서 조직전공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현재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조직신학을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 『칭의, 균형 있게 이해하기』(부흥과개혁사), 『성화, 균형 있게 이해하기』(부흥과개혁사)가 있다.
박재은 박사 jepark.theopneustos@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