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 시대에도 신비주의가 있는가? 그렇다! 아니 오히려 포스트모던 시대를 맞아 단순 소박(?)한 신비주의는 다양한 신비주의로 분화하고 있다. 기독교는 성경 계시에 따른 초월의 창조와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신비한 종교”이다. 하지만 “기독교 신비주의”는 그 신비를 초월한다는 점에서 “유사 기독교”에 속한다 할 수 있다. <성경적 창조론과 신론> 안에서 과학시대의 신비주의는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조덕영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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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지주의 속 신비주의
영지주의의 발생
영지주의(靈知主義, Gnosticism)는 헬라어로 ‘지식’, ‘앎’ 등의 뜻을 가진 “그노시스”에서 비롯된 용어이다. 영지주의는 일종의 우주론적 이원론으로 우주는 영적 세계와 악한 물질세계로 구분되며 사람은 그리스도를 믿거나 여타 종교를 통해 구원받는 게 아니라, 신비한 지식을 통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본다. 그 특별한 비법, 특별한 지식을 바로 영지(그노시스)라고 부른다.
영지주의가 언제 어떻게 발생하였는가에 대해서는 아직 일치된 견해가 없다. 기독교와 무관한 종교 현상이라는 설과 유대교 이단이나 유대교 이탈 집단이라는 설 등이 있으나 그랜트(R. M Grant)는 영지주의가 주후 70년 로마인들이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후 전통적 종교적 관념들(유대적 관점과 기독교적관점들)이 철저히 파괴된 데 대한 반응으로 생겨났다고 보았다. 반면에 영지주의를 신비적 체험에 대한 글을 담고 있는 일련의 운동으로 본 사람은 영국 학자 도드(E. R. Dodds)였다. 예루살렘 히브리대의 유대 신비주의 학자 게르솜 스콜렘(G. C. Scholem)은 유대적 영지주의가 신비적 명상과 실천을 포함하고 있다는 도드의 견해에 동의한다.
영지주의가 기독교 이단인 이유
자유주의 신학자 하르낙이 <교리의 역사>(History of Dogma)에서 영지주의자들을 최초의 신학자라고 부른 반면, 성경은 사도 베드로와 사도 바울의 일련의 글들과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한 자들이 있음을 사도 요한이 언급(요일 2:22; 4:2,3)하는 것으로 보아 기독교 초기 사도들에게 있어 영지주의는 골칫거리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영지주의에 대한 자료들은 순교자 저스틴, 이레네우스, 히폴리투스, 터툴리안,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오리겐, 키프로스 살라미스의 에피파니우스(315경-403) 등의 저서에도 나타나고 있다. 특별히 이레네우스의 『이단 논박』(Adversus Haereses)에 잘 나타나 있다. 초대교회 훌륭한 교부였던 이레네우스(Irenaeus)는 소아시아 태생으로 이단 논박은 그가 거의 10년간에 걸쳐 썼던 책으로 모두 5권으로 되어있다. 그는 성경과 아울러 헬라 철학과 문학에도 조예가 깊은 인물로 특별히 사도 요한의 제자인 폴리캅이 그의 스승이었다. 그가 영지주의의 위험성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는 것은 그만큼 사도 시대로부터 영지주의가 기독교에게는 위험한 종교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래서 잉게(Dean Inge)는 “영지주의는 익기도 전에 썩어버렸다”라고 했던 것이다.
교부들은 마술을 행한 사람으로 묘사하는 사마리아의 시몬(Simon Magus, 사도행전 8장)을 최초의 영지주의자로 간주한다. 그는 스스로 신이라 칭한 사람이었다. 불트만은 요한복음이 만다야교의 것들과 유사한 전승들을 실은 초기 영지주의 문서를 개작(改作)한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신약성경은 ‘구속된’ 구속자에 관한 기독교 영지주의 신화에 의존한 문서라고 본다. 그래서 불트만은 신화로 얼룩진 책인 성경을 제대로 보려면 신화를 제거하고 비신화화(Entmythologisierung, 非神話化)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창조론과 신론의 신비주의로서의 영지주의
이 같은 영지주의의 경향은 기독교의 신론과 창조론을 크게 벗어나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영지주의는 사람들이 천상에서 온 존재임을 모르며 육체에 대해 신성의 불꽃들이 특정한 영적 개인들의 육체에 갇혀있다고 본다. 영지주의가 그리스도를 부정하지는 않으나 영지주의에서는 그리스도를 성육신한 하나님이라든가 십자가 고난이 인류의 대속 사역이 아닌 영지의 사명을 띠고 오셨다는 주장을 통해 기독론조차 속상을 입히게 된다. 기독론의 손상은 구원론에도 당연히 영향을 준다. 영지주의는 구원이 믿음이나 행위에 달려있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영지주의에서 보는 구원은 단지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참된 본질을 아는 것이다. 영지주의는 오늘날 유대교 신비주의인 카발리즘 속에서 여전히 그 힘을 발휘하고 있다.
2. 창조과학 속 신비주의
새로운 신앙 운동 창조과학
과학의 영역에도 신비주의가 적용될 수 있을까? 당연하다. 오히려 심령 과학이라는 말처럼 사실 과학이 신비주의화 될 가능성은 대단히 용이하다. 창조과학(Creation Science)은 헨리 모리스(H. M. Morris, 1919-1993)를 원조로 하는 20세기 나타난 성경 해석 운동이다. 1960년대 시작된 만큼 신학적 연륜이 미천하다. 주로 우주와 지구 창조 연대에 대해 6천 년 내외와 창세기 대홍수 단일격변설을 중심으로 성경에 대한 문자적 해석을 시도해 온, 과학을 도구로 한 종교 신학적 운동이라 할 수 있다. 창조과학은 신앙 속 낯선 언어인 “창조과학”이라는 어원에 대한 논의를 창조과학 운동 내부 안에서도 꾸준히 지속하여 왔다. 그만큼 신앙의 운동이 신앙의 낯선 단어를 새롭게 사용하는 것은 분명 부담을 만드는 행동이다.
과학의 반증 가능성에 대응하는 창조과학의 반증 불가 딜레마
과학철학자 칼 포퍼의 반증(反證)주의적 관점에서 창조과학은 과학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과학은 반증 가능해야 함에도 창조는 초자연적 절대자의 존재를 전제한다는 점에서 반증 불가하다. 즉 ‘창조와 과학’이라는 두 단어는 ‘초월과 내재’라는 융합 불가한 속성 사이에서 늘 충돌한다. ‘아버지’인 ‘어머니’처럼 두 단어는 정면으로 만나면 안 되는 단어인 것이다. 이 같은 창조과학의 딜레마는 늘 창조과학이 두 가지 잣대로 창조와 과학의 문제에 접근한다는 평가를 받게 만든다. 즉 과학이 유리하고 필요할 때는 과학의 논리를 사용하다가 과학의 논리로 반박할 수 없는 경우에는 성경의 문자적 해석에 의존하는 방식을 택한다. 일종의 “틈새를 메우는 하나님”(또는 성경) 논리가 성립되는 것이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창조과학이 신학적 측면에서 보면 성경신학적 해석학에 무지하면서도 저돌적이라고 비판 받고, 제도권 과학 속에서는 근본적으로 과학 단체가 아닌 신비주의 신앙 단체라는 지적을 당하는 것이다.
창조과학이 젊은 우주와 단일 격변론에 대한 성경적 신뢰를 바탕으로 성경에 대한 독특한 해석의 잣대와 과학적 해석이라는 두 가지 잣대를 오고가는 것은 분명 신비주의적 경향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이 같은 창조라는 초월의 신비와 과학이라는 내재의 잣대를 구분하지 않는 것은 늘 창조과학 운동이 딜레마 속에서 좌충우돌할 수밖에 없는 신비주의적 한계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에 대해 역사학자 마크 놀이 창조과학은 “성경과 관련해서는 베이컨주의를 잘못 적용했고, 자연과 관련해서는 베이컨주의를 포기했다”는 지적을 옳았다.
창조론과 신론의 신비주의로서의 창조과학
과학적 무리한 해석은 ‘그건 하나님이 하셨으니까’ 라는 한 마디로 모두 무마된다. 예를 들어 성경적으로 우주는 지구 중심이므로 먼 우주의 별들이 그렇게 많다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다. 태양보다 수만 배 큰 천체가 존재한다는 것은 관심 밖이다. 왜? 외계 생명체는 있을 수 없으니까. 아니면 우주가 그렇게 광활할 리가 없다. 하나님은 그렇게 먼 곳에 그렇게 수많은 별들을 만들었을 리가 없다. 지구 중심의 하나님이시니까. 아마 별들은 수억, 수천만 광년이 아닌 빛의 속도로 가도 수천 광년이면 갈 수 있는 실은 아주 가까운 곳에 박혀있는지도 모른다. 성경은 위대한 책이므로 답이 없을 리 없다. 외계인은 당연히 없는 것이다. 사실 이에 대한 답은 모른다는 것이 답이다. 그렇게 알고 믿음 가운데서 기다리면 된다. 모른 다는 것이 그렇게 말하기 어려운 것일까? 성경을 믿던 갈릴레이 이전의 모든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했을까? 태양계 시스템이 있고 지구는 그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갈릴레이 이전 사람들이 믿었을까? 당연히 아니다! 하늘과 별들은 하나님의 영광과 엄위하심을 암묵적으로 보여주는 실체라고 왜 말할 수 없는가. 최근까지도 지구 밖에는 절대 물이 있을 수 없다는 쪽에 창조과학이 집착한 것도 바로 이 같은 성경해석에 대한 미숙한 대처를 보여준다.
성경문자주의가 되어 성경선민주의자가 되어 버리는 참사가 일어나면 안 된다. 충성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창조과학에 대한 충성이 곧 성경에 대한 충성이라고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즉 창조과학에 대한 맹종은 신앙적으로 아주 위험하다. 말고의 귀를 벤 베드로는 예수의 충성스러운 사람이었다(요18:10). 하지만 그것은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행동이었다. 베드로는 십자가 고난은 결코 일어나면 안 되는 일이라고 역설하여 예수님께 ‘사단’이라는 책망을 받는다(마16:23). 창조과학은 과학에 길이 있는 게 아니라 신앙과 그에 따른 바른 신학에 길이 있음을 깨닫는 것이 먼저이다. 즉 창조과학도 신학의 일종임을 깨닫는 일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 창조과학은 신앙과 신학에 있어 신비주의적임을 깨달아야 한다.
3. 지적설계 속 신비주의
창조과학의 대안으로 시작된 지적설계
20세기 후반 창조과학의 대안으로 시작된 “지적설계” 운동 속에도 창조과학과 유사한 신비주의가 보인다. 설계와 설계자이신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지적설계”라는 말은 창조과학처럼 낯설게 느껴진다. 새로운 낯선 단어인 것이다. 창조과학과 달리 지적설계는 설계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충성심이 감추어져 있다.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 속에서 설계의 강조는 가능할 수 있다. 문제는 그 설계자가 누구인가? 왜 인격적인 성경의 창조주 하나님이 아닌 하필 지적설계인가라는 궁금증이 생긴다. 지적설계는 유대인의 유일신, 힌두교의 창조신, 이슬람의 유일신, 조로아스터교의 신, 영지주의의 신, 외계인 종교처럼 창조주 외계인이 설계자라고 볼 수도 있지 않겠는가. 또한 그 설계자는 왜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 과정에서 짜증 나는 모기와 징그러운 쥐들을 창조하였으며 지카 바이러스 같은 미생물들로 애꿎은 아이들을 구제불능의 심각한 장애인으로 만드는가? 그 지적설계자는 왜 우주를 쓸데없이 불필요하게 그렇게 크게 만들어서 인간에게 쓸데없는 상상을 하게 만드는가? 그 설계자는 왜 악마를 창조했나?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 안에 왜 돌이킬 수 없는 악(惡)을 넣은 것인가?
결국 지적설계도 새로운 낯선 단어를 만들어내기는 하였으나 신학의 문제로 환원되어버렸다. 신앙과 신학이 함부로 새로운 낯선 단어를 만드는 작업이 얼마나 당황스러운 결과를 가져다주는지 “지적설계” 운동을 통해 다시 한 번 깨닫게 된 것이다. 창조와 관련하여 굳이 “지적설계”라는 급조된 자연신학적 부자연스러운 말을 동원하지 않아도 신학이 교회의 시작부터 사용해 온 그대로 ‘창조’, ‘설계’, ‘섭리’, ‘보존’과 ‘통치’라는 말로도 충분할 것이다.
편집자 주: 필자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는 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창조론 오픈 포럼 공동대표, 평택대 신학부 겸임교수로 사역하고 있다.
조덕영 박사 bareunmedia@naver.com